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제 서재의 방문객이 5000 명이 되는군요.

방문객 수십만을 넘는 수퍼 서재 쥔장들께는 코웃음나는 일이겠지만, 서재를 연 지 5년 정도 되어서야 가까스로 달성하는 5000 방문객이라 저에게는 의미가 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5000 번째 방문객께 소정의 상품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 서재에 들어오신 순간 방문객 수가 5000을 가리키고 있었다면, 댓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5000 번째 방문객이 되심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깊은 마음에서 우러난 선물...

댓글을 달아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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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4-0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13, 총 4900 방문

미리 축하해요. ^^

전자인간 2008-04-01 13: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4900 방문자께도 선물 드려야겠군요. 받으세요. ^^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비로그인 2008-04-0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가 진짜인가요,태그가 진짜인가요?
오늘 20, 총 4907 방문

전자인간 2008-04-01 17:21   좋아요 0 | URL
태그가 진실이어도, 거짓이어도 모순적이네요.
그나저나 4907번째 방문자께도 댓글 선물을 드렸으니, 5000번째 방문자께는 보다 근사한 것을 준비해야겠군요. (아직 4월1일이지요?)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 사건의 생생한 범행현장? 편집을 통하여 영화적 연출마저 가능하게 하는 촘촘한 CCTV 카메라? 아니면, "그런 CCTV는 너무나 흔하므로 전혀 충격적이지 않다"는 나의 잠재의식?

홉스가 말하는 사회계약은 국가 형성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범죄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트루먼 쇼의 주연을 자처하며 빅브라더와 맺는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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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 현대의 삶 형태에 관한 분석을 위하여 아우또노미아총서 5
빠올로 비르노 지음, 김상운 옮김 / 갈무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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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서평을 쓴다는 것은 그 책이 딛고 있는 견고한 구조물들과 그 위에 덧세워진 구조물로서의 해당 서적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그 구조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이리 저리 밀어 보고 두드려 보기도 한 후, 그 미학적 건축학적 완성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서적이 학문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이런 이유로 나는 학술적인, 특히 사회과학과 관련된 책에 대한 서평을 꺼린다. 그 책의 하부토대를 이루는 수많은 사상가들의 사유를 이해하기에 역부족인 까닭에 저자의 주장도 충분히 이해하기 힘들고, 따라서 해당 책에 대한 '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서평'하려는 책의 경우에도 사정은 그리 다를 바 없다. 이 책이 논지를 펴기 위해 끌어들인 정치/철학 사상가 - 맑스, 홉스, 스피노자,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 기 드보르, 소쉬르, 시몽동, 벤야민, 칸트, 그리고 들뢰즈 - 의 글을 진지하게 읽어본 적이 거의 없거나 읽었더라도 제대로 이해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과학을 전공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또는 앞으로라도 그러한 사상가의 글을 열심히 읽고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단지 서평을 잘 쓰기 위해서!) 그러나 몇몇 학인들과의 세미나를 통하여 수 주에 걸쳐 '성문종합영어' 보듯 연구하고 수차례 되읽는 동안 이 책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진 나머지, 지금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려 한다.

