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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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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히틀러의 철학자들』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여름언덕, 2014. 5.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아주 사적인 단상 1.

 

폴란드 크라코프(Krakow)에 가본 적이 있다. “하루에 24계절이 있다.”는 유럽의 속담처럼 그해 여름, 오슈비엥침은 가을처럼 서늘했다. 원주민들이 크라코프는 항상 잿빛 하늘,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고 얘기했다. 오슈비엥침까지 남은 시간 동안 이른 점심을 먹지 않았다면,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오슈비엥침을 다녀와서는 물 한 모금 넘길 수가 없었다. 때마침 여름방학이었던 유대인 아이들이 곳곳에서 기도하고 통곡 섞인 추모곡을 불렀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중국 하얼빈의 731부대를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제주도로 현장 체험을 떠나는 동안, 유대 아이들 대부분은 국가가 제공하는 비용으로 2주 이상 오슈비엥침에 머물면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의무 교육과정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제주도 조차 4.3 항쟁의 역사적 장소가 아닌 관광으로만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슈비엥침은 유럽의 중심으로 유대인, 부랑아, 장애인을 모아오기 가장 최적의 장소였다. 히틀러라는 미치광이 한 사람이 이루어낸 참사가 아니라, 유럽인, 세계인의 노골적 지지와 암묵적 동의를 통해서 이루어진 인류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아주 사적인 단상 2.

 

대학원에서 한 학기 동안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공부했다. 『존재와 시간』을 밑줄 그어 읽어가면서 탐독했던 시간은 지적으로 성장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섬세하게 그의 철학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철학으로 들어가는 관문 하나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dasein)로서 -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인 - 인간은 늘 새로운 상황 속에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 푸코, 메를로 퐁티의 철학적 기반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생태주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하이데거를 읽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탈은폐성과 지배적 기술을 통해서 자연과 세계에 대한 존재를 해명한다. 탈은폐의 방식을 하이데거는 부품(Bestand)라고 이름하는데, 왜냐하면 "어디에서나 즉시 가까이 지정된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할 것이 요청되고 있으며, 그것도 그 자신 또 다른 어떤 요청에 의해 대비 상태에 있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이다. 현대기술이라는 새로운 계기는 용재성과 전재성과 나란히 부품성이라는 새로운 드러냄을 보인다. 자연을 부품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세계를 이처럼 부품으로 드러나도록 도발적으로 닦아세우는 담당자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 일을 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동시에 자신도 마찬가지로 도발적으로 닦아세워지는 자이다. "인간이 그 편에서 이미 자연 에너지를 채굴해 내라는 도발적 요청을 받고 있는 한에서만 이러한 주문 청탁하는 탈은폐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하이데거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지도교수님은 나치의 정치적 도구로써 철학을 제공한 그의 과오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이데거를 공부하지 않고 실존주의를 이해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특별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미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이광수, 이효석, 서정주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이다.

 

아주 사적인 단상 3.

 

학회에서 가끔 보았던 사회학 전공 교수님. 미국 유학 이후 대학을 자리를 잡은 젊은 교수는 학회의 중심에 있었다. 사회학에서 진보는 부르디외식으로 보면 크나큰 상징자본이 될 수도 있고, 그 학문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 삶의 궤적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사회학은 법학, 의학, 경제학과는 다르다. 학문과 실천이 불일치하는 순간, 그의 연구 성과 모두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섦과 동시에 인수위원회에 들어가서 이전에 그가 연구한 것과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이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세태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내가 옆에서 지켜보던 분의 변절을 보는 것은 학문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부의 힘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신간 『히틀러의 철학자』는 그동안 당연하게 공부한 철학이 히틀러의 정치적 도구로써 어떻게 복무했는지 철저하게 규명하고 있다. “나치 입문서는 권위적이다. … 어느 한 개인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결과물이다(131쪽).” 그가 명명하고 있는 ‘히틀러의 철학자’는 홀로코스트 시기 히틀러 주변의 철학자를 통칭한다. 칸트에서 니체, 알프레드 보임러에서 마르틴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에서 발터 벤야민에 이르는 철학자들은 모두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고민했으며 이들의 삶은 서로 연관성이 많았다. 즉 그들은 학생이었고, 교사였고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심지어 연인이기도 했다(7쪽).

