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0~71년
미셸 푸코 지음, 양창렬 옮김 / 난장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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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푸코의 연관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강의록을 보고서야 비로소 <담론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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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니체전집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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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빌라도가 가시관을 쓴 예수를 가리키며 유태인을 향해 한 말이다 (요한 19: 5). 영역자 카우프만에 따르면이 텍스트는 스스로를 재판정에 세운 것처럼 니체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로서,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형식과 어휘를 차용했다고 한다. 니체의 저작들을 읽을 때 가장 처음에 읽어야 하는 저작으로 꼽히지만, 니체의 다른 글들이 그렇듯 읽고 그 내용을 바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서문을 읽어보면, 니체는 분명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다. 그러나 니체는 독자에게 친절한 저자가 아니다. 더구나 다른 저작들은 더러 해설서도 있지만, 이 짧은 지적 자서전의 한국어 해설서는 없다. 가장 좋은 해설서라면, 니체의 전기가 될텐데, 츠바이크의 훌륭하지만 아주 간결한 책 말고는 아직 그의 전기를 읽어보지 못했다. 언제고 시간과 정성이 되면, 카우프만이 쓴 전기를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


1. 인생 추상화

본문의 앞의 세 장들은 일단 다 자화자찬으로 읽힌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하고, 영리하고, 좋은 책을 쓰는지그런데 막상 내용을 읽어보면, 실제로 그가 현명하고 영리한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첫 장에서는 그의 인생과 사상이 추상화처럼 그려져 있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바그너 내외(336),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의 모습들이 살짝살짝 등장하지만, 니체만이 알아들을법한 방식으로 언급된다. Z와 마찬가지로, 니체는 건방지게도 독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만한 "가장 정선된 귀"(365)를 요구한다. “나는 데카당이면서 동시에 시작이다”(331), “때로는 병자의 관점으로 좀더 건강한 개념들과 가치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반대로 풍부한 삶의 충만과 자기 확신의 관점에서 데카당스 본능의 은밀한 작업을 보기도 한다”(333), “건강에의 의지와 삶에의 의지를 나의 철학으로 만들었다”(334), “동정을 극복하는 것은 고귀한 덕이다”(339), “나는 인간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공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감을 참아내기 때문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고독이다”(346) … 니체의 여러 저작들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다시금 반복되는데, 이것들 역시 보배라기보다는 하나하나가 다 독자성을 갖고 있는 구슬들 같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내 귀는 아리아드네의 작고 동그란 귀가 아니라, 나귀의 긴 귀인가보다. ㅋㅋ


2. 취향

두 번째 장에서 니체는 자신의 취향(Geschmack, taste) [a. k. a. 자기 방어 본능에 대한 관용적 표현]을 그가 접한 것들에 대한 호오를 분명히 함으로써 명확히 밝힌다. 이는 그가 비판하는 無私(Selbstlosigkeit; selflessness)에 대립되는 태도이다.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놔두지 말라는명령(366-7)이 표출된 거리두기의 파토스가 정리되지 않은 채 표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 좋아하는 것:  어떤 행동의 나쁜 결과를 가치 문제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것; 영양 섭취(nutrition); 피에몬테 요리; 아침에 한 잔 마시는 차, 차 마시기 한 시간 전에 마시는 기름 뺀 진한 카카오 한 잔; 걷는 것; 파스칼, 몽테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코르네유, 라신, 모파상, 스탕달, 하인리히 하이네, 실재론자 베이컨; 파리; 쇼팽

 

- 싫어하는 것: 양심의 가책; (너희는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영혼불멸, 구원, 피안; 독일 요리 전반, 독일 정신, 알코올(와인, 독일 맥주), in vino veritas, 간식, 커피; 앉아 있는 것; (독일 제국적으로 변해버린) 바그너!!; 생각하는 능력을 잃고 반응만 하고 있을 뿐, 스스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책을 그냥 뒤적거리는학자 (368); 심지어 아침놀을 맞을 때 책 한 권을 읽는 것.


