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아직 읽는 중. 그러니까 preview도 review도 아닌 on-view(?), 讀中感이다. 


그냥 비공개로 밑줄긋기하며 읽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짧은 메모를 남긴다. 


"몬다스의 시민"(1973)이라는 짧은 글 맨 마지막(p. 30)에 <빼앗긴 자들>을 탈고한 상태지만 아직 출판 전의 기대와 걱정이 교차되는 순간을 적은 부분이 있다. 르 귄이 1929년생이니 40대 중반였겠다.


1960년대 말, 르 귄은 <어스시의 마법사>로 대표되는 순수 환타지의 정맥(vein)을 <어둠의 왼손>으로 대표되는 SF의 정맥과 마침내 분리해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은 언제나 내부와 외부의 한계들 모두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전자가 the Inner Lands, 후자가 Outer Space인 셈이다. 


헤인 시리즈에 관한 SF 글쓰기는 바로 그녀 자신이 그 이후로도 계속 넓혀간 Outer Space 이야기가 된다. Inner Lands 이야기인 어스시 이야기는 오지랖질 방지를 위해 헤인시리즈 다 볼 때까지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도주로"(Escape Routes)는 1974-75년에 쓰여졌다. The Dispossesed에서 언급되었던 비유와 표현들이 눈에 띈다. 89쪽에는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a very dafty house)"이,  마지막 장(한글판 90쪽)에는 SF가 "과업을 완수할 것(it will fulfill its promise)"이라는 표현도 있다.


"아이와 그림자"(1974)에서 르 귄은 융의 이론을 본인의 판타지 이론의 기초로 삼는다. 왜 이 책의 제목이 "밤의 언어"인지 유추할 수 있는 "낮의 언어(the language of daylight)", "낮시간의 윤리(daylight ethics)"라는 말이 간간이 나온다(118, 130). 이 낮의 언어와 대비되는 것이 밤의 언어일텐데, 그것은 그림자, 곧 "내면의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고, 그 언어가 바로 판타지인 것이다(135).

예술이란 이렇게 끊임없이 바깥 경계를 갈구하는 행위다. 원하는 것을 찾아내면 온전하고 탄탄하고 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한다. 그에 이르지 못하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 책들은 당연하게도 불완전했다. 특히 <환영의 도시>가 그랬는데, 애초에 지금 모습으로 출판해서는 안 되는 책이었다. 좋은 부분도 제법 있지만 절반쯤밖에 제대로 숙고하지 않은 작품이다. 당시 나는 자만하며 서두르고 있었다. - P27

1967년에서 1968년에 걸쳐, 나는 <어스시의 마법사>와 <어둠의 왼손>을 통해 내 순수한 판타지의 흐름을 SF의 흐름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런 분리는 기법과 내용 양쪽에서 상당히 큰 발전의 증거가 되었다. 이후 나는 오른손과 왼손을 골고루 사용해서 집필해 왔으며, 계속해서 나 자신과 장르라는 매질의 한계를 밀어붙이려 시도했다. Since then I have gone on writing, as it were, with both the left and the right hands; and it has been a matter of keeping on pushing out toward the limits - my own, and those of medium. (아직 출간되지 않은) 최신작 <빼앗긴 자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시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책을 찢어발기는 소리와 실망의 외침이 들려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 뿐이다. - P30

도가 철학의 세계는 혼돈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구성된 세계지만, 그 질서를 구성하는 법칙은 인류나 특정 개인이나 인격신이 강제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도덕적 법칙, 심미적 법칙, 그리고 당연하게도 과학의 법칙은 권위자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속에 깃들어 있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
이런 반이데올로기적이며 pragmatic한 기법은 인물뿐 아니라 장소에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의식적으로 어시스를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 나는 공학자가 아니라 탐험가다. 어스시는 발견한 것이다.
제대로 세운 계획은 모든 요소를 포괄해야 한다. 반면 발견이란 한 걸음씩 전진하는 것이다. 발견이란 시간의 경과가 필요한 과정이다.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 P36

판타지란 여행이다.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머릿속 무의식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정신분석학처럼 위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반드시 정신분석학처럼 당신을 바꾸고 만다. - P74

많은 독자와 평론가들, 그리고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문체가 작품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인 것처럼 말한다. ... 그러나 당연한 소리지만, 문체야말로 곧 작품이다. 케이크를 제거하면 남는 것은 쪽지에 적은 조리법뿐이다. 문체를 제거하면 개요와 줄거리밖에 남지 않는다.
역사에서는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소설에서는 대부분 진실이다. 판타지에서는 절대적인 진실이다.