성실한 사람일수록 나치 복무 역시 더욱 성실했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의 전범 아돌프 아히히만의 재판을 다루고 있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하고 있듯이 악의 평범성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악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니체주의자의 변명

 

니체를 공부하다 보면, 니체철학의 어떤 부분이 히틀러를 매료시켰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의지를 실현하는 위버멘쉬(초인), 끝없이 새롭게 변주되는 영원회귀, 연민과 약함에 대한 부정은 히틀러의 게르만민족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논리로 악용되었다. 인간을 벌주고 시험에 들게 하는 신(神)을 부정한 니체의 당시 기독교에 대한 혐오에 히틀러는 매료되었다. 사실 종교는 믿음이기도 하지만, 태도라고 했을 때, 니체가 부정한 신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신이었다. 니체는 예수에 대해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천재라는 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천재라는 술을 섞는 바텐더에 가까웠다.(57쪽).”는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의 말처럼 니체철학은 히틀러에 의해서 오인된 희생양이다.

 

『히틀러의 철학자』은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철학을 조금이라도 읽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접했을 만한 하이데거, 아렌트, 벤야민, 아도르노 등이 책의 핵심에 등장한다. 역사적 기록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중심의 구성은 소설을 읽는 듯한 편안함을 준다. 그러나 편안한 자세에서도 편안하게 읽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곧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범(戰犯) 처벌에서도 하이데거 사상은 살아남았다. 전쟁 이후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의 축적된 의학은 미국으로 넘어 갔고, 전쟁은 마취학을 비롯해 20세기 지식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철학이 윤리적 기준을 세우지 못하면 어떤 학문이 그러한 기준을 세우겠는가?’

 

저자 이본 셰라트의 문제의식을 우리의 현재로 가져와야 한다. 윤리적 인간으로 진화하기를 거부한다면 인류가 만들어 놓은 문명과 종교가 소용될 일은 악을 평범하게 만드는 일 밖에는 없다. 2014년, 대한민국 국민은 세월 호 사건을 통해서 국가의 부재를 경험했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희생자 가족들과 시민의 요구를 의사자 대우나 세월 호 대학 특례 입학으로 물타기를 하는 현실 또한 답답하기만 하다. 『히틀러의 철학자』을 통해서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지침인 지식과 철학의 진정한 역할에 대하여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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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7월입니다.

지난 달 추천한 고병권 선생님의 '철학자와 하녀' 를 받아들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담백한 글에 담긴 세상과 인간을 향한 진정성이라니요...

맑고 선한 - 동시대의 -  철학자의 정직한 글을 대면하는 기쁨은

정약용과 연암의 글을 읽을 때와 또다른 기쁨을 전해주었습니다.

읽는 내내 좋아서..여러권 구입해서 선물하고 나누기도 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 유목하듯 길 떠날 수도 있으나, 앉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시공초월 여행. 독서보다 더 즐거운 여행은 없을 듯합니다.

신간을 뒤적이다 보니, 역시나 6월 보다는 7월에 쏟아진 책들이 양질에서 풍부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사회는 책읽기 좋은 계절이 가을보다 여름인가 봅니다.

 

『젠더와 사회- 15개의 시선으로 읽는 여성과 남성』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동녘, 2014. 6.

 

 

 

 

 

 

 

 

 

 

 

 

 

 

성에 대한 이해는 자기중심을 벗어나기 어렵다. 퀴어 영화와 책들을 통한 간접 경험이 LGBTQ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지만, 성적 소수자의 입장에 설 수 없는 이성애자의 선입견이 여전하다는 것을 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은 아무리 넓히고 넓혀도 자기중심적일 때가 태반이다. 예를 들어 게이,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는 나에게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또는 제 3자를 이해하는 방식과 나와 체온을 섞고 함께 세월을 만들어 온 사람일 경우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만들어진 성에 관한 국내 연구자 15명이 분석하였다고 하니, 한국적 토양에서 성적 소수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꼭 일독하고 싶은 책이다. 성 소수자 문제는 우리 사회 모든 불평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사회를 말하는 사회 - 한국사회를 읽는 30개 키워드』 김민웅 외 지음, 북바이북, 2014. 6.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가 가진 부조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리트머스지였다.”

