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세트 - 전12권 (양장)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태백산맥>을 읽었던 것은 대학시절이었습니다. 이내 <한강>을 읽었고, 최근에 마지막 작품인 <인간연습>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아리랑>을 읽지 않고 아껴두었던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진 선생의 글솜씨에 선악의 대립구도가 확실할 일제치하를 배경으로 한다면 무에 볼 것이 있겠는가 하는 심보였습니다. 결국 읽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동안 숱하게 당시 사회상을 배워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은 적지 않이 낯선 풍경으로 다가왔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방언을 따로 정리했고, 극중 인물들의 물음표를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12권을 모두 읽어갈 때 즈음에는, 메모한 종이의 양도 제법이었습니다. 이것을 정리해내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죠.

- <아리랑>은 1904년 1차 한일협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40여년의 시간적 깊이와 대한제국, 만주, 간도, 하와이, 중국, 일본, 미국을 넘나드는 공간적 넓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동학농민운동부터 의병항쟁, 3/1 운동, 독립군투쟁을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사회 문화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던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의 피땀어린 투쟁들이 담겨있고, 그 반대편에는 1차 한일협약으로부터 시작해 의병대토벌작전, 토지조사사업, 간척사업, 농촌진흥운동,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상이 담겨있습니다. 물론, 소설 <아리랑>은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당시를 살아냈던 실존 및 가공 인물들의 이해관계와 미풍양속에의 세밀한 묘사 속에 위치시키고 있구요.

- 더구나, <아리랑>은 그저 '식민지 역사의 소설적 각색'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리랑>이 기획되고 출판될 당시인 90년대 초중반의 사회와 문학계의 흐름을 통해, 아니 그 이전에 조정래라는 작가가 어찌하여 자신을 '글감옥'에 몰아넣으면서까지 이 작품을 기획하고 집필했는가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를 두고 한 문학평론가는 <아리랑>은 "문학이 세운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아리랑 연구>에 따르면, 우리 문학에서 분단에 대한 비판은 70년대 이후에나 가능했다고 합니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줄곧 20년 넘게 문학은 자의든 타의든 순수문학(?) 으로서 인간성을 강조하거나 개인의 실존문제만을 다루어왔던 것이죠. 그리고, 20년의 터울 뒤 90년대 문학은, 과거로부터 단절하거나 변화하려는 움직임들이 강하게 나타나구요. <아리랑>은, 95년, 이런 변화의 물결 속에 자리합니다. 조정래 선생께서는 <태백산맥>에서 해방 이후 친일문제를 매듭짓지 못한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데요,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사회를 소위, 천민자본주의로 병들게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진단하시죠. 그리고, 이때부터 이미, 선악의 확연한 대립구도 속에 자리잡을 <아리랑>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친일 한국인들은, 그들의 잔인한 행동상이 폭로될 운명을 가진채 재탄생하고 있었던겁니다.

- 앞서 말했던 것 처럼, <아리랑>의 선악구도는 지나칠 정도로 확연합니다. 동시에, 개화당과 을사의병 의병장을 거쳐 만주 독립군으로 활약하게 되는 송수익이라는 인물이 시종일관 굵은 굴곡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당시의 역사적 사건과 논쟁들에 대한 작가의 가치판단이 송수익의 행보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논란의 여지가 없을지라도,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과 보황주의에 대한 비판, 자생적 민족신앙으로서의 대종교의 포교,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 속에서 선택하게되는 무정부주의,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가치판단의 굵은 굴곡은 송수익 뿐만 아니라, 단재 신채호와 같은 역사적 인물, 신간회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적극적인 부각을 통해서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런 굴곡이 <아리랑>의 소설적 매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신채호, 나철, 홍범도, 이회영, 양세봉, 이상룡, 김원봉, 이승만, 이광수, 김일성과 같은 실존인물과 송수익, 공허, 지삼출, 방영근, 방대근, 방수국, 장칠문, 백남일과 같은 허구적 인물들의 다채로운 조화, 그리고 세시풍속, 소도구, 상품, 생산양식, 교통수단, 비속어, 등에 대한 풍부한 묘사가 언제나처럼 소설읽는 재미를 톡톡히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적 매력이 크게 드러나는 부분은, 농사를 비롯해 하와이 농장이나 군산항, 일본의 강제노역장에서의 노동에 대한 묘사와 세시풍속과 놀이문화의 묘사입니다. 이러한 묘사들이 소설의 굵은 굴곡을 가로 세로로 넘나들며 다채롭고 아름다운 선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죠. 또한, 소리꾼 차옥녀를 비롯해, 철도공사장 인부들의 노래, 차득보의 장타령, 독립군가, 무엇보다 제목이기까지 한 '아리랑'은, 소설에 작은 운율을 심고 있습니다.

- 큰 흐름과 함께 작은 흐름들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선악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세분화되는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소설적 묘사, 무정부주의로 매듭지어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평가는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두번째 주제는 문학평론가들의 평론 모음집인 <아리랑 연구>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지 않은 내용이군요. (<아리랑 연구>는 소설사적 맥락, 여성 등장인물, 친일파, '아리랑', 등 다양한 초점으로 <아리랑>을 평론하고 있습니다.)

- <아리랑 연구>에 따르면, 극중 친일파를 크게 세 부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중인 내지 상인 출신으로서 식민지 시대의 근대적 변화 속에서 지배계급적 면모를 과시하고 있는 장덕풍 백종두 등입니다. 두번째는,  중산층이나 지식인들로서 계급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자신의 위치를 갈등하며 때로는 방관자를 때로는 적극적 참여자이기를 선택하는 이들입니다. 민동환 홍명준 박정애 등이죠. 마지막은 하층계급 출신으로서 식민지 시대의 혼란과 좌절을 통해 일탈욕구를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서무룡 양치성 박동화 박용화 등입니다. 선악의 대립이라는 기본 구도 속에서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친일파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잡아내고 있는 <아리랑>의 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공산주의 운동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내용적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유학생들과 만주 독립군 부대 사이에서 번져나가던 공산주의 열풍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자유시참변, 고려공산당과 한인사회당 사이의 갈등, 중국공산당 내의 민생단 투쟁, 스탈린에 의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와 같은 논쟁적 성격의 사건들, 조선공산당 창당과 재건운동, 1930년 프로핀테른 9월 테제, 1935년 코민테른 인민전선 테제와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중심인물인 송수익의 행보나 정도규, 공허, 등의 대사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시각은, "제 아무리 약소민족의 해방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정치적 기본단위로서의 민족은 여전히 유효하다."라는 비판과 더불어 건강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가치판단이라기 보다는, 식민지 해방의 도구로서 공산주의를 바라본 것이라 전면적이고 직접적이지는 않습니다. 무정부주의로 귀결되는 송수익의 행보 역시 이 대목에서는 유난히 확연하지 않아서, 이것을 가치판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조정래 선생은 서문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아냈던 이들의 노력은 이념에 관계 없이 그대로 민족통일이라는 재단 위에 바쳐져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문 뿐만 아니라 극의 전면에 흐르고 있는 민족에 대한 강조 때문에 '국수적이다' 라는 비판까지 받았다고 하는데요, 소설 <아리랑>의 배경과 현재적 의미를 간과한 비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적어도 <아리랑>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재구성한 과거의 고통들과 방치되고 있는 친일에 대한 청산 앞에 겸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기본단위로서 '민족'이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엄연히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지향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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