(출처: 한겨레)

커버스토리 /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한달째 이정원 들녘 사장

“오늘, 출판인의 역량과 노력은 정보산업의 한 축으로서 지식축적이라는 출판의 매체적 책임을 다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산업이라는 측면에서는 출판의 생존과 연결되고, 문화와 교육이라는 측면에서는 출판의 소명과 연결됩니다.”

구제금융 한파가 한반도를 동토로 만들어 놓았던 1998년은 출판계에도 재앙의 시절이었다. 중소형 서점은 말할 것도 없고 출판 유통의 대동맥인 대형 도매상들이 썩은 고목처럼 쓰러졌다. 그해 11월 320여 국내 단행본 출판사 출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출판인회의 창립을 선언했다. 생존의 기로에서 출구를 찾는 다급한 심정으로 이들은 선언에 동참했다.

유통대란을 막자는 것이 이들을 규합한 일차적 이유였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출판의 책임과 소명을 다하겠다는 결의도 이들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힘으로 작용했다. 한국출판인회의를 창립하는 그 자리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사람이 이정원 들녘출판사 사장이었다. 출판인회의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그가 지난달 2년 임기의 한국출판인회의 5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22일로 회장이 된 지 만 한 달이 된 그를 만나 출판인회의 새 수장으로서 포부와 약속을 들어보았다. 신임 회장은 10년 전의 그 선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출판인회의가 창립된 지 햇수로 10년째다. 창립시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그땐 정말 다급했다. 보문당을 비롯해 도매업체들이 자고나면 무너졌다. 유통망이 붕괴 직전까지 갔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있었지만 전집류·학습지 출판사 중심이어서, 인문·사회·교양서 중심 단행본 출판사들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스스로 대책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는 유통대란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낡은 유통구조의 도관이 터진 거였는데, 새 도관을 놓는 일에 우리가 앞장서야 했다. 이와 함께 출판문화를 되돌아보는 일이 중요했다. 출판정신을 가다듬고 바로 세우고 지식산업의 기틀로서 출판의 구실을 새롭게 다지자는 마음을 모았다.

-회장직에 나설 때 그때의 그 약속을 다시 생각해보았을 것 같다.
=그랬다. 출판인회의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된 목표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건전한 출판환경, 풍족한 출판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건전하고 풍족한 출판환경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출판인회의가 창립 정신을 잃어버리고 친목단체로 전락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그런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출판인회의가 단행본 출판사들의 대표 단체로서 공익성을 키우고 지켜나가야 하는데, 그 임무를 충실히 하지 못한 데 대한 질책이라고 생각한다. 단체 일이라는 게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해야 더 잘할 수 있고 또 일을 같이 하다보면 서로 마음이 맞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친목단체 같다는 오해 섞인 반응을 얻은 것 같다. 요점은 공익성, 공공성이다. 출판인회의가 300여 회원사를 비롯해 출판계 전체의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일하느냐가 관건이다.

-그 점에서 보면 출판시장의 악폐인 ‘사재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공익성을 저버린 일 아닌가.
=사재기는 출판윤리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뿌리뽑아야 한다. 출판사들이 사재기에 뛰어드는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출판시장이 전반적으로 불황이고, 광고를 내도 먹히지 않고, 독자들은 베스트셀러에만 몰리고 하다 보니 사재기 유혹을 견디기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사정이 급하다고 책을 사들여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반칙이고 사기다. 현행 출판진흥법상으로 사재기는 검찰에 고소·고발할 수 있는 범죄행위다. 그동안 출판인회의가 사재기를 제대로 막지 못한 건, 의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재기 방식이 워낙 교묘하고 광범위한 탓이기도 했다. 제가 회장으로 있는 한, 사재기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 이건 유통교란의 문제이기 이전에 출판정신, 출판윤리의 문제다. 5월 안에 ‘사재기 적발팀’을 별도로 꾸려 독립적으로 운영되도록 하겠다. 필요하다면 간행물윤리위원회와 손잡고 변호사도 채용해 공신력을 갖추도록 하겠다. 적발되는 대로 검찰에 고발하겠다. 출판인들도 사재기 정보가 있으면 즉각 우리 쪽에 알려주시기 바란다.