... The style, of course, is the book. If you remove the cake, all you have left is a recipe. If you remove the style, all you have left is a synopsis of the plot.
This is partly true of history; largely true of fiction; and absolutely true of fantasy. - P75

... 문체는 곧 작가다. ... 문체가 없으면 아예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문체란 당신이 작가로서 대상을 관찰하고 그 대상에 관해 말하는 방식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당신의 눈, 당신이 생각하는 세상, 당신의 목소리다. - P75

... 나는 독자 또한 비슷한 의무(responsibility: 책임!!!!!)를 진다고 믿는다. 우리가 읽는 작품을 사랑한다면 독자도 마땅히 의무(duty)를 감당해야 한다. 그 의무란 바로 속아넘어가지 않을 의무다. 신화의 성역을 상업적으로 착취하지 못하도록 거부해야 한다. 조잡한 작품을 거부하고, 제대로 된 작품을 기다리며 갈채를 아껴야 한다. 진짜 판타지보다 더 진짜인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Because when fantasy is the real thing, nothing, after all, is realer). - P77

나는 SF가 문학에 건네는 가장 큰 선물이 열린 우주를 마주하는 포용력이라 생각한다. SF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도 닫아버리지 않는다. ... 그 열린 우주는 단순히 고정된 계층 구조가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방대하고 복잡한 사건이 발생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인간이 탄생하기 전의 과거로부터 놀라운 현재를 거쳐 처참하거나 희망찬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이 열려 있다. 모든 연결이 가능하다. 모든 대안이 가능하다. 편안하고 안심되는 공간이 아니다. 아주 거대하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a very dafty house)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집은 바로 그런 곳이다.
그리고 SF는 그 거대하고 외풍이 숭술 들어오는 집에 거주할 수 있는, 그곳을 거처로 삼을 수 있는, 지하실에서 다락방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놀이를 즐길 수 있는, 현대적인 문학예술의 형태로 보인다. - P89

만약 SF가 쓰레기가 아니라, 도피주의가 아니라, 지적이고 심미적이고 윤리적 책임을 지는 위대한 예술 형식으로 취급받는다면, SF는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마땅히 과업을 완수할 것이다(it will fulfill its promise). 미래를 향한 문이 열릴 것이다(The door to the future will be open). - P90

나는 나보다 나중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톨킨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을 질투한다. 그 질투 대상에는 내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저항이 최소한에 그치는 어린 시절에 그 책을 접하게 하는 일에는 당연하지만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열 살이나 열세 살일 때 엔트나 로스로리엔의 존재를 알 수 있다니, 얼마나 운이 좋은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서 환상을 다루는 소설을 쓰는 일은 상당히 드물며, 나는 질투심을 품으면서도 내가 25세 이전에 톨킨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 읽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내심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감당할 수 있었을지 도저히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93

성차별주의자(sexist)로 몰리지 않기를 빌면서 감히 말해 보자면, 우리 문화권에서 이런 반소설주의는 기본적으로 남성의 태도다. 미국의 소년과 성인 남성은 종종 우리 문화권에서 ‘여성적‘ 또는 ‘유아적‘이라 간주하는 특정 성향, 특정 재능과 가능성을 배척함으로서 남성성을 드러내 보일 것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런 성향 또는 가능성 중에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인 상상력이 포함되어 있다. - P102

나는 성숙이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성장해서 도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죽고 어른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살아남아 어른이 되는 것이다.
I believe that maturity is not an outgrowing, but a growing up that an adult is not a dead child, but a child who survived.
나는 어린이의 내면에 성숙한 인간에게 필요한 최고의 잠재력이 전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어린 시절부터 북돋워 주면 성인이 된 후의 인격도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고 뒤틀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잠재력 중 가장 인간적이고 인도적인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도서관 사서로서, 교사로서, 부모로서, 작가로서, 또는 단순히 성인으로서, 이런 능력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푸른 월계수처럼 번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 P109

위대한 판타지 문학이나 전설이나 민담은 사실 꿈과 유사하다. 이들은 무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의 ‘언어‘인 상징과 원형을 이용해서 말을 건다. 말을 사용하지만 작동하는 방식은 음악과 유사하다. 언어의 논리 회로를 끊어 버리고 말로 옮기기에는 너무 깊숙이 숨은 생각 쪽으로 일직선으로 달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성의 언어로 온전히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걸 이유로 들어 이런 이야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논리 실증주의자뿐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 속에는 생생한 의미가 가득하며, 도덕이나 통찰력이나 성장 등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 - P118