책 소개 글이 모든 것을 말하는 듯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참사 속에는 한국 사회 끔찍한 부조리와 모순이 함축되어 있다. 이 사회에 대한 이해와 성찰 없이 다음은 존재할 수 없다. 다양한 이력의 저자들이 풀어내는 한국사회 키워드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나침반과 화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현대 정치철학의 테제들』, 연구모임 사회 비판과 대안 엮음, 사월의책, 2014. 6.

 

 

 

 

 

 

 

 

 

 

 

 

 

 

『현대 정치철학의 테제들』은 사회비판총서 3부작의 완간본이라고 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포스모던 테제들, 그리고 현대 정치철학의 테제들이다. 롤즈의 정의론에 기반한 현대 영미철학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독해야 할 듯하다. 규범적 정치철학의 포문을 연 존 롤즈에서 출발하여 공동체주의자, 자유지상주의자, 실용주의자 등 8명의 사상가를 다룬다. 저자들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명암인 불평등의 문제에 천착해왔다고 한다.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4. 6.

 

 

 

 

 

 

 

 

 

 

 

 

 

 

 

우리나라에서 강준만 교수님처럼 읽고 쓰는 일을 고단하게 하는 분은 없을 것이다. 본인의 모든 에너지를 한국 사회를 이해와 성찰을 제공하는 저작활동에 쓰는 국보급 학자다. 매번 신간이 나올 때마다 추천하지만, 수 년 동안 한번도 신간평가단에서 선정되지 못했다. 어느 때가 위기가 아니었을까만은 2014년 한국 사회는 오래도록 세월호와 함께 기록될 것이기에 이번만큼은 왜 우리가 이렇게 사는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해보고 싶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와 50개의 질문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밑 낯을 드러내고 성찰의 절절한 필요를 주장한다.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 최성만 지음, 길, 2014. 6.

 

 

 

 

 

 

 

 

 

 

 

 

 

 

 

여름휴가를 발터 벤야민과 함께 더없이 의미 있을 듯하다. 그가 파리를 외부자적 시선으로 관찰하였듯이 우리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지 않을까? 책은 크게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어도 읽어도 어려운 벤야민이지만, 그의 생애, 저작, 사상을 통사론적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다. 벤야민을 총체적으로, 텍스트 중심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추천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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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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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생각의 결을 바르게 다듬는 시간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민음사, 2014. 4.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다.”

 

다산 정약용의 평전을 읽는 시간은 나의 마음결을 고르게 하고, 생각의 결을 바르게 다듬는 시간이다. 다산은 75세의 인생을 회고하며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다.”라고 자신의 인생을 결론지었다. 평생을 다산 연구로 보내신 저자 박석무 선생님의 말씀처럼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큰 위인, 현자(賢者)로 대접받는 다산의 인생으로 보면 그의 판단이 옳았다(620쪽)고 생각할 수 있다. 한 평생 세파에 시달렸음에도,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품어낸 대가의 회고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나 모순 덩어리다. 세상은 항상 부조리하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번 생에서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아야 할 꽤 많은 명분이 있을 것이다. 다산의 삶과 철학을 읽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서 어떻게 윤리적 삶을 완성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자문자답 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생각을 정리하고, 불안한 삶을 지정시키기 위해서 상담 관련 책을 읽는 것보다 다산을 읽는 일이 내겐 훨씬 더 유용하다.