-출판인회의가 출범 때 유통구조의 정상화를 얘기했지만, 지금 출판 유통을 보면 오히려 더 악화됐다는 말도 나올 법하다. 인터넷서점에 신간 할인 판매를 허용해준 현재의 변형 도서정가제가 사실상 정가제를 무너뜨렸다는 비판이 많다.
=맞는 말이다. 도서정가제가 무너지면 당장은 구매자에게 이익이 될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손해다. 할인을 예상하고 출판사에서 미리 가격을 높여 놓으므로 할인이 무의미해진다. 또 값을 낮춰줄 수 있는 베스트셀러 도서들만 더 팔리고, 인문서 등 양서는 더 궁지로 몰린다. 그래서는 양서가 출간되기 어렵다. 출판의 건강성과 다양성을 위해서도 도서정가제는 지켜져야 한다. 현재 국회에 도서정가제법안이 제출돼 있다. 할인률을 5%까지로 하는 내용이다. 최적의 방안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범출판계가 합의해 도출한 안이다. 이번 봄이 가기 전에 통과될 것으로 기대한다. 법안 통과를 위해 대한출판문화협회와도 공동 투쟁하겠다. 또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시장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대형서점, 인터넷서점, 출판인회의 등 당사자들이 모여 유통협의회를 만들었다. 도서정가제뿐만 아니라 경품 문제, 1+1(책 한 권을 사면 다른 한 권을 끼워주는 것) 문제를 담은 규약을 제정하고 거기에 따라 감시하고 제재할 것이다. 유통이 바로 서지 않으면, 양서가 살아날 길이 없다는 걸 제 자신이 먼저 절감하고 있다. 규약을 어기면 책공급을 중단한다는 약속을 출판인회의 소속 180개 출판사로부터 이미 받아 놨다. 최대한 빨리 규약을 만들고, 그 규약에 따라 칼을 뽑겠다.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잡지 <북&이슈>를 복간하겠다는 공약도 내놨는데, 그보다는 출판인회의 선정 ‘이달의 책’을 복원하는 게 더 급하지 않나.
=그렇게 본다. <북&이슈>는 출판인회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활성화해 온라인으로 내볼 생각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달의 책’ 선정이다. 출판인회의 초기에 ‘이달의 책’ 선정이 호평을 받았는데, 나중에 힘이 떨어져서 그랬는지 결국 없어지고 말았다. ‘이달의 책’ 선정이 제대로 되려면, 책을 선정함과 동시에 선정 도서를 일부라도 출판인회의가 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겠다. 또 대형서점이나 공공도서관과 연계해 선정도서를 체계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그 문제도 이미 협의를 마쳐 가동 준비 완료 상태다. 결국은 자금이 문제인데, 이 문제도 몇 군데 기업체에서 상당액을 지원받았다.

-공정성 확보도 중요한 일 아닌가.
=그렇다. 공정성을 지킬 수 있도록 선정위원을 모시겠다. 선정위원은 책의 내용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출판 시스템도 알고 있는 분 중에서 뽑을 예정이다.

-출판미래연구소를 만든다는 계획도 밝혔는데….
=출판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이다. 책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출판 인프라를 어떻게 하면 강화할 수 있을지도 연구해봐야 한다. 대형 출판사들이 임프린트(출판사들의 자회사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출판의 가치를 키우는 일인지 아니면 성과주의에 매몰돼 덩치 키우기만 하는 것인지도 따져볼 것이다. 뚜렷한 가치를 지닌 출판사가 살아남을 길은 뭔가 하는 문제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장인용 지호출판사 사장께 연구소를 맡아 달라고 일단 요청해 놓은 상태다.

-출판인회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무국을 내실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사무국 직원이 현재 6명인데, 안타깝게도 그동안 사무국을 더 확장하지 못했다. 최소한 네 사람은 더 필요하다. 문제는 돈인데, 회원사를 늘리고 회비를 더 확보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 출판사들이 들어오려면 출판인회의가 그만큼 더 신뢰를 주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 더 공정하고 더 공개적이고 더 공익적인 출판인회의로 만들어보겠다.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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