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동문선 문예신서 199
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동문선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드디어 다 읽었다.

책 전제가 아니라, 이 책의 9장 <상황적 지식들>만.
읽는 데에도 정리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뭐? 어떡해? 
해러웨이 읽는 데 이 정도 노력은 해줘야지.
번역은 엉망인데, 원문과 대조하면서 봤다.
아래 밑줄긋기는 일부는 고쳤고, 일부는 답이 없어 그냥 놔뒀다. 



‘자연’ 의 재현 불가능성, 역사적 우연성, 가공성(artefactuality), 그러나 자발성, 필요성, 허약성, 그리고 놀라운 풍요성 등을 언어학적 용어로 묘사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개인들일 수 있는지를 재형상화하도록 도울수 있다. 이 개인들은 더 이상 주인 주체(master subjects)가 아니며(그런 적이 있다 하더 라도), 소외된 주체(alienated subjects)도 아니다. 다만 복수적으로 이질적이며, 비동질적이고, 설명 가능(accountable)하며, 서로 연결된 인간 행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다시는 전체에 대한 부분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되며, 낙인찍히지 않은 존재들 속에 통합된 낙인찍힌 존재로서 연결되어도 안 되며, 일신론과 그 세속적 이단들의 유일한 주체(Subject)에 경배하는 단일적 · 보완적 주체들(subjects)로서 연결되어도 안 된다. 우리는 방어된 주체들 없이 매개 행위, 혹은 매개 행위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 - P17

모든 신경증처럼 나의 신경증도 은유의 문제에 뿌리박고 있으며, 몸과 언어의 관계의 문제에 뿌리박고 있다. 예를 들어 완전히 텍스트화되고 코드화된 세계 속에서의 움직임들에 대한 힘의 장(場) 이미저리는, 포스트모던 주체를 위해 사회적으로 타협된 실재에 대한 여러 주장들의 모체이다. 이 코드로서의-세계는, 초보자들에게는 하이데크의 군사적 장, 즉 일종의 자동화된 학술적 전쟁터이며, 여기에서 경기자라고 불리는 광점들이 지식과 권력 게임 속에 남아 있기 위해 서로를 분해시킨다.(대단한 은유이다!) 기술 과학과 과학소설은 그들의 빛나는 (비)현실의 태양, 즉 전쟁 속으로 붕괴되어 들어간다. - P332

인본주의적 마르크시즘은 인간의 자기- 구성 논리에 있는 자연 지배라는 구조적인 존재론적 이론으로 인해, 그리고 임금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여성들이 행한 어떤 것도 역사화할 수 없는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무능으로 인해 근원부터 오염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은 객관적 시각에 대한 우리만의 학설을 추구한 인식론이라는 페미니즘적인 정선적 건전함의 형태로 여전히 유망한 자원으로 남아 있었다. 마르크시즘의 출발점은 입장 이론, 고집 센 체현, 실증주의 및 상대주의의 권위를 박탈하지 않은 채 헤게모니를 비판하는 풍부한 전통, 중재에 대한미묘한 차이들을 갖고있는 여러 이론들 등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구를 제공해 주었다. 정선 분석의 몇몇 해석들도 이런 접근방법을 무한하게 도와주었는데,특히 영어 사용권의 대상 관계 이론은 한동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펜으로 씌어진 어떤 것보다 미국의 사회주의적-페미니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나,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주체를 다루는 알튀세르나 최근 - P334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초월을 약속하는 객관성의 학설, 즉 누군가에게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그런 중재를 추적할 수 없는 설화는 필요 없으며, 무제한의 도구 권력도 필요 없다. 우리는 언어와 몸들이 모두 유기적 공생의 축복으로 타락하는 그런 세계를 재현할 순진한 권력들에 대한 이론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글로벌 시스템(Global Systems)의 견지에서 세계 속에서 행동하기는커녕 세계를 이론화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매우 다른 그리고 권력―차별화된-공동체들 사이에서 지식들을 부분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는, 지구 전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우리는 의미와 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가진 의미와 몸 속에 살기 위해, 의미와 몸이 만들어지는 방법에 대한 근대적인 비판적 이론들의 권력이 필요하다. - P336

