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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서문에서 유발 하라리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라는 메시지를 통해 한국인 뿐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해당할 중요한 말을 했다. 어디서나 올림머리에 공을 들이며 수사망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현재의 박근혜 씨에게 더 잘 들릴 말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
불을 다스릴 줄 알게 되면서 인간은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올랐다.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지식의 나무 돌연변이‘)가 사피엔스 뇌의 배선을 바꿔 인간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인지혁명'이라 부른다. 전설, 신화, 신, 예술 같은 허구를 말할 수 있게 되었고('상상의 질서' 창조) 기술과 조직 방법을 터득해 집단 문화(종교, 정치 체제, 교역, 사법 체계)를 강화해 나갔다.
흥미롭게도 농업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더 잘 먹고살기 위한 인간의 궁리는 비슷했던 모양이다. 불규칙한 먹거리 생활인 수렵채집보다는 안정적인 먹거리 생활인 농업을 선택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삶이 더 나아지겠지' 이건 산업 혁명 시대나 자본주의 시대나 다들 생각하던 바 아닌가. 요즘은 개천 용 승천설이 퇴색되긴 했지만. 오, 인간이여. 그런데 혜택도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빼앗은 잉여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성채, 기념물과 사원을 지었다.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예술가, 사색가......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중략)
역사상의 전쟁과 혁명 대부분은 식량부족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의 선봉에 선 것은 굶주린 농부가 아니라 부유한 법률가들이었다.
(중략)
인간의 협력망은 대부분 압제와 착취에 적합하도록 맞춰져 있었다.
ㅡ<제 2부 농업혁명> 중
자유, 평등, 행복을 우리는 알고 있고 추구해야 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우리가 만든 '상상의 질서' 이며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내가 '신'을 믿고 싶다면 바로 신자가, '돈'을 따른다면 바로 자본주의 신자가 될 수 있다. 원한다면 둘 다 그보다 더 많은 것도 될 수 있다. 아주 쉽지 않은가. 고통과 책임은 뒷일이다.
거의 모든 농경과 산업 사회에서 가부장제가 표준이었고 그래서 보편적이었다. 유발 하라리는 남성의 근력, 폭력성, 조직력, 유전자 등의 요인들을 고찰해보며 여성보다 나은 특별한 요인은 아니라고 말하며 가부장제에 대한 속 시원한 분석을 내놓지 못했다. 현재 들끓고 있는 페미니즘을 생각해 본다. 여성이 사회에 많이 진출해 기반이 넓어진 것이 중요한 변곡점일 것이다. 더 많은 분야에 확고하게 자리매김한다면 대놓고 남성 우월 어쩌고 소린 못할 거다. 기술 발달로 지능, 외모, 성별 거의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시대가 올 텐데 끝까지 남는 건 그것들을 획득하느냐 못 하느냐의 권력 투쟁일 거다. 결국 남녀 대결의 이 문제는 계급 투쟁과 흡사하다. 동물들을 거리낌 없이 가축이나 실험재료로 쓰고,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내고, 흑인을 노예로 착취하며, 타 종족을 정복이나 계도의 대상으로 본 인간의 '지배심리' 가 가장 위험한 요인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럴싸한 말로 바꾸면 ‘생산적인 경쟁심리‘, ‘권력욕‘ 이겠지만, 이겨서 더 얻어서 그토록 행복한가? 또다시 밀려오는 허기와 갈망은 없으시고? '자본'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면서. ‘국민과 소비 공동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뭐 그런 건가.
인간 대 인간으로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자신을 낮추고 복종하는 대표적 두 가지가 있다. ˝신 중심의 종교와 자연법칙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신 없는 이데올로기(인본주의)˝다. 둘 다 공통적 속성은 신념이다. 이 '상상의 질서' 속에서 우리는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다는 기치 아래 인본주의 바탕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와 과학은 한 쌍의 바퀴로 굴러왔다. 과학혁명으로 유럽인들이 세계를 제패한 광경이 책에 다이내믹하게 펼쳐지니 읽어 보시길. 행복은 개뿔, 여기서도 '권력'과 '정복'이 주요 키워드다.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공학과 사이보그공학까지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신의 자리까지 멀지 않았다. 환경파괴, 생명존중은 효용성 앞에 늘 무력해진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기술로 자멸할지 새로운 종이 탄생할지 우린 모른다.
이즈음에서 유발 하라리가 좋은 질문을 담은 거울 하나를 보여 줬는데, 나는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이 페이지 때문에 이 책에 별 5개 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 거울을 당신에게도 보여주며 이 리뷰를 끝낸다.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ㅡ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ㅡ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채집인이나 중세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고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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