 

 

‘실천적’이라는 수식어가 정약용(1762~1836)에게 따라 붙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성정(性情)과 능력을 제대로 인지한 정조(1752~1836)가 없었더라면 다산이 자평했듯 “게으른 천성대로 놀면서(33쪽) 한평생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에 가정법이 있을 수 없지만,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정약용의 삶과 조선후기에 미칠 영향은 어떠했을까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정조와 함께했던 18년의 시간 동안 다산은 문리(文理)뿐 아니라 물리(物理)를 다루는 기술 관료로서 큰 역할을 해냈다. 그 시기 동안 다산은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축조하였다. 최고 권력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아첨하는 간신이 되지 않았다. 다산 없는 정조, 정조 없는 다산(287쪽)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임금에 그 신하였고,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벗이기도 했다. 정조는 다산에 대하여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증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온축이 깊고 넓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17쪽)”라고 평하였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 박석무 선생님께서 다산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이 누군가 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고 하였으나, 독자로서 나는 박석무 선생님 이외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다산을 읽고 해석하고 성찰하면서 서슬퍼런 80년대를 군부통치를 견뎌낼 수 있었으리라. 저자는 다산의 일생을 수학기, 사환기(벼슬하던 시기), 유배기, 정리기(고향 생활)로 나누어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다. 제 3의 객관적 시선에서 나오는 중립이 허구라는 입장에 서서 보면 저자의 다산 편향이 책이 담고 있는 본질을 훼손할 만큼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산의 그 자체도 큰 의미가 있으나, 타락하고 부패한 현실에 대한 고민의 윤리학과 방법론으로 다산을 새롭게 읽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와 다산과의 첫 만남을 주선한 것은 유홍준 선생님이셨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가 불을 지핀 남도 기행은 다산과의 포문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유배지 해남, 강진을 떠도는 거리에서 길벗을 만나서, 18세기 학자를 현재로 불러와 자의적인 해석과 주석을 곁들이며 호기를 부리던 시절이 그립다. 그가 주장하는 토지 제도가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정약용 선생을 급진적 혁명가라고 여겼다. 다산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해주신 유홍준 선생님은 “다산에게 유배란 강요된 안식년”이라고 평하는 혹자들에게 『명작 순례』에서 다음과 같이 쐐기를 박았다. “그의 18년 귀양살이에는 비록 ‘강요된’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해도 감히 ‘안식년’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 정약용 선생에게 ‘안식년’이란 표현은 어마어마한 상징적 폭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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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나는 다산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암 박지원이 함께 떠오른다. 다산이 이성적이고 윤리적 규범의 실천가라면, 연암은 깨뜨릴 수 없는 천진과 해학으로 시대를 통찰한 18세기 학자다. 오래 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며 통곡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 선생님이 재해석한『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웃음과 우정으로 노마드 하는 연암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시대적 조건이 확연하게 다른 이백 여 년을 건너 뛰어 연암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에 감동하며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유머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고수하며 진정한 호모 쿵푸스로 살아간 그가 온몸으로 절절하게 느껴졌다. 연암이 누나가 죽고 난 다음에 누나를 회고하는 글을 읽으면서 그의 성정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세가 기울어 집안 식솔을 거느리고 화전민이 되어 떠나는 매형과 조카들을 보내면서 누나 시집가기 전날 밤을 떠올리는 연암에게서는 학자 이전에 사랑스런 어린 남동생의 모습 이외에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약용 선생이 자신을 키워준 형수가 죽고 쓴 시에서도 이와 같은 성정이 전해진다.

 

