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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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성과 불투명성 - 자기와 타인 배려의 윤리

『투명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3.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피터 한트케

 

무대 장치를 공부하는 제자에게 연락이 왔다. 블로그에 링크한 뮤직비디오가 저작권 침해로 벌금을 내야한다는 것이다. 로펌에서 저작권을 침해한 블로거들을 상대로 한꺼번에 소송을 한 모양이다. 상당한 금액의 예상치 않은 벌금을 내야하는 제자의 심난한 심정도 이해가 되고, 수익을 위해서 스스로 범법 행위를 찾아 나선 브로커 로펌의 상황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의 블로그를 천천히 들여다보다 보니, 그 아이와 24시간을 함께 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기장처럼, 투명해도 너무 투명한 일상이었다. 블로그만 살펴보아도 그 아이의 의식주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삶의 목적이 광고의 대상이 되는 것인 양,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러난 것만이 존재한다.

 

90년대 후반부터 카페는 안이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바뀌었고, 대형 빌딩도 건물 외벽을 거울로 바꾸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까지 투명해졌다. 가수 박진영의 속옷이 훤히 비치는 ‘비닐’ 의상도 투명 사회 흐름에 한몫했다. 성형수술과 과도한 다이어트도 더 이상 금기거나 감추어야 하는 수치가 아니다. 그 과정을 방송에서 낱낱이 공개하기까지 한다.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격려 받는다. 오히려 성형과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사람을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않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도처에 설치된 CCTV는 어느 날 내가 사라진다 해도 사라지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복구해낼 것이다. 고유성을 가진 나의 성소는 의미도 존재 가치도 없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29쪽). 최대한 눈에 띌 수 있게 전시(展示)할 때 사물과 사물은 가치를 획득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선생님의 신간 『투명사회』는 얇은 책의 물리적 두께와 반비례하는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현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두 개의 키워드, ‘피로’와 ‘투명’으로 니체를 떠올리는 서법(書法)으로 고유한 사유를 펼쳐나간다. (자의식의 선택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는 피로와 투명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세 시간의 장거리 이동 시간에 고속버스에서 펼쳐 읽으며 ‘금방’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도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심장의 요구로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밑줄을 긋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 더 적어서 그냥 읽기만 하였다. 두 편의 논문 분량에 지나지 않는 책이었으나, 가방 안에 가지고 다니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유리 인간’은 인터넷, 스마트폰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결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사적인 이야기로 넘쳐 난다. 현재를 즐기기보다는 과시와 기록을 위해 저장하는 일에 더 몰두한다. 이 또한 21세기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듯도 하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원래 기록을 생명처럼 아는 축적성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를 일이므로. 자기계발의 의지나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할 것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모두에게 ‘투명’할 것을 강요한다. 폭력적인 미시 권력은 개인의 삶을 표출할 것을 호출한다. 자발성에 기초한 디지털 통제사회에서 우리는 누가 더 많이, 더 빨리 노출하는가에서 성취욕, 쾌감, 권력을 맛본다.

 

관계의 최소 거리에서 불투명하기

 

끝없이 쏟아지는 자기계발서의 논리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긍정하고 또 긍정할 것, 주어진 현실을 탓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는 아편을 주입한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 모두 공감하는 ‘투명성’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임을 명확하게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벤덤의 판옵티콘은 18세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 전후좌우에서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진다. 우리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일상다반사가 투명사회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상당수가 동의할 것이다. 2장 ‘디지털의 풍경들’을 읽다 보면 가족, 직장, 친구와의 관계에서 미시권력이 작동되는 여러 모습들이 환등처럼 생각을 밝힌다. 타자를 극복할 수 없는 ‘부정성’과 온전히 알 수 없는 ‘불투명성’을 주장하는 책에서 역설적인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그만큼 긍정과 투명이 주는 피로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부정과 불투명은 서로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관계의 최소 거리다.

 

투명함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전제한다. 상대의 투명함에 대한 답례는 나의 투명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차도 완벽하게 알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다. “완벽하게 안다는 것, 심리를 끝까지 파헤쳤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취해 있지 않았었는데도 술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들고, 인간관계의 활력도 사라진다(17쪽).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내면의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질문의 권리를 비밀의 권리로 제한하는 섬세함과 자제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18쪽). 계속해서 동어반복으로 변주되는 투명사회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공명을 이끌어낸다. 긍정사회 · 전시사회 · 명백사회 · 포로노사회 · 가속사회 · 친밀사회 · 정보사회 · 폭로사회 · 통제사회는 투명사회와 하나로 관통하는 이음동어(異音異音)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전망 좋은 동남향이다. 하루 종일 거실과 모든 방에 빛이 가득하다. 처음 이사 오면서 북향에 있는 죽은 공간이 한 곳도 없다고 행복해했다. 계절이 바뀌면서 깨닫는 것은 사람은 어둠 속에서 먼지 아이로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의 벽장과 다락이 나만의 성소였고,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는 북향의 가장 작은 방 하나가 자궁처럼 편안했던 유년의 시간이 있었다. 어딘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신만의 심적, 물적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은 알게 모르게 신경증에 걸리게 될 것이다. 명확하지 않고 비가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5월이다. 몸과 마음 모두 너무 조금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 자제력을 가지고 침잠(沈潛)하고 싶은 - ‘찬란한 슬픔’의 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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