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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370페이지쯤 읽고 있을 때다. 그러니까 남북전쟁 전의 메릴랜드 시골에서 개고생 끝에 다나와 케빈이 마침내 1976년 LA의 집으로 돌아온 다음 익숙한 것들에 낯설어하고 있을 때, 짜증과 빡침이 확 밀려왔다. 책이 끝나려면 아직 백 페이지도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곧 다나가 또 19세기로 불려갈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나가 타임슬립을 피할 수 없듯, 독자도 노예의 고초라는 간접경험을 피할 수 없다. 채찍질, 강간, ... 노예의 자식들을 팔아넘기는 저 백인 남성 루퍼스가, 그리고 그에게 이 모든 일들을 당해야 하는 흑인 여성 앨리스가 다나의 조상이다.
1976년 LA. 다나와 케빈은 새 집으로 이사왔다. 몇 년 전, 다나는 열 살도 더 위인 백인 남성 케빈을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함께 일하다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작가이지만, 생계를 위해 그 곳에서 일해야 했다. 케빈은 막 소설을 출간했던 참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 창고 일과 이별할 수 있었지만, 다나와 관계를 이어간다. 두 사람은 인종간 결혼을 반대하던 양가의 반대를 무시하고, 라스베이거스로 가서 결혼했다. 1976년 6월 9일부터 7월 4일까지의 시간이 흘러간다.
남북전쟁 전의 매릴랜드 깡촌. 노예주였던 메릴랜드에서 흑인의 목숨은 그가 자유민이라고 해도 파리목숨였다. 주인과 노예, 노예 감독, 노예 상인, 그리고 흑인들을 사냥하는 순찰대... 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나는 자신의 조상 루퍼스가 위험을 느낄 때마다 타임슬립을 통해 이 시대로 불려와서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새로운 관계들을 맺어나간다. 관계들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이 백인 남성 주인과 흑인 여성 노예 간의 명확한 권력관계일 때조차, 여기에는 지배와 함께 정서적 의존, 처벌과 함께 보상이 같이 존재한다. 루퍼스 와일린이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젊은 나이에 죽을 때까지 1810년대부터 대략 20여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다.
서로 다른 두 시간대가 타임슬립을 통해서 한데 엉킨다. 타임슬립이라는 비현실적 발상을 통해 재현되는 스토리는 매우 현실주의적이다. 보통의 경우, 예닐곱 세대 위의 조상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지 감을 잡기 힘든데, 우리의 일상적 감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을 타임슬립을 통해 재현하는 버틀러의 스토리 만들기는 매우 강렬하다. 버틀러는 이 소설의 장르를 잔혹환상물(grim fantasy)이라고 불렀다는데, 딱 어울리는 명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타임슬립이라는 환타지는 리얼리즘을 위한 강력한 장치로서 작동한다. 한국 소설이라면 국뽕의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을 소재인데, 읽는 내내 사실성이 채찍처럼 몸에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는 느낌으로 몰입했다.
여기서 말하는 “킨(kindred)”은 혈연관계를 통해 맺어진 정체성(identity, 동일성) 집단이기보다는 선택이 개입되고 책임, 곧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이 작동하는 인간관계이다. 그것은 따뜻하기만 하고 무구한(innocent) 본원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속했던 타자들이 예기치 않게 만나 관계를 형성하고, 애증 속에서도 서로를 외면하지 않고 돌보는 성숙한 관계이다. 해러웨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정체성 대신 결연과 연대로 위기에 대처하는 결연집단(affinity group)”(『해러웨이 선언문』, 30-31)이며, “깊은 손상과 중요한 차이를 가로지르는 킨(kin) 만들기,” 곧 갓킨(godkin)이 아니라 아드킨(oddkin) 만들기이다(『트러블과 함께하기』, 189, 9).
소설 속에서 이 킨십(kinship)은 여러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마음과 감정의 여러 층들을 드러낸다. 인종과 연령을 뛰어넘은 다나와 케빈의 관계, 루퍼스의 무의식적 구조 요청에 언제나 저항하지 못하는 다나, 사랑과 자유를 위한 탈출을 감행했다가 아이작을 잃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노예 신세로 전락한 앨리스,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주인으로 지배하는 루퍼스, 두 명이지만 루퍼스에게는 한 명이나 다름 없는 다나와 앨리스, 이들을 돌봐주는 새라, 캐리, 나이젤 등... 버틀러는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정의 교차를 탁월하게 풀어낸다. 고귀한 죽음은 없고 억울하거나 억울하지 않은 죽음만 있는 것도 가슴 아프지만 마음에 들었다.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 삶, 등에 새겨진 채찍 자국과 없어진 왼쪽 팔.
500페이지가 넘어서 다시 1976년으로 다나가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Gracias a la vida!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마 다나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좀 멍한 상태다. 역사, 몸, 고통, 생명, 킨... 이런 말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돈다.
2022년. 오후인데도 깜깜해지며 소나기가 퍼붓는다. 이제 격리도 하루밖에 안 남았다. 다시 한 번 Gracias a la vi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