네그리로 대표되는 아우토노미아(우리말로는 '자율주의' 쯤으로 번역되는) 운동이 '제국(empire)'과 함께 지적 세계에 유통시킨 유행어인 '다중(multitude)'은 현대 사회의 복잡한 양상을  한 눈에 직관적으로 집약하여 파악하도록 하는 초광각렌즈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초광각렌즈를 통해 세상을 압축하여 볼 때 많은 왜곡과 세부사항에 대한 간과가 일어나기 쉬운 것처럼,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이라는 단 한마디에 담을 때에도 많은 오해와 편견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예컨데, 어떤 이들은 다중이란 말에서 극단적인 무질서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다중이란 개념이 전통적인 노동계급 개념을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혁명에 유해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운동의 또 한명의 이론가인 빠올로 비르노(Paolo Virno)는 이 책을 통하여 그러한 오해를 바로잡고 다중 개념의 올바른 용례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A Grammar of the Multitude>(원제는 이태리어인데, 비슷한 뜻으로 보인다.)인 것은 그런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중 개념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술어(述語)들을 사용하였다. 다중의 세계에서 생산력을 담당하고 따라서 이윤을 창출해 내는 역량으로 이해되는 맑스의 '일반지성' 개념, 그리고 '일반지성'이라는 악보를 바탕으로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생산양식을 펼처가도록 하는 '탁월한 기예'라는 개념이 소개된다. 또한 전-개체적인 유(類)적 역량의 개체화이지만 전-개체적인 면과 개체화된 면이 공존하는 상태로서의 주체와 그 집합으로서 다중이 묘사되다가, 편의주의와 냉소주의, 그리고 잡담과 호기심이라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개념이 다중의 특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잡탕스러운 술어들을 통하여 저자는 그야말로 '다중적인' 다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 식의 서술은 저자가 바슐라르의 말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처럼, 이질적인 철학적 술어들을 통하여 적실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양자역학과도 같은 다중의 모호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렵지만 흥미로운 개념을 퍼부어가며 저자가 설명하려는 다중은 헐크와 같은 양가성을 보인다. 그리고 그 불가해한 개념을 설명하는 저자의 어조는 마치 지킬/하이드를 정신분석하는 정신분석가마냥 무척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비르노는 최소한의 흥분만을 띈 채 다음과 같은 명제를 주장한다 - 다중은 혁명의 방아쇠나 뇌관이 될 수도 있지만, 현재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꼬뮤니즘화된 자본주의를 초래하기도 한다. 다중은 비-대의적 민주주의를 향한 원심력이지만 한편으로는 국가 행정의 비대화라는 암을 부르는 발암물질이기도 하다... <제국>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보여준 <공산당 선언>과도 같은 용광로의 열기와 비교할 때, 같은 대상을 향한 비르노의 태도는 마치 뉴트리노를 설명하는 물리학자의 그것과도 같이 학구적이며 중립적으로 상온에서 맴돈다.

요컨대, 이 책을 통하여 저자 비르노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스위스칼처럼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지닌 무기로서의 다중인데, 그는 그것이 '좋은 편'과 '나쁜 편' 중 어느 편에서나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급진적인 좌파운동가로서의 저자가 중립적인 주심노릇만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책을 관통하며 한 사람의 사상가를 꾸준히 소환하는데, <자본>의 저자로서가 아닌, <요강>의 저자로서의 맑스가 바로 그다. 실패한(것처럼 보이는) 사회주의 기획자로서의 <자본>의 저자 맑스를 넘어서, 새로운 유토피아, 즉 비-대의적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꼬뮤니즘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보이는 <요강>의 저자 맑스를 통해, 러시아에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혁명 - 그것은 일어난다면 아마도 68 혁명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 을 모색하는 것은 비르노와 같은 극좌파 반체제 혁명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 조심한다. '다중을 이끄는 스탈린'을 염려했던 것일까? 아니, 그가 염려하고 무서워한 대상에 대한 보다 적절한 비유는 '스탈린이 된 다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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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인간 2008-03-31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방금, 겨울잠에서 깨어났습니다.

2008-03-31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1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8-04-01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반가워요.
기다렸어요.

전자인간 2008-04-01 17:17   좋아요 0 | URL
이제서야 나타나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알라딘에 마지막 글을 쓴 지도 이미 한 달이 넘게 흘렀다. 회사일과 개인적인 일로 바빴다고 변명하고 싶기는 하지만, 너무 궁색한 듯하여 그냥 넘어가련다. (사실 그간 두 번 정도 글 쓸 시도를 해 보았지만, 글 쓰기 시작한 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다른 일들이 나의 영혼을 앗아가는 바람에 글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아직도 못 다 쓴 '임시 저장 글' 하나가 있다.) 하긴, 일 년 넘게 공백을 가지곤 했던 나로서 한 달이 뭐가 대순가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일일 방문자 통계가 '0'이 아닌 것을 보고 있노라면, 한 달이 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서재 방문객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같다.

