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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슈미트 - About Schmid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누구나 ‘평생의 일터’라고 믿었던 곳에서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 실직과 퇴직이 예기치 않은 쓰나미처럼 어느 순간 들이닥치면 인생의 말미에 다다랐다는 용도 폐기의 씁쓸함으로 공황에 빠진다. 자유를 억압하던 직장과 노동이 불안과 회환, 절망을 낳는다. 의욕을 갖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인간관계와 활동공간이 퇴출자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는 노동유연화, 구조조정, 조기 · 명예퇴직이 낯설지 않은 우리 사회 중장년층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막막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이 시대 은퇴자를 잘 대변한다. 후원하고 있는 아프리카 한 소년에게 보내는 편지를 슈미트가 직접 읽는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구성 된다. 뒤늦게 성장통을 앓는 퇴직자의 담담한 독백이 코미디와 결합하면서 냉소라는 감정의 아이러니를 낳는다.
“내 인생은 남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워렌 슈미트(잭 니컬슨)는 40년 넘게 몸담았던 보험회사에서 퇴직한다. 가장 가까운 아내와 외동딸은 그의 막막한 불안과 외로움을 살피지 못한 채, 아내가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는 대형사고와 맞닥뜨린다. 잔소리와 타박에 지쳐서 차라리 아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여자처럼 변기에 앉아서 소변보는 자유’도 잠깐 뿐이다. 슈미트는 아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끔찍한 외로움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슬픔에 잠겨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자신의 이웃 친구와 아내가 주고받은 연서를 발견한다. 충격과 배신감에 분노하는 그에게 이제 남은 건 집 한 채와 연금, 덴버에 사는 결혼을 앞둔 외동딸 지니 그리고 생전에 부인이 마련한 기막히게 훌륭한 캠핑카 한 대 뿐이다. 슈미트는 딸 결혼식에 가기 위해서 캠핑카를 몰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다. 기대와 달리 사랑하는 딸은 아버지를 차갑게 대하고, 철저하게 외톨이가 된 슈미트는 결혼식이 끝난 뒤 “내 인생은 남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진지하게 자문한다.
슈미트의 마지막 희망은 아프리카 탄자니아 소인이 찍힌 편지 한통이다. 그가 매달 소액을 후원해 온 고아 소년 엔두구의 그림편지와 성심수녀회의 수녀의 글이 들어 있다. “엔두구는 온종일 당신 생각뿐이에요. 당신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빌고 있죠.” 세상에 혼자라고 느끼던 슈미트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운다.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완전히 존재감을 상실한 슈미트는 처절하게도 머나먼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고작 22달러로 그는 누군가에게 아직은 유의미한 존재이다. 한평생을 같이했던 가족과 친구들이 주지 못했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한 소년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그림 속엔 깡마른 슈미트와 어린 아이가 손을 잡고 활짝 웃고 있다.
루이스 베글리의 소설이 원작인 <어바웃 슈미트>는 미국 중산층 남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위트 있게 보여준다. 슈미트의 말, 몸짓, 표정은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지만, 코미디는 한결 같이 냉소와 회한을 수반한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전작 <일렉션>처럼 이 영화도 예리한 통찰과 경쾌한 유머를 드러낸다. 잭 니콜슨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 이후, 섬세하고 순수지만 괴팍한 중년 남자를 다시 한번 완벽하게 재현하여 인생의 본질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그는 이후 모건 프리먼과 함께 한 <버킷 리스트>(2007)에서도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불러 일으켰다. <어바웃 슈미트>는 당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골든글러브 3개 부문과 LA비평가협회상 4개 부문을 휩쓸었었다. 여러 번 보아도 우리의 마음을 매번 새롭게 위무해주는 이 영화와 함께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연말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