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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11월, 비, 6호선의 지하철 사우스브롱크스 역 앞의 붐비는 맥도날드,
이런 아침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흔치 않은 일이다.
골목파티같은 이곳, 학교를 빼먹은 멍한 여덟 살배기들, 고함 지르기에 지친 미혼모들, 테이블마다 따분한 실직자들,
아침이 가득하다.
모두가 함께다.
공동 경험, 이 날, 이 삶.
하지만 그녀의 삶은 아니다.
그녀는 이 삶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 삶을 원치 않는다. 대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아침 특선 메뉴가 적힌 커다란 간판을 쳐다본다. 그곳에는 신비함이 있다.
재미교포 작가 수키 김의 <통역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강렬한 빨간색 표지, 한켠에 옛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경직된 모습만으로도 눈길을 끈다.
1970년대와 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너도나도 떠났던 미국 이민의 행렬,
한인 이민 가정의 스산하고 고된 풍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절절하게 드러낸 소설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미국으로 간 사람들이 열에 들떠서 흘리던, 달콤하고 풍요롭다는 미국 생활은 지옥같은 현실을 꿈으로 바꾸고 싶던 일말의 욕망이었을까?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고, 진한 우유를 먹는다고, 육질 좋은 고기를 먹는다고...
물질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을 채우기 위해...
여기 수지 박이라는 한 여자가 있다.
스물 아홉의 통역사.
장장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황량하고 복잡한 히스토리를 가진 그녀의 연대기가
하나하나 풀어지면서 80년대 미국 한인들의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깊은 외로움을 갖게 된 그녀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림처럼 비춰진다.
오랜만에 무척 재미있고 훌륭한 소설을 만났다.
수키 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뱀다리: 미쉘 공드리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등장했던 '몬탁'이 이 작품에도 등장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한겨울의 몬탁 바닷가.
뼈속까지 사무치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느끼고 싶다면
이 곳은 정말 적절한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