3. 존재, 생성, amor fati

좀 지루하다 싶은 취향 표명의 퍼레이드 끝에, 이 책의 부제인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How one becomes what one is)?”에 대한 대답이 9절에서 시전된다. 부제의 한국어 번역은 니체가 염두에 둔 바를 (독어는 차치하고) 영어가 보여주는 만큼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이렇게 의역해보면 어떨까? 어떻게 1844년에 태어나 1888년까지 살아온 니체가 지금 1888년에 존재하고 있는(is) 니체로 생성된 것인가(becomes)?” 니체는 이 물음에 대답한다. “가치의 전도라는 과제를 위해서는 한 개인 안에 함께 거주하고 있는 능력보다 더 많은 능력이 필요했었을 것이라고(370). 한 때는 문헌학자였고, 그 다음에는 대학교수였던 니체는 그 상황을 꿈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어떤 것을 원하고’, ‘추구하는’ ‘목적소망을 경험상 알지 못한다고, 그것을 위해서 한 번이라도 열심히 노력했던 기억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의 존재는 과거의 내가 목적으로 삼아왔던 바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과거의 주저함, 옆길로 새기, 겸손함, 자기의 과제가 아닌 것에 대한 정력의 허비 등이 최고의 현명함(supreme prudence)으로 농익어 만개한 것이다.

 

10절에서는 8절까지의 취향들, 별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되는 그 모든 사소한 사항들”(371)에 대해 말한 이유에 대해 자문자답한다. 그런 것들이 이제껏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들 , 영혼, , , 피안, 진리, 영생 등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형이상학과 기독교가 신봉하는 것은 꾸며진 포즈의 파토스일 뿐이라고. 그러면서 나쁜 피를 지닌 모든 것에 내 존재로 항거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amor fati를 말한다. 10절 끝인데, 다시 번역해보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리고 모든 영원 속의 어떤 순간이라도 그 순간의 자신과 달랐으면 하고 바라지 않는 것이다.

필연이 있다면, 그것을 그저 감내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 그 필연인 것을 기꺼이 사랑하자.


44세의 나이로 이 Ecce Homo를 쓰던 토리노의 가을, 그는 어떤 마음였을까? 건강은 자주 안 좋았고, 그 순간까지 그의 저작은 결코 성공적이지 않았다. 세 번째 장 마지막에 나오는 덴마크인 게오르크 브란데스 박사가 자신에 대해 강의한 것에 직설적으로 기뻐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제야 조금씩 그에 대한 반향이 나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 운명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40대 중반의 니체가 이렇게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서툴게 살아왔던 후회로 가득한 지난날 그리 좋진 않았지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

 

4. amor fati와 디오니소스

2장 말미에서 개진된 amor fati 3, 4장까지 이어진다. 1장이 인생 추상화였다면, 3장은 사상 추상화라고 할 법하다. 이제까지의 주요 저작들에 대한 일별이 전혀 친절하지 않게 이뤄진다. 바그너 혹은 그를 좋아했던 지난 날의 자신에 대한 억하심정이 전체에 녹아들어 있다. 혐오와 후회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그것 역시 운명으로서 사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6). “모든 정신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정신”(429), “내부의 모든 것이 흐름과 역류, 썰물과 밀물을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영혼”,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긍정”(431), “과거를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 (it was)’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thus I willed it)!”로 변형시키는 구제를 행하는 자 (436).

 

자신의 과거에 포함되어 있는 바그너는 혐오의 대상일 수 없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독일 제국과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은 지극한 혐오의 대상이다. 니체가 인류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순간에도 독일인들은 그에게 불멸의 실수를 저지르고, 그녀는 그를 비웃는다 (454-5).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니체의 이 장광설(384-6)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5. 비도덕주의자로서의 운명

Ecce Homo를 자기변호로 읽는다면, 과연 니체는 자신의 무엇을 변호하고 싶었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그가 늘 자신의 현재의 임무로 여겨온 모든 가치의 전도를 실천하는 비도덕주의자로서의 삶이다. 그것이 니체의 운명, 그가 사랑하는 그의 운명이다. 이것이 마지막 4장의 내용이다. 다이너마이트, 진리를 말하고 활을 잘 쏘는 페르시아적 덕, “이 파렴치한 것을 분쇄하라는 볼테르의 반교회 구호는 모두 이제까지 도덕이라고 믿어온 것과 그 도덕이 제시한 삶을 사는 선한 인간, 곧 눈을 깜박이는 최후의 인간들을 겨냥한다. 이 도덕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대신 피안(beyond)’참된 세계개념을 고안해냈다. 그 도덕은 삶을 신으로 대체하고, 인류를 개선한다는 신성한 구실로 삶의 피를 빨아대는 흡혈귀이다.