융(Carl Gustav Jung)은 우리가 보통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자아ego‘를 보다 큰 ‘자기self‘의 일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부분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처럼, ‘자아‘는 ‘자기‘ 주변을 맴돈다"고 말했다. ‘자기‘는 ‘자아‘보다 훨씬 거대한 초월적인 개념이다.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집합적인 개념이다. 나머지 모든 인류와, 어쩌면 다른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것이다. 어쩌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로의 연결 고리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신비주의적으로 들리고, 사실 그렇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밀하고 실용적(exact and practical)이기도 하다. 융은 그저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육신 내부에 보편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폐와 골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정신의 내면과 그 구성 방식에도 동일한 보편적 경향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큰 틀에서 보면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 - P119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의식적인 삶에서 체현되지 않은 그림자일수록 보다 어둡고 묵직하게 마련이다‘(융). 다른 말로 하자면 눈을 돌릴수록 그림자는 강해지며, 마침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영혼 속에 내재한 위협이 된다는 말이다.
의식으로부터 부정당한 그림자는 외부를 향해, 타인을 향해 표출된다. 문제가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저들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괴물은 다른 사람들이다. 모든 외국인은 사악하다. 모든 공산주의자는 사악하다. 모든 자본가는 사악하다. 고양이가 못된 짓을 해서 발로 찬 거라고요, 엄마.
현실 세계를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아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자기 내면에도 혐오스럽고 사악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그림자를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세계에 진정한 도움을 주는 셈이다‘(융). - P122

다른 인간, 또는 특정 부류의 인간과 자신의 연관성을 완벽하게 부정하면, 그들이 자신과 근본적을로 다르다고 선언하면 - 남성이 여성에게,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게,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했던 그런 행동을 벌이면, 그 타자는 증오의 대상이 될 수도, 신과 같은 경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결국에는 정신적인 동등성을,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현실을 무시할 뿐이다. 타자를 권력관계 외에는 다른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는 사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You have made it into a thing, to which the only possible relationship is a power relationship).. 이런 행동은 결국 자신의 현실을 치명적으로 궁핍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은 자신을 타자화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You have, in fact, alienated yourself). - P140

우리는 즐기기 위해 이곳에 모였으며, 그 말은 곧 우리가 가장 인간적인 과업인 즐거움을 찾는다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햄스터조차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쾌락의 추구가 아닌, 즐거움의 추구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곳에서 즐거움을 찾기를 바랍니다.

We‘re here to enjoy ourselves, which means we are practicing the most essentially human of all undertakings, the search for joy. Not the pursuit of pleasure - any hamster can do that - but search for joy. - P145

저는 여기 모여든 신실한 분들께 벽이 무너졌다고 선언하러 이곳에 온 것입니다. 벽은 무너졌고, 우리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거 아시나요? 바깥에는 냉혹한 세상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저와 같거나 그 윗세대의, 벽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게토 상태를 부여잡고 SF를 종교로 만들어 입문 의식을 치르지 않은 사람들을 불경하다고 몰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저는 솔직히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 핍박받은 집단이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덕목으로 삼는 것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차별과 경멸이 멈춘 후에도 회피와 방어에 매달리면, 한때의 반항아는 결국 불구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SF가 반항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 저는 SF가 무너져 내린 낡은 벽의 잔해를 넘어서 곧장 다음 벽으로 돌진해 다시 무너트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 P149

진정한 미스테리는 이성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 가짜는 파괴된다. 그대로 직시하기만 하면 사라져 버린다. 금발 영웅을 바라보면, 진심으로 마주하면, 그는 햄스터로 변해 버린다. 그러나 아폴론을 직시하면 그는 당신을 되쏘아본다.
시인 릴케는 50여 년 전에 아폴론 상을 바라보았고, 아폴론은 그에게 말했다.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 진정한 신화는 항상 같은 말을 한다.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어쨌든 예술의 길이란 감정이나 감각이나 육체 등과 결별하고 순구한 의미라는 공백으로 항해를 떠나는 것도, 정신의 눈을 감고 비이성적이며 도덕을 초월한 무의미 속에서 뒹구는 것도 아니다. 예술의 길이란 이런 양쪽 극단 사이에서 미약하고 힘겹지만 반드시 필요한 연결의 끈을 놓지 않는 일이다. 연결하는 일이다. 개념에 가치를 연결시키고, 감각에 직관을 연결시키고, 대뇌피질과 소뇌를 연결시키는 일이다.
진정한 신화는 바로 이런 연결고리 중 하나가 된다. - P186

