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이었다. 오늘 만난 모든 것이 체《도덕의 계보》와 연결되던 것이.
이보 반 호프 《파운틴헤드》연극을 보러 가기 위해 서 있던 자리에서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을 봤을 때는 그저 반가웠다. 그러나 4시간이 넘는 긴 공연을 본 뒤엔 ‘질투‘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그 ‘질투‘는 가치를 창조하는 '주인 도덕'에 이르지 못한 좌절이었을까, 권력, 명예, 돈, 쾌락을 좇았던 '노예 도덕'의 한탄이었을까.

 

 

 



 

《파운틴헤드》는 소설가이자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이자 철학자인 아인 랜드(Ayn Rand)가 1943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아인 랜드는 러시아의 집산주의에 반대되는 미국의 개인주의에 매료되어 미국으로 도미했다. 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그라드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빅토르 위고, 프리드리히 실러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조합만 봐도 이것저것 추측된다. 가치 추구, 개인성, 현실 전복성 등등.

이 작품은 니체가 말한 ‘주인 도덕‘을 추구하는 자와 ‘노예 도덕‘을 쫓는 자의 대결이라 볼 수 있다.


남녀 주인공은 각각 다르게 자신의 ‘주인 도덕‘을 성취하려는 이들이다.
예술적 전통과 관례에 타협하길 거부하며 새로운 건축을 탄생시키려는 천재 건축가 하워드 로크.
근대 건축의 거장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를 모델로 했다고 하는데, 극 중에서 그의 유명한 작품 '낙수장(Fallingwater)'을 연상케 하는 설계 그리는 장면이 나온다.


하워드 로크가 이성 중심이라면 여주인공은 정신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도미니크 프랭컨은 저명하지만 속물인 건축가의 딸이면서 모두에게 환영받는 미모의 여성이고 건축 칼럼을 쓰는 지성인이다. 열정과 이상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는 것에 좌절해 극단적인 자기 파괴 방식을 택한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 몸을 허락해 경멸을 표현하는 식이지만 단순하지 않다. 도미니크 프랭컨은 채석장 인부로 일하던 하워드 로크에게 강간당한 뒤 마조히즘적 쾌락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후 하워드 로크의 예술적 신념을 알게 되고 지지하며 사랑하지만 사랑의 방식은 매우 특이하다. 로크와 세계가 공존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녀는 철저히 행복을 거부한다. 겉으로는 하워드 로크를 공격하면서 마음으로는 열렬히 사랑하며, 다른 사람과의 결혼으로 하워드 워크에 종속되지 않으려 하는 것 등.

한편 이들과 대조되는 ‘노예 도덕‘의 인물들은 이렇다.
로크를 시기하지만 그 능력과 조언에 힘입어 인정받는 건축가가 된 피터 키팅은 외부의 인정으로 자아를 충족하려는 대표적 인물이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와이낸드는 대중의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문과 잡지를 발행해 부를 획득했지만 삶의 공허함에 빠져 있다. 건축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 엘스워스 투히는 이타주의를 표방하며 봉사와 희생을 강조하지만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만끽하는 자이다. 로크와 가장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로크가 세상을 바꾸는 창조적 소수라면 투히는 세상에 군림하려는 권력형 소수이다.  

이 작품에서 평균적인 모범(?)을 보여준 인물은 캐서린 핼시이다. 내내 피터 키팅에 끌려다니다 키팅 도미니크 프랭컨과 결혼해 배신의 상처를 받는다거나, 삼촌 엘스워스 투히에 경도되어 사회 복지사 일을 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이 준 연민과 봉사만큼 감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지적한 노예 도덕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 없이 자립적인 생활을 꾸려나가는 여성으로 바뀐다. 창조자까지는 못 가더라도 대중의 양 떼까지는 되지 않으려는 정도라고 할까.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하워드 로크가 공공임대주택으로 디자인한 코틀랜드 주택을 폭파하는 이야기다. 연극에서 이 장면은 압권이었는데 말로 전달하기 어렵다. 순간 건물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ㄱㅎ); 그가 완벽하게 설계한 대로 진행되지 않고 이리저리 편의에 따라 건축이 변형되는 것을 막고자 벌인 일이다. 이 폭파 사건에 대해 엘스워드 투히는 이기주의에 빠진 반사회적인 범죄자의 소행으로 몰고 간다. 하워드 로크와 친구가 된 게일 와이낸드가 황색 저널의 모습을 버리고 처음으로 진실을 위해 로크를 변호하는 기사들을 내놓지만 여론과 주주들은 공공의 이익을 해한 로크에게 어떠한 선처도 해줄 용의가 없다. 자신이 대중의 주인이라 여겼던 와이낸드는 씁쓸해하며 구명을 포기한다. 로크에 대한 투히나 대중의 분노는 결국 자신들에게 지배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응징이자 보복이다.

 

 킹 비더 감독, 아인랜드 각본 《파운틴헤드》(1949) 영화 제작 컷

게리 쿠퍼(하워드 로크 역)와 아인 랜드


작가 아인 랜드의 철학적 기조 ‘객관주의(Objectivism)‘는 ˝이성이 직관과 본능, 선험적 지식보다 우선시되는 입장으로, 윤리적으로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기중심주의)를, 정치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한다. 이타주의나 희생, 평등과 같은 전통적 미덕에 대한 무시, 엘리트주의라고 비난받는 지점은 니체 《도덕의 계보》와 위버멘쉬(자신의 삶을 부단히 극복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결단하는 존재)가 호도되어 비난받던 상황과 아주 흡사하다. 아인 랜드의 ‘객관주의‘ 와 하워드 로크라는 캐릭터는 섬세하게 해석해야 한다. 전통을 답습하며 다른 것은 허용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저항이자, 타인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거나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수단이 되지 않겠다는 결단의 뜻이 담겨 있다.
재판에서 최종 변론을 하는 로크는 불을 처음 발견해 전한 자, 바퀴를 만든 자,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든 자들도 처음부터 환영받진 않았다고 말하며ㅡ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선악의 저편》(1886),《도덕의 계보》(1887)도 당시 혹평 세례를 받고 독자에게 외면당했지ㅡ 창조자로서 자신이 만든 가치를 보호하고 파괴할 권리, 강제를 거부하는 자유를 강조한다.


