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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지음, 정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평점 :
이언 맥과이어는 수를 보여주면서 교묘했다.
1851년 작 허만 멜빌《모비 딕》의 후예임을 자처하듯 《얼어붙은 바다》가 펼쳐지는 시대는 1859년이다. 《모비 딕》의 주인공 이슈메일이 우울과 폭력성을 잠재우기 위해 ‘권총과 총알’ 대신 바다를 택했던 것처럼 《얼어붙은 바다》의 두 주인공 패트릭 섬너와 헨리 드랙스도 바다로 향한다. 이 두 주인공에게는 《모비 딕》의 인물들 특성이 고루 배합되어 있다. 외다리인 에이허브 선장의 특징과 삶에 회의적이지만 야만인 퀴퀘그와 우정을 나눌 줄 알았던 인간적인 이슈메일을 절묘하게 섞은 절름발이 패트릭 섬너, 이슈메일처럼 섬너도 포경선을 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기만의 삶의 법칙으로 사는 야만인 프로 작살수 퀴퀘그를 더 잔인하게 변형한 헨리 드랙스. 이 외에도 두 작품에서 겹치는 인물과 설정이 꽤 많다. 뱃사람치고 이상하게 양심적이고 자연계에 깊은 경외감을 가지고 있어 거친 바다에서의 쓸쓸한 생활 속에 미신에 경도되어 있던 일등항해사 ‘스타벅’(《모비 딕》)은 《얼어붙은 바다》의 작살수 오토와 닮았다. 피쿼드호에서 선원들의 장난과 유흥거리 취급받던 흑인 소년 ‘핍’이 바다에 빠져 죽는 첫 주검이었듯 드랙스에게 성폭행과 살해당한 소년 ‘조지프’는 볼런티어호의 첫 주검이었다. 《모비 딕》을 안 읽은 사람이라면 안 읽은 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읽은 대로 유사함과 차이를 느끼며 《얼어붙은 바다》를 따라가게 된다. 책 속에서 펼쳐지는 추적과 같은 이 책의 매력은 무엇인지 한참 생각했다.
실감 나는 고래잡이 현장을 압도하는 에이허브 선장의 모비 딕을 쫓는 기이한 집념이 《모비딕》 전체를 꿰뚫고 있었듯 《얼어붙은 바다》는 많은 포획으로 멸종되어 가는 고래와 함께 사양길에 접어든 포경 산업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러 인간 군상의 욕망과 남루한 밑바닥을 끝까지 쫓는다. 에이허브 선장이 모비딕에 대한 복수와 집착을 숨기면서도 드러내며 선원들을 착취하고 모두의 파멸을 자초했듯이 《얼어붙은 바다》의 인물들도 하나같이 그렇다. 보험 사기로 배를 침몰시킬 작당을 한 선주 백스터와 브라운리 선장은 각각 예상외의 실패와 어이없는 죽음을 겪는다. 그들의 음모 때문에 북극 빙하 속에 갇힌 선원들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살기 위한 협력을 저울질하며 악전고투한다. 섬너는 다리 부상을 입게 된 인도 전투에서 이미 이런 상황을 겪었다. 상관의 지시로 부대를 이탈해 보물을 찾아 나섰다가 동료들이 모두 죽고 자신만 살아왔는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연금도 못 받고 쫓겨났고 방황하다 아편 중독까지 되었다. 그는 전장에서 자신을 구해준 소년을 구해주지 못했듯 볼런티어호 사환 소년 조지프도 구해주지 못한다. 뭍에서도 물에서도 여린 존재들은 살아남기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 헨리 드랙스와 패트릭 섬너의 대결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다. 정도와 상대가 다를 뿐 그들도 이용할 수 있다면 최대한 이용하는 자들이다. 드랙스와 섬너의 중요한 차이는 나만 살아남겠다는 이기심의 정도 차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유유자적 배의 주치의 역할만 하려 했던 섬너는 약품을 몰래 취하긴 했지만 의료 행위까지 허투루 하진 않았다. 조지프의 심각한 상태를 보고 사태를 바로잡으려 노력도 했다. 인도 전투에서의 트라우마와 죄책감이 영향을 미쳤다 해도 피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지 않았다. 불명예제대를 하게 된 원인이자 기념품인 반지를 조난 당한 상황에서 모두를 위한 식량과 교환하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과 신념이 다르지만 그를 돌봐준 성직자를 수술할 때도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임했다. 고난과 시련을 스스로 자초했다 생각하면서도, 무슨 의미가 있어서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상 그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돈이나 명예 같은 것들이 아니라 주어진 삶 자체에.《모비 딕》에서 이슈메일이 유일한 생존자였듯 《얼어붙은 바다》에서 섬너가 최후로 살아남은 이유는 그들이 매우 운 좋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파도를 타듯 살았던 그들 삶의 기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섬너가 탈출 끝에 만난 동물원 북극곰처럼 운도 어느 순간 다할지 모른다. 그는 사는 내내 도망 다녀야 할 악조건과 운명에 처해 있지 않은가. 《모비 딕》의 ‘이슈메일’ 이름은 구약성서 「창세기」 16장에 나오는 이스마엘에서 유래한다. 이스라엘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하녀 하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집에서 쫓아낸 인물이다. 그래서 ‘방랑자’, ‘세상에서 추방당한 자’라는 뜻을 지녔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도 ‘이슈메일’ 이름의 뜻을 나눠가진 자들이다. 삶의 파도와 작살은 계속 날아들 것이고 배신의 모습이든 죽음의 모습이든 결국 우린 잡힐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려움과 고독과 결핍을 이겨낼 의지를 끝없이 살려내야 한다. 모든 바다가 얼어붙기 전에. 모든 바다가 얼어붙더라도. 결국 패트릭 섬너를 거듭 살려냈던 건 운을 부르는 그러한 의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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