시어머니 섬기기 쉽지 않나니 / 계모인 시어머니는 더욱 어렵네

시아버지 섬기기 쉽지 않나니 / 아내 없는 시아버지는 더욱 어렵네

시동생 보살피기 쉽지 않나니 / 어머니 없는 시동생은 더욱 어렵네

이런 모든 일 유감없이 잘했으니 / 이게 바로 형수의 너그러움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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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배교(背敎)가 다산 비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언행일치를 한평생 실천한 다산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배교했을 거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한때 천주교를 사모한 것도 사실이고, 순교한 정약종과 달리 -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를 신앙이 아닌 - 서양의 학문 영역으로 연구하게 된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퇴계의 학설이 옳다고 주장하는 남인이었던 정약용이 율곡의 학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단호히 언급한 것을 볼 때, 거짓된 것을 사실인 것으로 우회하여 피할 성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 해답은 다산이 남긴 오백여 권의 저서와 다산의 삶의 궤적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천주교야 말로 대공지정하고 지극히 진실한 도리(316쪽)”라고 주장하며 순교한 형 정약종, 학문적으로 뜻을 같이했으나, 귀양살이 낸 그리워만 하다 만나지 못하고 사별한 형 정약전에 대한 정약용의 형제지정을 가늠할 길이 없다. 다산은 “골육이 서로 싸워 자기 몸과 이름을 보존한 것과, 순순하게 받아들여 엎어지고 뒤집혀서라도 천륜에 부끄럼 없게 했음이 어찌 같을 것인가. 뒷세상에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319쪽)”고 회고했다. 형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었던 회한과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금 뒷세상에서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다산의 선택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불가항력의 자의적 선택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남긴 무수한 글을 통해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위대한 인물의 등장은 시대에 빚지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 시대의 질적 변화의 지점을 선점한 자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반면 예기치 않은 돌출로 혜성처럼 등장하는 위대한 위인도 있다. 나는 다산이 후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시대보다 너무 빨리 당도한 천재, 그 시대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포섭될 수 없었던 사람이기에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다산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세상의 부패와 부조리를 맞서 자신의 규칙으로 자기 윤리를 실천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다산은 영원한 큰 스승임에 틀림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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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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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3.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피터 한트케

 

무대 장치를 공부하는 제자에게 연락이 왔다. 블로그에 링크한 뮤직비디오가 저작권 침해로 벌금을 내야한다는 것이다. 로펌에서 저작권을 침해한 블로거들을 상대로 한꺼번에 소송을 한 모양이다. 상당한 금액의 예상치 않은 벌금을 내야하는 제자의 심난한 심정도 이해가 되고, 수익을 위해서 스스로 범법 행위를 찾아 나선 브로커 로펌의 상황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블로그를 천천히 들여다보다 보니, 그 아이와 24시간을 함께 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기장처럼, 투명해도 너무 투명한 일상이었다. 블로그만 살펴보아도 그 아이의 의식주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삶의 목적이 광고의 대상이 되는 것인 양,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러난 것만이 존재한다.

 

90년대 후반부터 카페는 안이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바뀌었고, 대형 빌딩도 건물 외벽을 거울로 바꾸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까지 투명해졌다. 가수 박진영의 속옷이 훤히 비치는 ‘비닐’ 의상도 투명 사회 흐름에 한몫했다. 성형수술과 과도한 다이어트도 더 이상 금기거나 감추어야 하는 수치가 아니다. 그 과정을 방송에서 낱낱이 공개하기까지 한다.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격려 받는다. 오히려 성형과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사람을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않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도처에 설치된 CCTV는 어느 날 내가 사라진다 해도 사라지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복구해낼 것이다. 고유성을 가진 나의 성소는 의미도 존재 가치도 없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29쪽). 최대한 눈에 띌 수 있게 전시(展示)할 때 사물과 사물은 가치를 획득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선생님의 신간 『투명사회』는 얇은 책의 물리적 두께와 반비례하는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현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두 개의 키워드, ‘피로’와 ‘투명’으로 니체를 떠올리는 서법(書法)으로 고유한 사유를 펼쳐나간다. (자의식의 선택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는 피로와 투명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세 시간의 장거리 이동 시간에 고속버스에서 펼쳐 읽으며 ‘금방’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도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심장의 요구로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밑줄을 긋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 더 적어서 그냥 읽기만 하였다. 두 편의 논문 분량에 지나지 않는 책이었으나, 가방 안에 가지고 다니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유리 인간’은 인터넷, 스마트폰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결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사적인 이야기로 넘쳐 난다. 현재를 즐기기보다는 과시와 기록을 위해 저장하는 일에 더 몰두한다. 이 또한 21세기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듯도 하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원래 기록을 생명처럼 아는 축적성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를 일이므로. 자기계발의 의지나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할 것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모두에게 ‘투명’할 것을 강요한다. 폭력적인 미시 권력은 개인의 삶을 표출할 것을 호출한다. 자발성에 기초한 디지털 통제사회에서 우리는 누가 더 많이, 더 빨리 노출하는가에서 성취욕, 쾌감, 권력을 맛본다.