나는 모든 시력(vision)의 체현적(embodied) 성질을 주장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모든 낙인찍힌 몸에서 무소(nowhere)로부터 바라보는 정복적인 시선으로의 도약을 의미화하는 데 사용되어 온 감각 체계를 재주장하기를 원한다. 무소로부터의 정복적인 시선은 모든 낙인찍힌 몸들을 신화적으로 기록하는 시선이며, 낙인찍히지 않은 범주로 하여금 재현을 피하는동시에 재현하기 위해 보는 권력과 보임을 당하지 않는 권력을주장하도록 만든다. 이런 시선은 남자와 백인의 낙인찍히지 않은 위치들을 의미화하고 과학적이며 기술적이고, 후기 산업적이며 군사화된, 인종차별주의적인 남성 지배적 사회, 즉 여기 1980년대말 미국, 괴물의 뱃속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귀에 들리는 객관성이라는 세계의 여러 비열한 어조들 중의 하나를 의미화한다. 나는 역설적이고 비판적인 페미니즘 과학 프로젝트를 수용하는 체현직 객관성이라는 학설을 원한다: 페미니즘 객관성은 매우 단순하게 상황적 지식을 의미한다. - P338

눈은 족쇄 풀린 권력을 위하여 인식 주체를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왜곡된 능력一군사주의 · 자본주의 · 식민주의 · 남성 우월 등과 결합된, 과학사 속에서 완전할 때까지 숫돌에 갈아진 능력一을 의미화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다국적의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시각화의 도구들은 체현-해체(dis-embodiment)의 이런 의미들을 합성하였다. 시각화의 기술에는 명확한 한계가 없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영장류들의 눈은 ... 다목적의 카메라들 등에 의해 끝없이 강화될 수 있다. 이런 과학 기술적 업적 속에서 시력은 규제되지 않는 폭식이 된다. 모든 시각은 무한히 이동하는 시력에 자리를 양보하고, 이동하는 시력은 무소로부터 모든 것을 보는 신 같은 속임수의 것(the god-trick of seeing everything from nowhere)으로 더 이상 신비하게 보이지 않으며, 그 신화를 평범한 실천으로 만들어 버렸다. - P339

물론 무한한 시력이라는 관점은 환상이며, 신을 흉내내는 속임수이다. 나는 모든 시력의 특별성과 체현(반드시 유기적인 체현일 필요는 없으며, 기술적 중재를 포함하는 체현)에 대해 은유적으로 주장하고, 시력을 체현―해체와 제2의 탄생으로 가는 길로 간주하는 유혹적인 신화들에 글복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우리들로 하여금 유용하지만 순진하지 않은 객관성의 학설을 구성하도록 허용하는지 제안하려고 한다. 나는 은유적으로 시력을 또다시 강조하는 몸에 대한 페미니즘 글쓰기를 원한다(I want a feminist writing of the body that metaphorically emphasizes vision again). 왜냐하면 우리는 객관성 논쟁을 변형시킨 근대 과학과 기술의 모든 시각화의 속임수와 권력들을 통해 우리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그 감각을 재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 P340

그 결과 그다지 왜곡되지 않게, 객관성이 특별하고 특수한 체현에 관한 것이지 모든 제한과 책임의 초월을 약속하는 거짓 시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판명된다. 이 교훈은 단순하다: 오직 부분적인 시각만이 객관적 시력을 약속한다(The moral is simple: only partial perspective promises objective vision). 이것은 모든 시각적 실천의 발생성에 대한 책임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기보다 종결시키는 객관적 시력이다. 부분적 시각은 유망한 괴물과 파괴적 괴물 모두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객관성에 대한 모든 서양의 문화적 서사는 페미니즘 속의 과학 문제에 새겨져 있는 소위 정신과 몸, 거리와 책임의 관계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알레고리이다. 페미니즘의 객관성은 주체와 대상의 초월 및 분열(splitting)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위치 및 상황적 지식에 관한 것이다. - P341

이 장(章)은 상황직 지식과 체현직 지식을 주장하며, 소재 파악이 불가능한, 그래서 무책임한, 다양한 형태의 지식 소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무책임하다는 것은 설명하도록 요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주변과 심연으로부터 보는 능력을 확립하는 데에는 프리미엄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덜 강한 자들의 위치로부터 볼 것을 주장하는 반면, 그들의 시력을 낭만화하고/하거나 전유하는 심각한 위험이 놓여 있다. 아래로부터 보는 것은, ‘우리‘가‘자연스럽게‘ 종속된 지식이라는 거대한 지하 영역에 거주한다 하더라도 쉽게 학습되는 것이 아니며,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종속된 자들의 자리매김은 비판적인 재-조사 · 코드 해독 · 해체 · 해석 등에서 면제되지 않으며, 즉 기호학적 · 해석학적 모드의 비판적 의문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종속된 자의 입장은 ‘순진한’ 위치가 아니다. 반대로 그들은 원칙상 모든 지식의 비판적 · 해석적 핵심에 대해 부인하도록 허용될 가능성이 가장 적기 때문에 선호된다 - P342