책의 마지막에 니체는 나를 이해했는가?”라고 묻고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박힌 자라고 서명하였다. 『권력의지』 (카우프만 편집본) 1052절에 따르면, 기독교에서 고통은 신성한 유형의 존재에 이르는 길이고, 십자가에 못박힌 신은 생명을 향한 저주를 나타낸다. 반면, 디오니소스에게는 존재 자체가 엄청난 크기의 고통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히 신성한 것이며, 갈가리 찢긴 디오니소스는 영원히 새롭게 태어날 생명의 약속이다.


아마도 니체는 과거에 살았던 자신의 삶과 현재의 삶과 미래의 그의 흔적 모두를 긍정하며 Ecce Homo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다.


6. Reading Nietzsche with malice

지금까지 이 친절하지 않은 책을 선의를 갖고, 그러니까 도대체 저자가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어떤 선입견도 개입시키지 않고 읽어봤다. 나는 왜 이렇게 뛰어난 독자인지… (데헷!)

 

글을 맺는 김에 숨길 수 없는 악의를 살짝 드러내보자.

 

- 19세기 말 니체는 도덕을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에 니체 혹은 니체주의가 비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도덕인가? 그렇다면 오늘날의 도덕은 무엇이고, 아니라면, 도덕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가? 요즘 사람들은 니체를 왜 좋아하는가? 니체가 무슨 위로를 해준다는 것인가?

 

일찍이 니체가 네 살 때인 1848, 역시 독일을 정말 싫어했던 두 청년은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들 머리 뒤에 있던 후광(halo)은 이제 사라지고, 그들이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임금노동자로 전락된 사실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로부터 3-40년 후, 이 루터교 목사 아들은 여전히 성직자의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463-466). 아직도 그랬단 말인가? [<독일이데올로기>와 <신성가족>에서 비판받던 브루노 바우어가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에게 찬사를 받은 사실도 가십으로서는 좋은 이야깃거리일 것 같다.]

 

니체는 성직자들에게서도 썩은 냄새를 맡고, 사회주의나 민주주의나, 평등한 권리를 떠드는 여자들에게서도 썩은 냄새를 맡고, 국가와 시장에서도 썩은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란 '자기 방어 본능'이다(366). <기생충>에서의 그 냄새, 언제나 선을 넘지만, 자기 냄새는 맡을 수 없기 때문에 감출 수 없는 냄새... 니체가 “어떻게 모든 것이 맛있을 수 있는가?”(447)라고 물었듯, 나는 그에게 [혹은 그의 코 안에 있다는 천재성(457)에게] "썩은 냄새는 다 똑같은 썩은 냄새인가?”라고 묻고 싶다. "썩은 냄새"라는 본능적 거부감의 발동은 싫다는 비명일 뿐, 내 고급진 취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투정일 뿐, 잘못되었다는 비판 혹은 진단이 될 수 없다. 당연히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도, 그 잘못들에 대한 대안도 추론되지 않는다. 냄새가 선을 넘지 못하도록 멀리 거리를 두는 수밖에 없다. 그 잘난 귀족적 취향은 아랫것들의 삶을 비하할 뿐, 그리고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뿐, 무식하고 천한 '잡것들'과 섞이려 하지 않는다. 정녕 니체는 "사회"를 "무리"와 동일시하는 배배 꼬인 꼰대일 뿐인가? 


- 니체가 스펜서를 물고 늘어지며 사회과학을 거부하고자 한 것은 번짓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 최근의 니체 소비는 니체를 아니오라고 할 줄 모르고 만 할 줄 아는 나귀로 만들어 숭배하는 것 같다. 역겹다. 이 기분이 고귀한 내가 갖는 거리두기의 파토스인 것이다. 나를 이해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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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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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를 읽기 전 워밍업으로 읽은 책. 그리고 처음 읽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 <이 사람을 보라>를 읽고 싶은 마음도 증폭시켰을 뿐만 아니라, 츠바이크의 다른 글들도 찾아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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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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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간 남산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해야 할 일이 사회과학 고전 읽기의 즐거움에 관해 한 마디 보태는 것이라 김현의 책 두 권을 빌림.

 

1.