[융Jung은] ‘고립된 ‘이드id‘뿐 아니라 ‘집단 무의식 collective unconscious‘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리고 의식이라는 환히 밝혀졌지만 비좁은 영역 밖에 존재하는 정신/육체 mind/body의 영역이 우리 모두에서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는 의식이나 이성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융이 ‘분화 differentiation‘라 부른 개인의식의 구축은 그가 보기에는 훌륭한 위업이자 문명의 가장 큰 업적이며, 우리 미래의 희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무가 크게 솟으려면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신화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연결하는 과정에서만 탄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꽂이나 텔레비전에서 살아 있는 원형을 찾을 수는 없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 공통의 마음속 어둠에 도사린, 개인성의 핵심에서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면, 그리고 커튼을 젖히고 어둠 속을 응시하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을 것 - P188

울프 여사가 말했듯이, "브라운 부인은 영원하다. 브라운 부인은 인간의 본성이다. 브라운 부인은 겉모습만 바꿀 뿐이고, 소설가들은 같은 객실을 들락거릴 뿐이다. 그녀는 그대로 그곳에 앉아 있다."
그녀는 그대로 그곳에 앉아 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SF 작가들도 그녀의 맞은편에 앉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우리도 브라운 부인을 만날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면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반짝이는 거대한 우주선 안에, 리치몬드-워털루 왕복 기차편보다도 광속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는 멸균 처리된 우주선 안에 영원히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 P198

내가 아는 것은 우리가 이곳에 있으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주변에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객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우리는 주체이며, 우리의 일부이면서 우리를 객체로 간주하는 살마은 비인도적이며 그릇된,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있으면 자연이라는 위대하고 궁극적인 객체는, 지치지 않고 무수한 태양을 타오르게 만드는 힘도, 은하계와 행성을 회전시키는 능력도, 그 안의 그 안의 바위와 바다와 물고기와 양치식물과 침엽수와 작은 털북숭이 동물조차도, 전부 주체가 된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 또한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의식이다. 우리의 시선이 사라지면 세계는 시각을 잃는다. 우리가 말하고 듣기를 멈추면 세계는 귀가 먹고 벙어리가 된다. 우리가 생각을 멈추면 모든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 P226

우리는 개인으로서, 독립된 정신으로서 삶을 영위한다. 하나의 사람, 유일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가능한 최고 수준은 공동체 정도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공동체란 접촉을 의미한다. 당신의 손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만지고, 함께 작업을 수행하고, 함께 썰매를 끌고, 함께 춤을 추고, 함께 아이를 품는 행위가 공동체를 정의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몸과 두 개의 손밖에 가질 수 없다. 원을 형성할 수는 있지만 직접 원이 될 수는 없다. 원이라는 진정한 공동체는 개별적인 육체와 개별적인 정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만들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객체화되고 정량화된 인간들로 구성되는 공동체는 진정한 사회의, 진정한 공동체의 기계적이고 비정한 모조품일 뿐이다. 사회계급, 민족국가, 군대, 기업, 세력 집단이 된다. 그쪽 방향에는 더 이상의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말에 이르기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희망은 브라운 부인뿐이다. - P227

SF는 상상력이라는 의식을 확장시키는 훌륭한 도구를 이용해, 광막한 암흑을 등지고 서 있는, 아주 연약하고 영웅적인 브라운 부인의 모습이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 P232

"... 우리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갈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세계의 절반은 항상 어둠에 잠겨 있다. 그리고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Ursula K. Le Guin, "Fantasy, Like Poetry, Speaks the Language of the Night" published in _World_(Nov. 21, 1976)].

그녀의 지적에 따르면, 우리의 꿈은 언어가 아닌 심상(nonverbal images)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런 꿈을 의식의 정신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상징(word-symbols)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다. - P361

이 글["A Response to the Le Guin Issue"(1976)]의, 그리고 『밤의 언어』의 중심 단어는, 바로 ‘번역‘이다. 평론가로서 르 귄은 직관적인 과정을 지적인 용어로 해석하려 시도한다. 꿈을 단어-상징으로 번역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 P368

판타지와 SF는 르 귄에게 거리를 두는 기법을, 인간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상황을 새로운 관점으로 살펴보는 방법을 제공했다. 이런 거리두기 기법은 분명 판타지와 SF를 내면의 여정이라는 직관적 과정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서 인류 전체가 공유하며 의미가 있는 패턴과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다. (르 귄의 소설이 장편과 단편을 막론하고, 『로캐넌의 세계』에서 『어둠의 왼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빼앗긴 자들』에 이르기까지, 물리적인 여정(physical journey)의 구조를 가진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여정 중 많은 수는 원형 또는 나선형 구조를 가지며, 걸국 자아성찰(self-knowledge)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한다)

다른 주요 개념은 ... 바로 온전하고 통합된 인간을 형성하려면 판타지가 제공하는 내면의 탐구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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