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홍성 그물코출판사 장은성 사장 /

초심을 지키고 사는 이들은 드물다. 일에 파묻히면 잊어버린다. 왜 그 일을 시작했는지도 까먹는다. 잊고 살다 보면 가려던 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불행한 이들이 많다. 그때부터 스스로 최면을 건다. 내가 젊어서, 철이 없어서, 세상을 몰라서 그랬어. 지금 가는 이 길이 옳아. 저기 봐.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길을 가잖아. 그런데, 그런데 왜 행복하지 않지?

그물코출판사 장은성 대표는 2004년 8월 서울을 떠나 홍성으로 내려왔다. 출판사를 접은 것은 아니다. 출판사를 시작할 때의 그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다. 그 마음을 되찾아 만들고 싶은 책을 편한 마음으로 내고 그래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다.

1인 출판사라 기획, 편집, 제작, 영업 등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해야 하지만 장 대표는 요즈음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꾸준하게 책을 내야 한다는 부담도 없고 제작비와 인건비 때문에 책 판매에 밤낮없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가장 기분 좋은 점은 그가 처음 출판사를 만들 때 했던 다짐을 지키고 살기 때문이다.

‘생태주의 관련 책을 낸다. 재생용지만을 쓴다. 양장은 만들지 않는다. 신념에 맞지 않는 책은 만들지 않는다. 광고를 하지 않는다. 2천부 이상 팔리면 베스트셀러라고 생각한다.’ 이를 되찾는 데 6년이 넘게 걸렸다. 수업료도 톡톡히 치렀다.

2001년 그는 다니던 중견 출판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었다. 저녁이면 출판사에서 알게 된 선후배들과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술을 마시면 출판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책 내용을 고민하기보다 껍데기를 화려하게 하는 데 더 신경을 쓴다, 권하기에도 부끄러운 책에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붓는다, 초판을 1만부 찍고 7천부를 서점에 깔지만 3천~4천부를 반품으로 받는 일이 다반사라는 등. 출판사가 아니라 출판공장이라고 자조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술자리마다 제대로 된 출판사를 한번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오갔다. 그에게 “네가 한번 해보라. 그러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 내가 한번 만들어 보자. 2001년 5월 출판사 등록을 했다. 10년 넘게 환경 관련 책만 내고 있는 따님출판사를 모델로 했다. 출판사에서 일할 때 우연히 접한 〈녹색평론〉을 통해 생태주의의 세례를 받은 터라 생태주의 전문 출판사를 만들고 싶었다.

예전에 거래하던 인쇄소 건물의 옥탑방을 빌려서 사무실로 썼다. 이듬해 낸 첫 책이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 반응이 좋았다. 언론에 소개도 되고 수천 부가 팔렸다.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도 첫 책 못지않게 잘 팔렸다. 여섯 권의 책을 내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욕심도 났다. 생태환경책을 만들고 싶다는 이가 찾아오자 편집자로 채용했고, 영업자도 뒀다.

하지만 직원을 채용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방향은 잃지 않았지만” 출판사 운영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편집자는 자신의 몫을 하느라 정기적으로 책을 냈다. 영업상 필요해 부수도 더 찍어야 했다. 책을 수금하기 위해 썩 내키지 않는 내용의 책도 내야 했다. 어느날 돌아보니 그물코도 신간을 밀어내고 수금하고 반품받는 기존 출판계 관행을 따르고 있었다.

“출판계에서는 그런 현상을 멍든다, 골병든다고 합니다. 그물코도 골병이 든 거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행은 함께 찾아온다고 사무실도 비워줘야 했다. 새로 사무실을 얻을 돈도 없었다. 친구의 권유로 고향인 홍성으로 내려와 빈 농가에 사무실을 차렸다. 서울을 떠나고 나니 초심이 새록새록 다시 생각났다.

그래. 내고 싶은 책이 생기면 내자. 2005년은 동면 기간이었다. 한 권의 책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2006년이 되자 다시 힘이 생겼다. 풀무학교와 유기농업으로 이름난 홍동면이 자리한 홍성은 생태주의 출판사를 지향하는 그물코한테 축복의 땅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고 싶은 책도 생기고, 원고를 갖고 찾아오는 단체들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적지 않은 책을 냈다. 〈백성 백작〉, 〈농부의 길〉, 〈오리농법〉, 〈풀무학교 아이들〉, 〈풀무 청소년 특강〉, 〈헌책방에서 보낸 1년〉 등. 유기농 도농직거래 운동을 하는 한살림과 함께 〈땅에 뿌리박은 지혜〉, 〈태양도시〉, 〈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 등을 냈고,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제안으로 〈풀씨〉와 〈간이역〉을 냈다.

여느 출판사처럼 만 권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는 없지만 그물코의 책은 생태주의와 생명운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조금씩 소문이 나 꾸준히 팔리고 있다. “금융기관의 부채도 거의 다 갚아 출판사는 운영이나 재정면에서 다시 건강해졌다”고 했다. 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만난 여느 생태주의자처럼 그도 소박하지만 마음은 넉넉하게 산다.

지나고 보니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먼저 부모님이다. 장 대표는 지금까지 빠짐없이 자신이 낸 책을 부모님께 갖다 드렸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그냥 받으신 적이 없다. “내가 먼저 사봐야 마음이 편하다”며 집을 나서는 그에게 책값을 주셨다. 다음으로 대학생 한달 하숙비 정도의 생활비를 받으면서도 잔소리 한번 없이 딸 채원이를 구김살 없이 키우고 있는 아내 이미희씨다. 그의 초심 회복은 그런 이들로 인해 가능했다고 한다.

“하루에 10여 권 가량 책 주문이 들어와요. 제가 만든 책을 사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홍성/글·사진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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