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을 넘어선 자본 리라이팅 클래식 2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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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을 넘어선 자본} 맑스가 고전정치경제학자들을 비판했던 방법을 차용하여 저자 이진경이 맑스를 비판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다. 나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번을 읽었다. 내가 어떤 책을 재미있게 보게 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다. (1) 모르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이후의 공부방향을 일러줄 (.. 그렇군), (2) 어렴풋이 생각하던 것을 명료하게 정리해줄 (.. 시대의 훌륭한 두뇌라 있는 이진경도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3) 나의 다른 생각이 설득될 , 혹은 완전 설득되지 않더라도 내가 믿어 의심치 않던 것을 균열시킬 , 균열을 통해 대단한 저자에게 게겨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뭐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단 말인가? 어디 한번 보자...), etc. 책을 보면서 모두를 느꼈다. (1)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2). 책은 예전에 푸코와 폴라니를 읽으면서 맑스의 본원적 축적을 떠올렸을 때나, 아래에서 보겠지만 자본의 구절들을 읽으면서 외부를 생각했을 때를 상기시켜줬다. 그러나 (3). 다른 무엇보다 "기계가 잉여가치를 창출한다고?" 나는 고정자본이 마모분만큼 인간의 죽은 노동을 생산물에 이전시키는 것으로 배웠다. 어디 한번 물고늘어져 보자...

 

2. (2) {자본} 외부

이론은 개념 범주들, 공리들,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하나의 안에 제각각의 위치를 부여하는 논리들을 통해 구성된다. 이론은 자체로 역사적 실제가 아니다. 어떤 이론 속의 개념과 현실 세계 속의 대상 사이에 일대일 대응 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유동적이며 우발성에 가득찬 역사사회적 현실을 도외시하고, 세계가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완결된 형태를 관통하는 논리가 신에 필적하는 천재에 의해 간파됨으로써 진리가 양산된다고 가정하는 순진무구한 생각이다. 이론은 대상의 모든 측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의 중요도를 가늠하여 이론 내부의 계기로 포섭되는 현상과 무시되어 계속 이론 밖에 내버려지는 측면을 선별한다. 이것이 추상의 방법이다. 추상, 취사선택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계기들 간의 연관을 드러내고자 함이며, 바로 연관을 드러내는 것이 이론적 설명이며, 필연성이란 오로지 이론적 설명 내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일 , 세계 내에서 자체로 항상-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상적인 범주나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이 속해 있는 역사적 모태로부터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역사적 특정성을 지닌 어떤 실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구성된 이론은 자신이 자기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의 일부임을 겸허히 인정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정리하면, 이론과 역사는 별개이지만, 하나의 이론은 자신이 다루는 역사적 대상에 의해 범위가 제약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사적 모태에 의해 구속된다.

 

<외부 1>

하나의 역사적 이론이라 있는 {자본}에서 제시된 맑스의 이론적 설명(explanation) 결코 역사적 기술(description)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 1권은 역사적 사실들로 가득 있다. 책은 공장감독관의 보고서에 그려져 있는 영국 공장들의 비참한 현실이나, 소위 본원적 축적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에서 농민들이 어떻게 토지로부터 분리되었는지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맑스가 제시하고 있는 이론의 예증을 위해 쓰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증과 달리 '전제'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식민지 체제와 세계시장의 확장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자신의 이론이 겨냥하고 있음과 동시에 발딛고 서있는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할 있었던 일반적 조건으로서 전제(premise) 도입된다. 전제란 무엇인가? 전제란 이론을 지탱하기 위해 도입되지만, 바로 이론 안에서는 분석되지 않는 것이다. 전제를 보증할 있는 것은 이론 바깥의 역사적 사실성 -  실제로 일어났는가 - 뿐이다. 맑스는 식민지 체제와 세계시장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연한다.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고... 추상적 모형인 이론은 이렇게 사실적 전제를 통해 외부와 자신과의 경계를 표시한다. 

 

<외부 2>

{자본} 이론과 외부가 만나는 하나의 지점은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투쟁 역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노동일의 분할에 관한 설명에서이다. 노동일이 어떻게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분할되는가는 오직 역사적으로만 ( 이론 바깥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두나예프스카야는 바로 지점에서 맑스의 주장의 논리적 연속성이 파열된다고 지적한 있다. 계급 간의 역관계는 맑스가 {자본} 통해 펼치고 있는 연속추론(successive approximation) 외부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3. (3) 갸우뚱: 기계적 포섭? 기계적 잉여가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덕 하나는 저자가 {자본} 이론적 설명을 다른 저작들에서 제시된 역사적 기술과 병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치와 화폐' 다루는 3장에서 저자는 화폐의 발생에 대한 {자본} 이론적 설명, 가치의 표현적 관계가 재현적 관계로 전화하는 과정과 더불어, 폴라니와 베버의 역사적 기술을 통해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가 서로 다른 기원을 갖지만 양자 모두 국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부분에서 저자는 이론과 역사 간의 '대질'이라는 발리바르 비판을 몸소 보여주고 있고, 나는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의 뛰어남에 경탄했다. 방식은 다른 장들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이진경은 {자본} 대해 말하지만, {자본} 도저한 논리에 갇혀있지 않다.

