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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 현대의 삶 형태에 관한 분석을 위하여 ㅣ 아우또노미아총서 5
빠올로 비르노 지음, 김상운 옮김 / 갈무리 / 2004년 10월
평점 :
책을 읽고 나서 서평을 쓴다는 것은 그 책이 딛고 있는 견고한 구조물들과 그 위에 덧세워진 구조물로서의 해당 서적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그 구조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이리 저리 밀어 보고 두드려 보기도 한 후, 그 미학적 건축학적 완성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서적이 학문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이런 이유로 나는 학술적인, 특히 사회과학과 관련된 책에 대한 서평을 꺼린다. 그 책의 하부토대를 이루는 수많은 사상가들의 사유를 이해하기에 역부족인 까닭에 저자의 주장도 충분히 이해하기 힘들고, 따라서 해당 책에 대한 '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서평'하려는 책의 경우에도 사정은 그리 다를 바 없다. 이 책이 논지를 펴기 위해 끌어들인 정치/철학 사상가 - 맑스, 홉스, 스피노자,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 기 드보르, 소쉬르, 시몽동, 벤야민, 칸트, 그리고 들뢰즈 - 의 글을 진지하게 읽어본 적이 거의 없거나 읽었더라도 제대로 이해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과학을 전공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또는 앞으로라도 그러한 사상가의 글을 열심히 읽고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단지 서평을 잘 쓰기 위해서!) 그러나 몇몇 학인들과의 세미나를 통하여 수 주에 걸쳐 '성문종합영어' 보듯 연구하고 수차례 되읽는 동안 이 책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진 나머지, 지금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려 한다.
네그리로 대표되는 아우토노미아(우리말로는 '자율주의' 쯤으로 번역되는) 운동이 '제국(empire)'과 함께 지적 세계에 유통시킨 유행어인 '다중(multitude)'은 현대 사회의 복잡한 양상을 한 눈에 직관적으로 집약하여 파악하도록 하는 초광각렌즈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초광각렌즈를 통해 세상을 압축하여 볼 때 많은 왜곡과 세부사항에 대한 간과가 일어나기 쉬운 것처럼,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이라는 단 한마디에 담을 때에도 많은 오해와 편견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예컨데, 어떤 이들은 다중이란 말에서 극단적인 무질서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다중이란 개념이 전통적인 노동계급 개념을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혁명에 유해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운동의 또 한명의 이론가인 빠올로 비르노(Paolo Virno)는 이 책을 통하여 그러한 오해를 바로잡고 다중 개념의 올바른 용례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A Grammar of the Multitude>(원제는 이태리어인데, 비슷한 뜻으로 보인다.)인 것은 그런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중 개념을 펼치기 위해 다양한 술어(述語)들을 사용하였다. 다중의 세계에서 생산력을 담당하고 따라서 이윤을 창출해 내는 역량으로 이해되는 맑스의 '일반지성' 개념, 그리고 '일반지성'이라는 악보를 바탕으로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생산양식을 펼처가도록 하는 '탁월한 기예'라는 개념이 소개된다. 또한 전-개체적인 유(類)적 역량의 개체화이지만 전-개체적인 면과 개체화된 면이 공존하는 상태로서의 주체와 그 집합으로서 다중이 묘사되다가, 편의주의와 냉소주의, 그리고 잡담과 호기심이라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개념이 다중의 특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잡탕스러운 술어들을 통하여 저자는 그야말로 '다중적인' 다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 식의 서술은 저자가 바슐라르의 말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처럼, 이질적인 철학적 술어들을 통하여 적실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양자역학과도 같은 다중의 모호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렵지만 흥미로운 개념을 퍼부어가며 저자가 설명하려는 다중은 헐크와 같은 양가성을 보인다. 그리고 그 불가해한 개념을 설명하는 저자의 어조는 마치 지킬/하이드를 정신분석하는 정신분석가마냥 무척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비르노는 최소한의 흥분만을 띈 채 다음과 같은 명제를 주장한다 - 다중은 혁명의 방아쇠나 뇌관이 될 수도 있지만, 현재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꼬뮤니즘화된 자본주의를 초래하기도 한다. 다중은 비-대의적 민주주의를 향한 원심력이지만 한편으로는 국가 행정의 비대화라는 암을 부르는 발암물질이기도 하다... <제국>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보여준 <공산당 선언>과도 같은 용광로의 열기와 비교할 때, 같은 대상을 향한 비르노의 태도는 마치 뉴트리노를 설명하는 물리학자의 그것과도 같이 학구적이며 중립적으로 상온에서 맴돈다.
요컨대, 이 책을 통하여 저자 비르노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스위스칼처럼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지닌 무기로서의 다중인데, 그는 그것이 '좋은 편'과 '나쁜 편' 중 어느 편에서나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급진적인 좌파운동가로서의 저자가 중립적인 주심노릇만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책을 관통하며 한 사람의 사상가를 꾸준히 소환하는데, <자본>의 저자로서가 아닌, <요강>의 저자로서의 맑스가 바로 그다. 실패한(것처럼 보이는) 사회주의 기획자로서의 <자본>의 저자 맑스를 넘어서, 새로운 유토피아, 즉 비-대의적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꼬뮤니즘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보이는 <요강>의 저자 맑스를 통해, 러시아에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혁명 - 그것은 일어난다면 아마도 68 혁명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 을 모색하는 것은 비르노와 같은 극좌파 반체제 혁명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 조심한다. '다중을 이끄는 스탈린'을 염려했던 것일까? 아니, 그가 염려하고 무서워한 대상에 대한 보다 적절한 비유는 '스탈린이 된 다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