21세기형 천동설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느낀 대로 말하자면, 나의 공백은 내 환경의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이를테면, 내 경우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3박4일짜리 짧은 휴가를 갔다 온 것 뿐인데도 회사 식당의 인테리어가 홀랑 바뀌어 있다던지, 자주 지나던 길을 2,3주 안 간 사이에 공사로 온통 파헤쳐져서 덕지덕지 누더기같은 우회로로 변해 있다던지 하는 일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엄습하고 있다. 나와 서로간에 왕래가 잦은 편이던 두 분의 서재가 폐쇄와 다름없는 상태로 변해 있는 것.

자발적 블로그 폐쇄는 '자살'이라 할 만하다. 싸이버상으로만 그 분들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 분들의 블로그 폐쇄는 곧, 그 분들을 다시 볼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알라딘 서재'라는 공간에서 물러나기, 그것은 '이승'이라는 공간에서 물러나려는 시도인 자살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것이다. 자살을 하더라도, 그 주체는 어딘가 다른 공간에서 연속성을 이어갈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블로그를 폐쇄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어딘가 다른 공간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중요하고도 슬픈 사실은, 그 믿음과 상관없이 나는 그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초간단 싸이버 레퀴엠을 중얼거려본다. 즐~~~ ('즐'에 대한 초딩어 사전 1번 뜻으로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이 경우에는 특히 '즐' 뒤의 지렁이 세마리를 주목해야 한다. 점 세 개로 구성된 말줄임표<...>가 모든 말을 함축하는 역할을 수행하듯, 이는 모든 행위를 함축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허무주의다. '인생 뭐 있어?' 또는, '블로그 뭐 있어?' 라며 입꼬리를 실룩대며 냉소적으로 중얼거리기... 결국 이런 태도로 변하곤 한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 그러므로 너무 몰두하지 말자, 그냥 되는 대로 즐기자..." 위의 대상이 '인생'이라면, 나는 대체로 반대하는 쪽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블로그(또는 인터넷, 옛날을 기억하는 이라면 PC통신, 등 싸이버 상의 모든 활동)'라면, 나의 의견은 대체로 찬성하는 쪽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싸이버 상에서는 여러 번 죽을 수 있다." 몰두하다가 허무하다 느끼면 죽어버려라, 그리고 다른 어딘가에서 부활하라!

그리고 이런 태도로 인해 역설적으로 가장 궁극의 슬픔이 솟아난다. 그 어디에도 닻을 내릴 수 없는 '플라잉 더치맨'호의 선원들이 가질 만한, 텅 빈 안구가 주는 깊은 상실감. 죽을 수 없는 고단한 싸이버 상의 삶에 대한 회의. 그리고,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날아 가버린 망자들을 향한, 옅을수록 더 애수에 찬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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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0-25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넷질하면서 늘 느끼는 허무감이 그런 거지요.
그래도 뭐 별로 딱히 허무할 것도 없잖아요. :)

전자인간 2007-10-26 01:46   좋아요 0 | URL
제 경우는 참 허무하더군여.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괜찮아지더군요. 근데... 그게 더 허무하더군여...

딸기 2007-10-26 18:15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게 더 허무해요... ^^

비로그인 2007-10-2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군요.
반가워요.
글쓰다 30분만에 영혼을 앗아가 버릴 정도로의 일은 뭘까요?

죽어버려라,그리고 부활하라....
그 분은 어딘가에서 부활하셨을까요?
찾아가고 싶어지네요.

그리움이 솟아납니다.

전자인간 2007-10-26 01:48   좋아요 0 | URL
'글쓰다 30분만에 영혼을 앗아가 버릴 정도로의 일'은...
바쁜 일입니다. (절대 농담 아닙니다.)

저도 그리움 땜에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잃어버린우산 2007-10-2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드립니다. 그분들이 사이버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던 심정을 이해하지만 언제고 돌아오길 바라게됩니다,,,

전자인간 2007-10-26 01:51   좋아요 0 | URL
그 분들이 돌아오실 수만 있다면...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이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더군요.

2007-10-25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6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6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7-10-2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이버 세상에 부활한지 얼마 안지났는데 벌써 자살 욕망이 가득하네요. ^^

전자인간 2007-10-26 06:50   좋아요 0 | URL
자살이 아니라, 부활의 충만한 생동감을 기대합니다...

