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호마윤 에르사디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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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디’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있다.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군대였다는 이 남자의 시선은 황량한 거리에서 누군가를 찾는다. 그는 자신의 사후(死後)를 마무리해줄 ‘인간적인 만남’을 위해서 길을 나섰다. 부탁을 들어줄 법도 한 앳된 얼굴의 군인,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것 같은 젊은 신학도는 죽음의 언급을 단호하게 외면한다. 그는 일몰까지 자신을 도와 줄 적임자를 물색하며 흙, 돌, 먼지로 뒤덮인 사막 이곳저곳을 누비며 돌아다닌다.

 

다행히 마지막에 만난 단 한사람, 자연사 박물관의 박제사로 일하는 노인만이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때를 맞추어 당도한 신(神)의 메신저와 같은 노인은 한때 자살의 문턱을 넘을 뻔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노인은 에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여 바디와 긴 이야기를 나눈다. 신(神)과의 대화는 영성을 넘어 인간을 통하여 드러난다. 노인의 이야기는 세상을 주관하는 절대자가 삶에 지친 인간에게 건내는 나지막한 말씀처럼 공명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 펼쳐지는 삶의 작은 기쁨들은 사소하지만 포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밤이 오자 바디는 수면제를 먹고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 눕는다. 조금은 긴장된 그의 얼굴 위로 푸른 달빛이 비추더니, 어느새 폭우가 쏟아진다. 어둠 사이 번갯불이 바디의 얼굴을 드러낸다.

 

페르시아 문화의 소산인 <체리향기>는 유럽 작가주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플롯을 파괴한다. 짜여진 플롯에 따르다 보면 현실세계나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데 제약을 받기 때문에, 문제의 발생에서 해결로 이어지는 네러티브를 단호히 거부한다. 감독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화려한 세트, 각종 특수 효과, 컴퓨터 그래픽 사용을 일체 배제하고, 삶에 내재한 본질을 능숙하게 꺼내 놓는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철저하게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다. 자동차에 고정된 두 대의 카메라로 사물과 풍경을 응시하는 이 영화의 프레임 구성은 대부분 클로즈업된 바디의 얼굴과 주변에 퍼지는 먼지가 다일뿐이다.

 

영화 종반부에서는 암전을 이용하여 프레임의 서사를 모두 허구로 만들어버린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에서 영화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의 메타적 접근이다. 또한 카메라가 고정된 롱 테이크 촬영은 지루한 현실을 고스란히 영상에 담아 놓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촬영 내내 랜드로버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기를 바랬고, 바디가 보는 그대로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바디의 자살하려는 의도를 끝까지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바디가 되어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받는다. 그런 면에서 <체리향기>는 관객이 채워야 할 여백이 많은 영화다. 이것이 키아로스타미식 영화적 화법의 특징으로 해답과 결론을 드러내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감독이 해야 할 일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언급하였듯이 관객이 각자의 답을 찾아서 헤매기를 원한다. 그는 프랑스와 트뤼포의 말을 인용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으면 차라리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고 주장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을 북돋워주는 것으로 만족하다고 역설한다.

 

<체리향기>는 1994년 <올리브 나무 사이로> 이후 3년여의 공백기 만에 발표한 작품이며, 키아로스타미가 직접 제작까지 맡은 첫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이란 정부의 출국금지 조치 상태였다가 97년 깐느 영화제 폐막 삼일 전에야 출품되어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서구 평론가들의 말처럼, 서정이 불가능할 것 같은 지역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시네마 베리떼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여전히 새로운 경지에서 ‘마음의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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