 

관계의 최소 거리에서 불투명하기

 

끝없이 쏟아지는 자기계발서의 논리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긍정하고 또 긍정할 것, 주어진 현실을 탓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는 아편을 주입한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 모두 공감하는 ‘투명성’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임을 명확하게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벤덤의 판옵티콘은 18세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 전후좌우에서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진다. 우리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일상다반사가 투명사회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상당수가 동의할 것이다. 2장 ‘디지털의 풍경들’을 읽다 보면 가족, 직장, 친구와의 관계에서 미시권력이 작동되는 여러 모습들이 환등처럼 생각을 밝힌다. 타자를 극복할 수 없는 ‘부정성’과 온전히 알 수 없는 ‘불투명성’을 주장하는 책에서 역설적인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그만큼 긍정과 투명이 주는 피로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부정과 불투명은 서로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관계의 최소 거리다.

 

투명함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전제한다. 상대의 투명함에 대한 답례는 나의 투명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차도 완벽하게 알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다. “완벽하게 안다는 것, 심리를 끝까지 파헤쳤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취해 있지 않았었는데도 술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들고, 인간관계의 활력도 사라진다(17쪽).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내면의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질문의 권리를 비밀의 권리로 제한하는 섬세함과 자제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18쪽). 계속해서 동어반복으로 변주되는 투명사회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공명을 이끌어낸다. 긍정사회 · 전시사회 · 명백사회 · 포로노사회 · 가속사회 · 친밀사회 · 정보사회 · 폭로사회 · 통제사회는 투명사회와 하나로 관통하는 이음동어(異音異音)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전망 좋은 동남향이다. 하루 종일 거실과 모든 방에 빛이 가득하다. 처음 이사 오면서 북향에 있는 죽은 공간이 한 곳도 없다고 행복해했다. 계절이 바뀌면서 깨닫는 것은 사람은 어둠 속에서 먼지 아이로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의 벽장과 다락이 나만의 성소였고,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는 북향의 가장 작은 방 하나가 자궁처럼 편안했던 유년의 시간이 있었다. 어딘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신만의 심적, 물적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은 알게 모르게 신경증에 걸리게 될 것이다. 명확하지 않고 비가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5월이다. 몸과 마음 모두 너무 조금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 자제력을 가지고 침잠(沈潛)하고 싶은 - ‘찬란한 슬픔’의 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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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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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성과 불투명성 - 자기와 타인 배려의 윤리

『투명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3.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피터 한트케

 

무대 장치를 공부하는 제자에게 연락이 왔다. 블로그에 링크한 뮤직비디오가 저작권 침해로 벌금을 내야한다는 것이다. 로펌에서 저작권을 침해한 블로거들을 상대로 한꺼번에 소송을 한 모양이다. 상당한 금액의 예상치 않은 벌금을 내야하는 제자의 심난한 심정도 이해가 되고, 수익을 위해서 스스로 범법 행위를 찾아 나선 브로커 로펌의 상황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블로그를 천천히 들여다보다 보니, 그 아이와 24시간을 함께 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기장처럼, 투명해도 너무 투명한 일상이었다. 블로그만 살펴보아도 그 아이의 의식주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삶의 목적이 광고의 대상이 되는 것인 양,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러난 것만이 존재한다.

