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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채 그 첫 5,000년-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2011, 부글북스
부채는 “약속의 타락”이다. 세상에 돈이 있기 전에 거기에 부채가 있었다.
오랫동안 경제학에서 부(副)를 설명하는 방식이자, 상식으로 통용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물건과 물건의 거래가 상품을 통한 교환으로, 다시 편리한 화폐 거래로, 이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신용이 중요한 교환의 방식이 되었다. 화폐 이전에는 곡물, 양, 생선뼈, 조개껍데기, 향신료를 이용하여 거래의 편리함을 도모했으나, 보관의 어려움과 양(quantity)을 일치하는데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때문에 일반적 등가물로 적합한 금/은을 활용하였다. 동양에서는 만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늦어도 4~5천 년 전에 이미 금/은을 통한 거래가 일반화되었다. 금/은 주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뉴욕 주립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였고, 2007년까지 예일대 교수였으며, 현재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에 재직하고 있는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신간 『부채 그 첫 5,000년-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는 위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경제 상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과학의 임무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볼 때, 무척이나 창의적이고 급진적인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우석훈 교수가 『나와 너의 사회과학』(2011, 김영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경제학자가 가장 보수적인 사회학자보다 덜 진보적인다.”고 언급한 것에 동의한다면, (경제학자가 아닌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주장은 자본주의 토대를 흔든다는 측면에서 거의 혁명에 가깝다. 인류 5,000년 역사를 지구 전 방위로 확대한 - 시공간을 넘나드는 - 방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앎과 삶을 일치하여 살고 있는 연구자의 신념에 기인한다. 그는 인류학자이면서 동시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 정의 실천 운동가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빚은 변제되어야 마땅하다.”는 상식에서 “빚은 꼭 갚아야 하는가?”라는 통념상 ‘비도덕적’일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모든 빚을 다 갚을 필요는 없다.”는 논거를 5천년 인류 역사에서 찾아낸다. 그는 먼저 경제 행위는 신용사회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신용을 중시했고, 이후 화폐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신용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화폐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다른 물건으로 보상하기 위해서 물물교환이 등장했다. 그의 반론은 현대 경제학의 기초인 애덤 스미스의 이론 비판에서 시작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술집이나 시장에서 주화를 사용하지 않고, 외상장부를 이용했다. 주화는 왕이 자신의 군대에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즉 경제의 핵심은 (차용증서이기도 한) 화폐가 아니라, 부채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부채의 계보를 파헤칠 때만이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현대 경제학에서 부채의 채권·채무 관계는 시장이라는 ‘중립적인’ 공간에서 돈을 가진 이에게 돈을 빌리면 비로소 성립한다고 하지만, 실제 시장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힘의 역학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경제학에서 역사학과 인류학으로 옮겨진 ‘부채’는 ‘시장’이라는 중립적인 가상공간을 벗어나서 경쟁과 전쟁이 난무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재해석된다. 부채에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면, 모든 빚을 돌려줘야 하는 건 아니고, 빌려준 만큼 돌려받는 것이 무조건 정의로운 것도 아닐 수 있다. 이때 부채는 경제적 거래 현상이지만, 실제는 정치적 경쟁이자 지배와 약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관점의 전환은 -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가 경제적 상식과 신념으로 굳어있는 현실에 대립 항을 만들고 - 현재의 세계 질서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읽게 한다. 현재 우리의 노모스는 모든 관계를 시장적 관계로 환원한다. 그러나 부채가 반드시 갚아야 할 공정한 채권/채무가 아닌 당위라고 한다면, 그러한 도덕적 책무가 누구를 위해서 형성되고, 정당화되었는지를 인지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핵심 키(key)가 된다. 즉 국가와 시장의 관계라든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계화를 재해석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정반대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국가와 시장은 탄생부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시장이라는 가상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또한 채무불이행을 혹독하게 다루는 IMF(국제통화기금)와 미국의 혹독한 화페 정책은 도덕적 양심의 준수를 엄격하게 요구한다. 그에 반기를 드는 나라는 군사적, 정치적 보복 조치를 받아야 했던 선례들이 있다. 그동안의 인류 역사는 어떠한 사회 시스템도 영원할 수 없음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저자의 주장이 하나의 힘 있는 경제 담론을 형성한다면, 월가 점령이라는 전지구적 실천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존립이 ‘나’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꾼다는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숙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