먼저 [책읽기의 괴로움]을 봤는데, 문학 서적 읽기의 즐거움과 사회과학 서적 읽기의 즐거움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 김현의 책읽기의 은밀한 즐거움은 텍스트의 구조를 잊고 자기 몽상 속에 빠져 부유하는 말들과 싸우는 것이다. ([괴로움] 13쪽). 이것은 철학과 사회과학 서적에는 해당되지 않을 듯. 사회과학 서적은 대부분 중의적 해석을 차단하고, 건조하고 명확한 진술로 쓰여진다.  

 

(2) 책읽기는 책을 통해 불행이나 결핍이 되어, 충족이나 행복을 싸워 얻게 하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 ([괴로움] 233쪽). 이 역시 문학에나 해당될 듯.

 

(3) 책읽기의 또 다른 고통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 없기 때문 ([괴로움] 233쪽). 역시 문학에나 해당될 듯. 오늘날의 철학/사회과학은 어떤 실천을 제시하지 않고, 분석이라는 미명 하에 해석/관조로 몸을 웅크린다.


2.

말년에 더 편하게 쓴 일기집인 [행복한 책읽기]를 보면서 그래도 비슷한 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역사와 계급의식]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전혀 선동적으로 읽히지 않았는데, 1987년 당시 한국에서의 독서는 그 책의 선동성을 느끼게 하였고, 그 이유를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데서 찾는다. 책을 손에 쥐고 읽는 그 육체가 처한 상황의 중요성. 이것은 읽는 책의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독자가 겪는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당위적인 독서의 목적이나 책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사탕발림으로 내세워 꼬실 수 있는 말은 아니고, 체험으로 독서 후의 사색을 통해 느껴봐야 정리될 수 있는 감정이다.  

 

3.

후암동으로 내려와 태국음식점에서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저녁을 먹고, 집에 왔는데 졸음이 밀려왔다. 집에 있는 [행복한 책읽기]를 다시 집어들고 아까 읽다 만 부분을 편 채 침대에 누웠는데, 8시도 되기 전에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아직 자정도 안 되어서 월요일 아침이 걱정되어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육체가 너무 말똥말똥해서 다시 책읽기 시작. 방금 다 읽었다. 아까 아침에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책읽기가 되었던 것은 그의 말년이 나의 청년기의 시작과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이름들. 그보다 먼저 죽은 이들과 그 뒤에 죽은 이들의 이름들. 아마도 그의 일기에 나왔을 때와는 이름의 무게와 의미가 달라진 이름들. 소설 [태백산맥]을 각 부 별로 읽었던 그의 독서와 학력고사 끝나고 열 권을 한 번에 읽었던 생애 최초 대하소설 독서. [마지막 황제], [프라하의 봄] 같은 영화들. 몇 년 전 [역사와 계급의식](거름)의 일부를 읽으면서 옛날에는 이것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읽었는데 번역이 그지 같다고 생각했던 때 등등.

 

4.

중학생 때 [비밀일기], [다니의 일기] 같은 것을 읽고, 나도 일기를 써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오늘이 또 그렇군. 이제 눈을 붙여야지. 두 시간이라도 자자.

 

5. 정리되지 않은 생각 혹은 부정하고 싶은 질문들

 문학 독서는 예술 감상(놀이)이고, 철학/사회과학 독서는 알고자 하는 노력(공부)인가? 놀이는 가끔은 지겨운 것이고, 공부는 가끔은 즐거운 것인가? 

89-90: 1987. 3. 22.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거름, 1987)을 정독했다. 번역이 좋아서였겠지만, 프랑스어판을 읽었을 때와는 다른 감정, 앎이라는 감정보다는 삶에서의 싸움과 연관된 감정이 더 선명히 살아났다. ... 이 책을 정독하고 확실히 느낀 것은 이 책이 역사적인 것이며, 역사적 문맥에서 혁명이라는 실천을 실현하려 한 지식인의 자기규정이라는 것이다. ...

이 책을 프랑스에서 읽었을 때는 비-선동적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 읽을 때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책읽기 역시 전술적이다. 프랑스에서는 루카치의 주장들이 이미 극복이 된 정황 속에 놓여 있었고 - 그의 과격한 볼셰비키적 태도에 대한 비판은 사회당의 집권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 한국에서는 그것이 이제 심각하게 검토되는 정황 속에 놓여 있다. 그 정황의 차이

95-6: 욕망이 부재의 현존이라는 것의 예를 코제브는 목마름으로 들고 있다. 물 마시고 싶다는 욕망은 물의 부재라는 것이다. 욕망은 공이며 무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내가 추상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사유한다고 믿고 있었을 때, 내 육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저항은 나이가 들수록 강해져 이제는 내가 추상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을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내 육체의 슬픔가 괴로움, 즐거움과 환희를 이해해야 하는 내 사유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내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사유의 보지자이다.