종속된 자들은 신을 흉내내는 속임수와 그 모든 현란한-그러므로 눈을 멀게 하는-조명들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갖고 있다. ‘종속된’ 입장은 선호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계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지속적이며, 객관적이고 변형시키는 설명을 약속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로부터 보는 방법은, 적어도 ‘최고의’ 기술적_과학적 시각화만큼 몸과 언어, 시력의 중재를 다루는 상당한 솜씨를 요구한다.
그런 선호된 자리매김은, 과학적 권위를 주장하는 가장 명확하게 총체화하는 해석들에게 적대적인 만큼 다양한 형태의 상대주의에도 적대적이다. 그러나 체계적인 편협화와 불투명화에 의존하는 권력을 갖고 있는 언제나 최종적으로 낙인찍히지 않은 범주인 총체화와 단일 시력이 상대주의의 대안은 아니다. 상대주의의 대안은 정치에서는 결속이라고 불리고, 인식론에서는 공유된 대화라고 불리는 그물망 같은 연결 관계들의 가능성을 유지하는 부분적이고 소재 파악이 가능한 비판적인 지식이다. - P343

상대주의는 동등하게 모든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어디에도 없는 방법이다. 상대주의는 객관성의 이데올로기들 속에 있는 총체화의 완전한 거울 쌍둥이이다. 이 둘은 모두 위치, 체현, 부분적 시각 속에 있는 이해 관계를 부인한다. 이 둘은 모두 잘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대주의와 총체화는 둘다 사방에서, 그리고 무소에서 동등하게 완전하게 볼 것을 약속하는 ‘신을 흉내내는 속임수‘이며, 과학을 둘러싼 수사학 속에 있는 공통된 신화들이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의문의 가능성이 그대로 남는 곳이 바로 부분적 시각의 정치이며 인식론이다. - P343

우리는 즉각 우리 자신들에게 현존하지 않는다. 자기-지식은 의미와 몸을 연결시키는 기호학적-물질적 기술을 요구한다. 자기-정체성은 나쁜 시각 체계이다. 융합은 자리매김의 나쁜 전략이다. 인문과학의 남자들은 자기-현존에 대한 이런 의문을 의지와 의식을 가진 단 하나의 명령점인 ‘주체의 죽음’ 이라고 불렀다. 그런 판단은 나에게 이상해 보인다. 나는 이런 발생적 의문에 대해 이종 동형이 아닌 주체들, 행위자들, 그리고 외눈거인인 주인 주체의 자기 포만적 눈이라는유리한 지점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설화들의 영역들 등등의 열림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서양의 눈은 근본적으로 방황하는 눈, 여행하는 렌즈였다. 이런 이주들은 자주 폭력적이었고, 정복적 자아를 비출 거울들을 고집하였다. - P345

주체성의 지형학은 다차원적이다; 그러므로 시력도 그러하다. 인식 주체는 갖가지로 위장하고 있는 모든 위장 속에서 부분적이며, 결코 완성되어 있거나, 전체이거나,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거나, 기원적이지 않댜 그것은 언제나 불완전하게 구성되고 꿰매지며, 그러므로 다른 것과 결합할 수 있고, 또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없이 함께 볼 수 있다. 여기에 객관성의 약속이 있다: 과학적 인식주체는 정체성의 주체 위치가 아닌 객관성의 주체 위치를 추구한다. 즉 부분적 연결 관계를 추구한다. 젠더 · 인종 · 민족 · 계층에 의해 구조화된 모든 특권적(종속된) 위치에 동시에 ‘촌재할 방법은 없다. 혹은 이 특권을 가진 어느 위치에서도 전체로 존재할 방법도 없다. 그리고 젠더 · 인종 · 민족 · 계층은 비판적 위치에 대한 짧은 목록이댜 그런 ‘완전하고‘ 총체적인 위치를 찾는 것은, 본질화된 제3세계 여성으로서 페미니즘 이론에 이따금 등장하는 대립적 역사의 물신화된 완전한 주체를 찾는 것이다. - P346

