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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시작으로, <호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랑은 왜>에 이르기까지 김영하의 소설들은 그가 실로 우리 시대의 걸출한 입담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김영하가 <검은 꽃>이라는 알듯 모를듯한 제목으로 새 작품을 냈다기에 얼른 읽어보았다.
김영하의 이 신작은 놀랍게도 지난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멕시코의 에네켄, 즉 '애니깽' 농장의 한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검은 꽃>를 읽으면서 내내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습하고 끈적거리는 정글의 어둠이었다. 조선을 떠나 멕시코로 향하는 선실 속의 아귀다툼과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서 벌어지는 등장인물들의 처참한 상황들, 그리고 중남미의 정글을 헤매다 사라져간 김이정의 일대기까지 이 소설에는 어둠의 심장 속에서 포복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이 소설은 장돌뱅이와 군인, 사제, 도둑과 박수무당, 내시와 황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멕시코 이민의 험난한 정착 과정을 묘사하면서 역사와 개인의 만남을 진지하게 모색한다. 어둠의 한 가운데 피어나는 꽃이 <검은 꽃>일까? 자신에게 주어졌던 지독한 여정을 마치고 영면한 이들에게 헌정하는 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