2007-10-26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8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8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9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1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3 0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3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자인간님팬 2008-03-28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뵙고 싶습니다. 다시 오시길요. 건강하시구요!

전자인간 2008-03-31 00: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과 같은 분이 계시기에 저는 알라딘에 글을 쓸 힘이 생깁니다. 방금 새 글을 올렸는데, 그 원동력의 칠할은 님의 댓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라캉과 지젝의 조합은 언제나 이렇듯 전복적 쾌감을 주는 것일까? 최소한 알라딘 내에서는 'How to Read' 시리즈 중 가장 많이 판매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수백 킬로미터의 속도감과 중력에 반할 때의 현기증으로, 매 페이지마다 한 번씩 뒤집히는 롤러코스터같다. 라캉과 지젝을 본격적으로 읽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므로, 정신분석학적 놀이공원같은 이 책의 성격이 라캉과 지젝 중 누구에게서 주로 기인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간혹 메스컴에서 눈에 띄는 그의 책에 대한 리뷰와 가장 유명한 알라디너 중 한 분인 로쟈님의 열정적인 소개에 힘입어, 그 성격 중 많은 부분이 지젝에게서 왔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추측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매 장 처음에 등장하는 라캉의 원전과 그 외 부분의 비교이다. 지젝의 글이 르네 마그리트의 투명하고 명료한 초현실주의적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면, 라캉의 글은 무의미한 잉크 흘림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잭슨 폴록의 추상화와 같다. 지젝의 글은 건빵처럼 텁텁한 라캉을 청량감 넘치는 복숭아향으로 전환하여 즉자적으로 뇌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힘이 있다. 많은 지적 독자가 반할 만한 현대적 덕목. 말하자면 이 책은 지젝이 현대 인문/사회학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파퓰러한 위치를 보여주는 스냅샷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의외의 곳에 숨어 있다. 바로 역자 후기. 수십 번 전복되다시피하는 위기를 넘기고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의 사파리 짚차를, 역자는 측면에서 코뿔소처럼 강하게 들이받아 끝내 뒤집어 버리고 만다. 후기에서 한참을 라캉과 지젝에 대해 비판적으로 써내려 간 역자는, 마침내 "리비도적 충동으로서의 욕망! 한 번 더 '프로이트로의 복귀'가 필요하다."고 라캉 없는 프로이트를 구호처럼 부르짖기에 이른다. 어째서 역자는 자신이 공들여 번역한 책의 주제를 완전히 뒤엎는 후기를 쓴 것일까? 아니, 어째서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한 것일까? 수유+너머의 '안티-오이디푸스' 강의에서 역자가 라캉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잠깐 비췄던 것이 떠오른다. 그 때 그는 라캉을 '보수주의자'로 규정했었다. 또한 지젝에 대한 비판도 떠오른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지젝을 '한 때의 유행'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 때 이미 지젝의 다른 책(<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을 번역했었고, 지젝에 대한 책(<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도 번역한 바 있지만, '어떻게 지젝을 번역한 사람이 지젝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또, 그는 지젝을, 그리고 라캉을 번역했다. 이는 "환상적 악몽의 공포를 회피하는 방법으로서 이행",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우리를 지배하는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를 몸소 보여준 것인가?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끔찍스러운 성적 환상의 악몽에서 깨어난 톰과 니콜이 '섹스'라는 해법을 제시한 것처럼, 역자도 라캉과 지젝의 환상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전복적 후기'라는 이행을 감행한 것인가?

결국 이 책은 두 메시지가 기묘하게 공존한다. 'How to Read 라캉'과 'Don't Read 라캉'. 더 기묘한 것은, 역자의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도, 지젝이나 라캉의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도, 모두 이 책을 흥미로워하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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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7-09-18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책 찜해놨는데,,요즘 읽을게 넘 많아서
곁눈질도 못주고 있어요.
님의 리뷰로 읽고 싶어졌어욥!!!ㅎㅎ

전자인간 2007-09-18 18:27   좋아요 0 | URL
얇아서 금방 읽을 수 있습니다.
라캉 원전 대목에서 조금 막히기는 합니다만... :)
라캉, 지젝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