객관성이 실천되고 존경될 가능성이 없는 유일한 위치는 주인, 인간(Man), 유일신(One God)의 입장으로, 이들의 눈은 모든 차이를 생산하고 전용하고 명령한다. 어느 누구도 객관성 때문에 일신론의 신을 비난한 적이 없었으며, 단지 무관심 때문에 비난하였다. 신을 흉내내는 속임수는 자기-동일적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창조성과 지식, 그리고 전능으로 오인해 왔다.
그러므로 자리매김은 서양의 과학적 · 철학적 담론이 그런 것처럼, 시각의 이미저리를 둘러싸고 조직된 지식을 수립하는 주요 실천이다. 자리매김은 우리의 권능부여적 실천에 대한 책임을 함축한다. 그 결과 정치와 윤리가 무엇이 합리적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쟁하기 위해 투쟁을 도모한다. - P347

국지적 지식들은, 지식과 권력의 그물망 내에서 불평등한 번역과 교환들 물질적이고 기호적인 을 강요하는 생산적 구조화와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 고물망들은 체계성의 속성을 가질 수 있으며, 시간 · 공간 · 의식 이라는 세계사의 차원들 속으로 깊은 화사들(filaments)과 고집 센 덩글손을 뻗고 었는 종앙 집중적으로 구조화된 글로벌 시스템들의 속성조차 가질 수 있다. 페미니즘의 설명 가능성은 이분법이 아닌 반향에 맞춰진 지식을 요구한다. 젠더는 구조화된, 구조화하는 자이의 장으로, 여기에서는 극단적인 지역화의 여러 어조들, 즉 친근하게 개인적이고 개체화된 몸의 여러 어조들이 세계적인 높은 긴장의 방출과 함께 동일한 장에서 진동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체현은 여성이든 아니든 구체화된 몸속의 고정된 장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장들 속에 있는 혹들, 정위 (定位, orientations) 속의 굴절들, 물질적―기호학적 의미의 장 속에 였는 차이의 책임 등에 관한 것이다. - P348

우리는 남근로고스 중심주의(phallogocentrism, 하나의 진실된 말의 현존에 대한 향수)와 체현-해체된 시력의 지배를 받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시력과 제한된 목소리에 의해 지배되는 지식을 추구한다. 우리는 부분성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황적 지식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연결 관계들과 예기치 못한 기회들을 위해 부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보다 큰 시력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어느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에서의 과학 문제는 자리매김된 합리성으로서의 객관성에 관한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한계로부터의 도피나 한계 초월의 산물, 즉 위로부터의 관점의 산물이 아니라 부분적 관점들과 머뭇거리는 목소리들을 집합적인 주체 위치로 결속시키는 것이다. 이 집합적 주체 위치는 진행되는 유한한 체현 수단의 시각, 한계와 모순 내에서의 삶의 시각, 즉 어떤 곳으로부터의 관점의 시각을 약속한다. - P352

자연은 전유되고, 보존되며, 노예가 되고, 고양된 문화의 원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식민주의의 논리 속에서 문화에 의해 처리되도록 유연해진 문화의 원료일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성은 젠더 행위에게 물질일 뿐이다. 생산주의적 논리는 서양의 이원론의 전통에서 불가피해 보인다. 이런 분석적 · 역사적 서사 논리는, 페미니즘 이론의 최근의 역사에서 성/젠더 구별에 대한 나의 예민함에 대해 해명한다. 성은 젠더로 재-표현되기 위해 ‘자원회‘되며, ‘우리‘는 이것을 통제할 수 있다. 자연/문화의 이원론과, 성/젠더 구별을 포함하는 그 발생적 계보 속에 확립된 전유주의적(appropriationist) 지배 논리의 함정을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 P355