107: 1987. 6. 12.
푸코를 읽다가, 니체를 읽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도덕의 계보](청하, 1982)를 읽었다. 주인/노예의 변증법, 원한 등의 개념은 음미할 만하였다. ... 이삭으로, 김지하에 대한 글을 쓸 때 인용할 수 있을 대목 하나:

내가 이름하여 위대한 원한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위대한 것들은 - 하나의 작품, 하나의 행위 어느 것이든 - 그것이 성취되면 곧 그것을 성취한 자에게 보복을 한다. 위대한 것을 성취함으로써 그는 약해지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행위를 견딜 수 없으며 그는 더 이상 그것을 바라볼 수 없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허용되지 않는 것, 인간의 운명에 있어서 한 매듭이 맺어지는 어떤 것이 성취자의 배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이제부터 그는 그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그는 거의 부숴버린다 - 그것이 바로 위대한 원한이라는 것이다.

165: 1988. 7. 17.
타자의 철학: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

251: 1989. 8. 5.
사회학자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로 읽지 않고 자료로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회학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폄하하는 것 - 뭐랄까, 사회학적 인식이 덜 됐다는 거다. 마치 자기들은 진리를 쥐고 있고 소설가들은 아무리 그것을 가르쳐줘도 모른다는 듯이. 돌대가리들이다 - 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소설가들이 사회학자들에게 구체적 감각이 없으며 소설적 상상력이 없다고 비판한다면 펄쩍 뛰리라. 그러나 진리를 쥐고 있는 사람은 없다. 쥐고 있는 척할 뿐이다. 이름있는 사회학자들의 거의 모든 책은 죽었으나 소설들은 살아 남았다. 기억하라, 진리는 숨어서 드러나지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8. 6.
자만심이 악덕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의 심리적 근거는 자기는 진리를 쥐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 확신이 없는 자만심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일종의 가짜 자만심으로

279: 1989. 11. 24.
...
포스터의 [푸코와 마르크스주의](민맥, 1989)는 주목할 만한 언급들을 많이 하고 있다. 베버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푸코의 유사점과 차이점[29], 역사가의 위치에 대한 성찰[92-95] 등이 특히 그러하다. 나로서는 관료제도와 컴퓨터의 관계를 푸코식으로 언급하는 대목이 흥미있다:

19세기에 원형 감옥이 도입될 때 ... 그래서 원형 감옥식의 시는 대중화된 집단뿐만 아니라 고립된 개인에게까지 확대된다 [120-21]

그런데 중요한 것은 컴퓨터까지도 상이한 계급들에 의해 상이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집단은 이익을 보고, 어떤 집단은 그렇지를 못하다. 컴퓨터가 유토피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137]. 그렇다면 다시 손 움직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나는 다시 푸코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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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메타포로 읽기 - 니체의 텍스트를 '잘'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
최상욱 지음 / 서광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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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한 2-30페이지쯤 읽었을 때 이 책은 해설서 없이 도저히 내가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설적인 책 제목에 끌려 함께 읽었다. 만족한다.

 

이 책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니체 문외한이라면 알 수 없었을 여러 메타포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각종 상징들을 신구약 성경, 그리스 신화, 게르만 신화 등의 에피소드들과 연관시켜 잘 설명하고 있다.

 

둘째, 장들 간의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읽다 보면,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를 연결시키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 책은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

 

셋째, 니체의 다른 저작들과의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제들은 이전의 저작에 등장하기도 하였고, 다음의 저작들에서 다시 다뤄지기도 하는데, 니체의 문외한들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으로 니체 독서를 시작한다면 이 점은 매우 유용하다.

 

넷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여러 부분들에 대한 니체 전공 학자들의 해석이 잘 소개되어 있다. 특히 가스통 바슐라르와 질 들뢰즈의 견해가 인상적이었다.

 

아쉬운 점은 단 하나,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손님들을 한참 동안 공들여 환대하고 작별 인사 없이 문을 닫아버리는 주인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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