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블랙 러시안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곰팡이꽃 외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50
배수아.김연수 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 그리 많은 책을 읽어온 것도 아닌데, 제법 가리기까지 했었습니다. 몇편의 대하소설을 제외하고는 당췌 소설을 읽지 않았었죠. 마음먹고 소설을 읽어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막상 소설을 읽으려고 하니,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가 걱정이었습니다. 급하게 입문서라 생각되는 몇권의 책을 훑었습니다. 따분하기 그지 없는 한국소설사를 띄엄띄엄 훑으며, 소설에 대한 호기심은 조금씩 사그러들고 있었을 때, 도서관 서가에서 창작과 비평사의 '20세기 한국소설' 전집을 발견했습니다. 알라딘에서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메일링리스트에서 전집 할인행사를 봤던 기억이 교차되면서 낯설지 않은 이름을 찾았습니다. 서가를 훑는 시선은 40권이 넘어서야 비로소 멈추었습니다.

# 김경욱 「블랙러시안」

- "지국에 불시착하는, 수억만 번째의 첫눈이었다." 이 표현만큼, 이 소설의 매력을 보여주는 문장은 없을 것 같군요. 처음과 마지막 장면은, 비행기 결함으로 화성에 추락한 주인공이 줄어드는 산소통의 눈금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양단의 장면이 품고있는 것은 '은서'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 은서를 찾아헤매는 주인공은 급기야 그녀가 활동하던 UFO동호회까지 찾아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은서 대신 만난 다른 회원은 "다른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믿느냐?"라는 알 수 없는 얘기를 남긴 채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UFO동호회에서조차 은서를 찾지 못한 주인공은, 결국 어지러움을 느낀 채 쓰러지고 맙니다. 그 위에 화성의 주인공이 겹쳐집니다. 그가 애타게 찾아해메었던 은서는, 화성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에게 나타납니다. 그를 구하러오는 우주선 '블랙 러시안 - 그녀가 즐겨마시던 칵테일'호로 말이지요.

-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낸 상큼한 소설이었습니다. 소설가 김경욱은 PC통신, 인터넷을 비롯한 영상매체를 소재로 채택해왔다고 하는데요, 아직 현실에 녹아내리지 않은 상상이나 기술이 바꾸어 낼 우리 삶의 모습들을, 소설가 김경욱은 그려보이고 있습니다.

#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 가장 알쏭달쏭한 작품이었습니다. 남자친구와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의 푸른 사과며, 자동차를 가로막는 검은고양이, 그리고 친구 소영이 구입하려던 은빛가위까지. 작가의 생각을 쫓아가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결국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 주인공 '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백수생활 백서>의 그녀를 무척이나 닮아 있었습니다. 타인을 비롯한 주변 세상 뿐 아니라, 심지어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해 조차도, '나'의 시각은 무척 건조합니다. 의대생과 결혼한 후 백화점 쇼핑이나 다니며 그녀에게 일상사를 속살거리는 사촌과, 벗어나고 싶어했던 정비공으로 재회하게 되는 김신오의 존재 역시도, 그녀의 무채색을 더욱 바래보이게 할 뿐입니다.

# 김연수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년」

- 이번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낯익은 이름이었습니다. 김연수, 군에서 책읽기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청춘의 문장들>의 그였습니다. 동호회 회원들의 극찬에 떠밀려 집어든 것이죠. 정확하지는 않지만, 서문에 씌여져 있던, "유유히 흘러가는 청춘의 시간들이 아까워 문장에 잡아두고자 했다."는 표현이 기억에 남습니다. 수필집에 가두어진 그의 청춘은 꽤나 잔잔히 흘러가고 있었죠.

- 단편집에 실린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년> 역시 예의 잔잔한 목소리로 읊어지고 있습니다. 소위, 배 다른 동생인 재식을 바라보는 '나'는, 까닭 없이 재식을 괴롭혔던 어머니와 재식이 집을 나간 후 '제발로 나간 만큼 제 알아서 하라.'던 아버지의 애증(?)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재식을 찾아간 '나'는 그로부터 자신이야 말로 가장 어렵고 불편한 사람이었음을 듣게되죠.

- 재미있는 것은 독일에서 돌아와 재식과의 재회를 준비하는 '나'의 행보와 나란히, 북한 김정일의 사망 소식이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배 다른 동생 재식을 그저 '재식'으로 바라보려하는 '나'와 자극적인 북한의 소식에 귀기울이지 않는 '나'가 묘하게 겹쳐집니다.

# 하성란 「곰팡이꽃」

- 가장 재밌는 작품이었습니다. 자신의 후배가 마음에 두었던 여직원과 결혼한 후, 주인공 남자는 옆집 여자의 쓰레기를 뒤지는 일에 몰두합니다. 작가 특유의 독특한 초점과 섬세한 묘사 - 해설에서 인용 - 이 쓰레기를 뒤지는 그의 모습을 더욱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남자는 옆집 쓰레기를 헤집고 분석하여, 옆집 여자의 체구며 취향, 생활패턴까지 알아냅니다. 마침, 여자에게 고백하고자 꽃이며 생크림 케잌을 들고나타나는 또 다른 남자가 등장하며, 그의 행동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구요.

- 남자는 '쓰레기 분석을 이용한 사회학'을 얘기합니다. 또 다른 남자의 어리숙한 모습이 그를 그렇게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쓰레기를 뒤지는 일은 의사소통 행위의 일환이자, 더욱이 탁월하기까지 한 그것이죠.

- 남자를 보며, 대학시절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애써 고백했다가, "오빠, 저 좋아하세요?"라는 대답을 들었던 웃지못할(?)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친구에게, 말 한마디도 다듬고 또 다듬던 제 모습은, 그저 애써 마련한 만남을 따분해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졌겠죠? 상대를 잘 알아가는 것은, 많고 적음에 상관 없이 소통의 절반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순환되지 않는 절반의 많음은 오히려, 순환을 압박할 뿐이겠지요. 참으로 탁월한 작품이었습니다.

# 조경란 「망원경」

- 망원경의 특징이 너무 유별난 까닭에, 주인공인 '나'가 망원경을 구입하는 순간부터 재미가 덜했습니다. 보고싶은 것과 보기싫은 것 모두를 골고루 비추는 눈과 달리, 망원경은 보고싶은 것 만을 집중적으로 비추니까요. 망원경 렌즈에 비추인 '나'의 주변풍경이란 철거를 앞둔 우체국 직원 '나'의 황량함 내지는 섭섭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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