상황적 지식은 지식대상이 가리개도, 근거도, 자원도 아닌 행동가(actor)와 행위자(agent)로 묘사될 것을 요구하며, ‘객관적‘ 지식이라는 유일한 매개행위와 저술행위 속에서 변증법을 종결시키는, 주인에게 딸린 노예로 최종적으로 묘사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요구한다. 이 점은 연구대상인 사람들의 매개 행위 자체가 사회 이론 생산이라는 전체 프로젝트를 변형시키는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 방법에서 패러다임상으로 분명하다. 진실로 연구 ‘대상들‘의 매개 행위와 타협하는 일은, 이런 학문들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엄청난 오류와 거짓 지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학문이라 불리는 나머지 지식 프로젝트에도 이와 똑같은 점이 적용되어야 한댜. 윤리와 정치가 단지 사회과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 전체로서의 학문에 있는 객관성에, 암암리에 혹은 드러내 놓고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세계의 ‘대상들‘에게 행위자/행동가의 지위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 P355

‘실제‘ 세계에 대한 설명은, 그러므로 ‘빌견‘의 논리에 의촌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실린 ‘대화‘의 사회 관계에 의존한다. 세계는 스스로 말하지도, 주인 암호 해독자를 위해 사라지지도 않는다. 세계의 코드들은 읽혀지기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지도 않는다. 세계는 인간화를 위한 원료가 아니다. ‘주체의 죽음‘ 담론의 또 다른 지류인 인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공격은 이 점을 매우 명확하게 하였다. 사회적인 것 혹은 매개 행위라는 어설폰 범주에 의해 조악하게 암시된 어떤 비판적 의미에서 볼 때, 지식 프로젝트 속에서 만나는 세계는 능동적 실체이다. 과학적 설명이 지식 대상으로서의 이런 차원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한 충실한 지식은 상상 가능하며, 우리에게 소유권 주장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재현 혹은 암호 해독 혹은 발견 등에 대한 어떤 특정한 학설도 어떤 것을 보증할 수 없다.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 왜냐하면 리얼리즘은 세계의 능동적 매개 행위를 다루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 P356

에코페미니즘은 부르주아적 · 마르크시즘적 혹은 남성주의적 프로젝트에서 계획되고 전용되는 자원으로서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서 세계를 해석할 것을 무엇보다도 고집하였다. 지식면에서의 세계의 매개 행위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의 독자적인 유머 감각에 대한 지각을 포함한 불안케 하는 가능성들을 위한 여지를 만든다. 그런 유머 감각은, 자원으로서의 세계에 관심이 있는 인본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것이 아니다. - P356

나는 ‘사실성‘과 ‘유기적인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물질적-기호적 행동가‘라고 불리는 성가신 실체로 번역하고 싶다. 이런 적절치 못한 용어는 지식 대상들의 즉각적인 현존이나 혹은 동일한 것, 즉 특별한 역사적 위기에 무엇이 객관적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한 최종적이거나 유일한 결정을 함축하는 일이 절대로 없이, 몸 생산 장치의 능동적이고 의미 발생적인 축으로서의 지식 대상들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언어 역시 의도와 저자로부터 독립된 행동가가 되는 문학 생산의 소재지인, ‘시‘라고 불리는 킹의 대상들처럼 지식 대상으로서의 몸들도 물질적이고 기호적인 발생적 혹이다. 그들의 경계는 사회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물질화한다. 경계들은 실천을 계획함으로써 그려진다. ‘대상‘들은 그런 식으로 미리-현존하지 않는다. 대상들은 경계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경계들은 내부로부터 변화한다; 경계들은 속임수를 쓴다. 경계들이 임시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의미들과 몸들을 발생시킨다. - P359

객관성은 해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그리고 통상적으로 불평등한 구조화에 관한 것이며, ‘우리‘가 영구히 죽어야 하는, 즉 ‘최종적인‘ 통제 속에 있지 않은 세계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에 관한 것이다. ...
아마도 세계가 일개의 자원으로 환원되는 것에 저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계는-어머니(mother)/물질(matter)/중얼거림(mutter)이 아니라-언제나 의미와 몸의 강력한 결속이며, 언제나 문제시되는 것을 상징하는 은유인 코요테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체현, 부분성에 대한 페미니즘 희망, 객관성, 상황적 지식 동은 여러 가능한 몸과 의미의 장 속에 있는 이런 강력한 혹 속에서 대화와 코드에 의지한다. 이곳이 바로 페미니즘의 객관성 문제에서 과학, 과학 공상, 과학소설이 수렴되는 곳이다. 설명 가능성, 정치,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대화히는 법을 배워야 하는 코드화의 사기꾼으로서 세계를 재상상하는 데(revisioning) 달려있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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