 

90년대 후반부터 카페는 안이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바뀌었고, 대형 빌딩도 건물 외벽을 거울로 바꾸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까지 투명해졌다. 가수 박진영의 속옷이 훤히 비치는 ‘비닐’ 의상도 투명 사회 흐름에 한몫했다. 성형수술과 과도한 다이어트도 더 이상 금기거나 감추어야 하는 수치가 아니다. 그 과정을 방송에서 낱낱이 공개하기까지 한다.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격려 받는다. 오히려 성형과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사람을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않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도처에 설치된 CCTV는 어느 날 내가 사라진다 해도 사라지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복구해낼 것이다. 고유성을 가진 나의 성소는 의미도 존재 가치도 없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29쪽). 최대한 눈에 띌 수 있게 전시(展示)할 때 사물과 사물은 가치를 획득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선생님의 신간 『투명사회』는 얇은 책의 물리적 두께와 반비례하는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현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두 개의 키워드, ‘피로’와 ‘투명’으로 니체를 떠올리는 서법(書法)으로 고유한 사유를 펼쳐나간다. (자의식의 선택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는 피로와 투명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세 시간의 장거리 이동 시간에 고속버스에서 펼쳐 읽으며 ‘금방’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도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심장의 요구로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밑줄을 긋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 더 적어서 그냥 읽기만 하였다. 두 편의 논문 분량에 지나지 않는 책이었으나, 가방 안에 가지고 다니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유리 인간’은 인터넷, 스마트폰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결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사적인 이야기로 넘쳐 난다. 현재를 즐기기보다는 과시와 기록을 위해 저장하는 일에 더 몰두한다. 이 또한 21세기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듯도 하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원래 기록을 생명처럼 아는 축적성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를 일이므로. 자기계발의 의지나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할 것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모두에게 ‘투명’할 것을 강요한다. 폭력적인 미시 권력은 개인의 삶을 표출할 것을 호출한다. 자발성에 기초한 디지털 통제사회에서 우리는 누가 더 많이, 더 빨리 노출하는가에서 성취욕, 쾌감, 권력을 맛본다.

 

관계의 최소 거리에서 불투명하기

 

끝없이 쏟아지는 자기계발서의 논리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긍정하고 또 긍정할 것, 주어진 현실을 탓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는 아편을 주입한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 모두 공감하는 ‘투명성’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임을 명확하게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벤덤의 판옵티콘은 18세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 전후좌우에서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진다. 우리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일상다반사가 투명사회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상당수가 동의할 것이다. 2장 ‘디지털의 풍경들’을 읽다 보면 가족, 직장, 친구와의 관계에서 미시권력이 작동되는 여러 모습들이 환등처럼 생각을 밝힌다. 타자를 극복할 수 없는 ‘부정성’과 온전히 알 수 없는 ‘불투명성’을 주장하는 책에서 역설적인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그만큼 긍정과 투명이 주는 피로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부정과 불투명은 서로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관계의 최소 거리다.

 

투명함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전제한다. 상대의 투명함에 대한 답례는 나의 투명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차도 완벽하게 알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다. “완벽하게 안다는 것, 심리를 끝까지 파헤쳤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취해 있지 않았었는데도 술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들고, 인간관계의 활력도 사라진다(17쪽).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내면의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질문의 권리를 비밀의 권리로 제한하는 섬세함과 자제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18쪽). 계속해서 동어반복으로 변주되는 투명사회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공명을 이끌어낸다. 긍정사회 · 전시사회 · 명백사회 · 포로노사회 · 가속사회 · 친밀사회 · 정보사회 · 폭로사회 · 통제사회는 투명사회와 하나로 관통하는 이음동어(異音異音)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전망 좋은 동남향이다. 하루 종일 거실과 모든 방에 빛이 가득하다. 처음 이사 오면서 북향에 있는 죽은 공간이 한 곳도 없다고 행복해했다. 계절이 바뀌면서 깨닫는 것은 사람은 어둠 속에서 먼지 아이로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의 벽장과 다락이 나만의 성소였고,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는 북향의 가장 작은 방 하나가 자궁처럼 편안했던 유년의 시간이 있었다. 어딘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신만의 심적, 물적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은 알게 모르게 신경증에 걸리게 될 것이다. 명확하지 않고 비가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5월이다. 몸과 마음 모두 너무 조금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 자제력을 가지고 침잠(沈潛)하고 싶은 - ‘찬란한 슬픔’의 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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