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KBS 대선 토론을 보며 다들 침통했을 거라 생각한다.
물고 뜯기 바쁜 추악한 모습, 깊은 철학이 부재한 말들. 스탠딩 토론은 뭐하러 한 건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 말에서 세계를 읽는 통찰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국민이 동참할 만한 허구의 능력을 보여 줬는지... 다들 형편없었다. 투덜댐, 비난과 비웃기, 꼬투리 잡기, 딴 말 하기, 덮어 씌우기, 우물쭈물 넘어가기.... 나는 억지로 앉혀진 극장에서 저열한 코미디를 보듯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제대로 된 대선 토론은 언제 볼 수 있는 건지... 말이 안 통하면 다 오합지졸처럼 되는 건지. 이 수준은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건지.
˝철학은 세계를 단지 다르게 해석했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카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마르크스가 메모에서 밑줄을 그어 강조한 두 낱말 ‘해석‘과 ‘변혁‘은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이다.
마르크스 역시 세계에 대한 해석 없이는 그 어떤 사회 변화와 혁명적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지구 상에서 호모사피엔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은 ˝허구를 창작할 수 있는 능력˝(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이지 않은가.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성공적으로 협력하여 역사를 만들려면 세계를 해석하는 허구가 필요하다. 역사의 주체에 대한 마르크스의 의심은 일견 ‘해석인가 아니면 변혁인가‘로 서술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허구인가‘라는 문제로 압축된다.
ㅡ 이진우 《의심의 철학》 p 19~24
서로 "적폐"니 "주적"이니 부르며 '변혁' 혹은 '혁명'을 말하는 건 얼마나 낡은 수사(修辭)이며 접근인지.
정권이 바뀐다 해도 우리가 공통의 허구 힘으로 멀리 나아갈 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