돌아와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을 다시 떠올린다. 로크가 예술적 전통과 관례에 반한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존경하던 건축가 헨리 캐머런을 찾아갔을 때 캐머런이 한 말도. ˝사람들이 모자를 쓰고, 가방을 들고 다니지만 그들의 본모습은 아니지. 그들의 마음속에는 열정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네.˝ ˝자네가 무릎을 꿇을 정도로 기적의 건축을 상상해 냈다 해도 자네에게 돌아오는 건 그 건은 더 적합하게 맞춰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는 소리일 걸세. 그걸 견딜 수 있겠나˝

외부를 향한 질투가 아닌 외부로 발산되는 열정을 잃지 말 것. 강제된 자유, 허락된 자유, 생각할 수 있는 만큼의 자유에 머물지 않기 위해 나는 노력할 것이다. 사실 그 외에 내가 꿈꿀 수 있는 것도 없다.





ps.
1. 제일 싼 좌석인 3층에서 봤는데, 무대 세트 설치 때문에 시야 장애가 발생해 관람료를 100%로 환불받고 무료로 관람했다. 이런 좋은 공연을! LGArts 사랑합니다ㅜㅜ!
2. 이보 반 호프 다음 예정작은 이탈리아 거장 감독 루치노 비스콘티의 영화가 원작인 강박관념》 주드 로와 함께 초연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엔 언제 오려나. 이보 반 호프가 존 카사베츠 영화 오프닝나이트》 연극으로 만든 것도 인상적이어서 그 작품도 당연히 기대된다.
3. 1500페이지에 달하는 아인 랜드 《파운틴헤드》1.2 원작 소설을 나는 언제 다 볼라나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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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4-01 0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좋은 연극을 보셨군요.. 요즘 ‘연극‘이라는 형식이 블록버스터로 대표되는 ‘영화‘보다 ‘메세지의 전달‘면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많은 CG 에서 현란한 볼거리를 쫓아가다보면 이후 내용정리가 쉽지 않은데, 연극은 그런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연극과 영화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요.^^: 아직 니체는 읽지 못했는데, 니체를 읽을 때 Agalma님의 리뷰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그 전에 그리스 비극을 읽어야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할 선행학습이겠지요?ㅋ

AgalmA 2017-04-03 22:08   좋아요 1 | URL
이보 반 호프 연출가가 연극을 중요하게 보는 지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메시지를 주면서 관객이 능동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연극의 힘. 연극은 일회성으로 휘발되기 때문에 관객의 사유가 더 중요해지죠. 이보 반 호프는 참 대단한 연출가입니다.
관람할 때 스케치도 금지하는 건 좀 너무 했지만ㅎ;;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킬로스...읽자고 들면 그리스 비극 양이 방대하죠ㅎ;

겨울호랑이 2017-04-04 09:08   좋아요 1 | URL
ㅋㅋ 이런 공연 중 사진을 금지해서 대신 스케치를 시도하셨군요..Agalma님도 대단하지만, 스케치를 막는 분들도 상당하군요..ㅋ

AgalmA 2017-04-04 14:12   좋아요 1 | URL
지난번에 피나 바우쉬 공연에서 내가 스케치 많이 했다는 글을 관계자가 읽은 거 아냐 뜨끔했다는 거 아닙니까ㅋㅋ
이보 반 호프는 무대설정도 엄청 특이해서 이해는 합니다만... 저작권도 이 정도까지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무대 위를 열심히 그리던 예전 화가들 지금 시대라면 작품활동 하기 엄청 힘들었을 듯ㅎ

해피북 2017-04-01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연극이라고는 ‘보잉보잉‘이라는 코믹물로 무대장치가 특별하진 않고 주로 가정집이 배경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아갈마님이 보신 연극은 어떻게 연출 되었을지 특히 폭파장면까지 연출되어서 건물이 무너지는줄 알았다던 이야기가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ㅎ 영화를 보는 듯 생생했을거 같은데 스케일이 큰 연극은 재미나 감동도 클 듯하네요^~^

AgalmA 2017-04-03 22:11   좋아요 0 | URL
요즘 공연들은 스펙타클한 볼거리가 많아 매 공연 기대하게 됩니다. 다양한 컨텐츠들(영화, 뮤지컬, 각종 인테넷 동영상) 때문에도 힘든데 이런 규모로 재편되는 연극까지 있으니 소극장 공연들은 상대적으로 더 어렵게 되었죠...

cyrus 2017-04-01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인 랜드의 <마천루>는 복간될 수 있을까요? 작년에 대구 알라딘 매장에 <마천루> 1권이 있었어요. 사고 싶었는데 안 샀어요. 왜냐하면 <마천루> 2권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

AgalmA 2017-04-03 22:14   좋아요 0 | URL
ㅎㅎ 저희 관내 도서관에 아인 랜드 소설이 없어서 제가 <파운트헤드> 희망도서 신청한 지경^^ 인지도가 많이 없어서 복간은 어려울 걸요.
전 1권 못 사고 2권만 구입한 중고도서가 있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