 

방식은 '잉여가치와 계급투쟁' 다루는 5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관한 저자의 주장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그리고 잉여가치를 가능케하는 노동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대한 맑스의 개념화는 '관계적'이다. 상대방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다. 경우 '상대' 없이 '절대' 사고되어질 없으며, '형식' 없이 '실질' 사고되어질 없다. 그러나 맑스가 개념쌍들을 어떻게 구분하던가? 바로 대규모 공업의 출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가능케 기술 혁신이다. 이제 자본가들은 단지 노동자들을 공장에 오래 매어두는 방법 외에도 잉여가치를 증가하는 방법을 알게 것이다. 빨리 돌아가는 기계를 들여온다거나, 노동자가 덜 필요한 기계를 들이거나 하면서, 이전에는 노동자 명이 생산했던 것을 명이 생산하게 만든다. 이진경은 기계적 잉여가치와 노동의 기계적 포섭을 설명하기 위해 맑스가 없었던 이후의 역사적 발전을 소개한다. 자동화와 정보화, 포스트포드주의, 이로 인해 변화된 생활양식, etc. 저자에 따르면, 이제 잉여가치는 고용된 임노동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계가 되어버린 세계 내부의 활동 전반을 통해 생산된다. 포드주의 체제를 통해 획득되었던 맑스의 관계적 개념화들의 일반성은 이제 상실된다. 이진경은 노동의 기계적 포섭이라는 일종의 ultra-실질적 포섭을 상정하면서 맑스의 관계적 개념화를 무시하며, 기계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개념들이 딛고 있는 지반들을 제거해버린다. 여기서 기계란 단순한 메타포가 아닌 같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만이 노동하고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인간학적 관념이 기계와 인간, 기계와 생명의 경계가 점차 소멸하고 있는 현재 세계에서 점차 지지할 없는 허구적 관념임을 드러내" 것이란다 (205). 저자는 진정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점차 소멸하고 있다고, 소멸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어법처럼 소멸점은 "무한히 연기"되긴 하지만 존재하는 경향의 방향으로 존재한다는 것인가? 나는 자연도 노동과 더불어 가치의 생산과 증식에 참여한다는 주장까지는 수긍할 있지만, 죽은 노동이 응고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는 말은 도통 받아들이기 힘들다. 여기서 기계란 무엇인가? 누군가에 의해 생산된 방추가 이제 자기 혼자서 가치를 생산한다고?? 그게 아니라면, 기계란 이미 기계처럼 되어버린 사회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제 가치란 무엇인가? 노동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노동과 활동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난관은 {자본} 이론 내부에서 애초에 쌍으로 개념화된 개념쌍들을 고립적인 개념들로 분리시키고, 여기에 이후의 역사 전개에 따라 3 새로운 개념을 첨가함으로써 야기된 난관이다. 관계가 제거된 개념들 간의 병렬로 바꿔 놓는 것이다. 다른 장들에서 제시된 역사적 기술들이 대체로 맑스의 문제설정에 충실하면서 {자본} 이론적 설명들을 훌륭하게 보충하는 반면, 5장은 자본의 이론적 설명을 폐기처분한다. 그래.. 그럴 있다... 19세기 중후반 저작인 자본과 21세기 벽두의 우리의 거리는 한참 멀다. 그런데 그럴 바에야, 이진경이 차라리 맑스와 각을 제대로 세우고, 이제 이런 세상에 맑스의 가치론은 박물관으로 들어가라고 좀더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낫지 않았을까? .. '뭐뭐하지 않을까?'라는 표현 책에 많이 나온다. 읽을 때마다 눈에 걸렸는데, 나도 그렇게 썼다. 그냥.. 까놓고 말하자. '낫지 않았을까?' 아니라 '낫다'라고... 그래야 맑스던 이진경이던 제대로 평가할 있을 것이다. 

 

4.

아무리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읽고 있는 책에서 인용한 책까지 옆에다 놓고 줄쳐가면서 읽는다고 해도, 읽는 사람의 성의란 쓰는 사람의 성의에 비할 없다. 책은 결코 녹록한 입문서가 아니다. 저자만큼의 多讀을 독자들에게 기대하기란 무리이겠지만, 책에 대해 말할 있으려면 {자본} 읽고 어느 정도까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자본} 통달했다고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 모르겠다. 아마 통달의 순간이란 내게 무한히 연기되는 어떠한 상상의 지점일 지도 - 책을 읽고 {자본} 내용들을 다시 곱씹어 있었다. 그리고 아마 다시 {자본} 읽게 되는 어떤 , 로스돌스키와 함께 이진경의 책을 옆에 두고 다시 읽을 같다. 책을 읽으신 독자들... 저자 이진경 선생의 관점이 꼬우면.. {자본} 도전하시라..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읽으면 1 남짓이면 3권까지 일단은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이 책을 읽고 하고 싶은 말보다 많은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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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e 2006-08-0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자연도 노동과 더불어 가치의 생산과 증식에 참여한다는 주장까지는 수긍"이라는 말에서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진경처럼 '사용가치'와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치를 '생산에의 기여'와 동일시하고 있는 듯한데, 노동가치론은 사회적 총노동의 분배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 그리고 자본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지 어느 생산요소가 생산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측정하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서인 '자본의 두 얼굴'을 추천합니다. 함부로 님을 비웃은 것에 대해서 용서를 빕니다. 다만 맑스의 희화화에 탁월한 재능을 선보이고 있는 이진경을 추켜세워주는 것이 너무 웃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