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름난 평론가가 발터 벤야민은 비유를 쓰지 않고 훌륭한 문장을 만드는 철학자라는 말을 수업에서 버젓이 하는 걸 듣고 나는 놀랐습니다. 어느 이름난 시인이 이상은 초현실주의나 상징주의 사상 공부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수준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걸 듣고 나는 놀랐습니다. 그들의 지나친 추종과 동종에 있음으로 인한 폄하에 나는 침묵했습니다. 바꿀 용기보다 바꿀 수 없는 결과를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으므로 그토록 당당히 말했겠지요. 나는 그들(평론가, 시인)의 책을 아직 다 팔지 못 했습니다. 안 팔리고 있는 게 더 복수에 가까운 걸까요. 이따금 생각합니다. 그 평론가에게 발터 벤야민《베를린의 어린 시절》,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에 가득한 비유를 설명해 보시라고 재촉해 볼 걸 그랬나. 그 시인에게 이상이 쓴 수필 <산촌여정>이나 <권태>는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그의 수필들을 지배하는 ‘공포와 영원의 초록‘도 대단한 발견이 아니겠지요? 물어볼 걸 그랬나. 그들이 그런 생각을 글로 남기는 자작자장(自作自藏:스스로 짓고 스스로 보관)이나 하지 않길 바랍니다. 보고도 모르는 걸 당신들은 모릅니다. 노여워 마세요. 내게도 매일 하는 소립니다.
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시켜라. 그것은 발명보다 발견! 거기에도 노력은 필요하다. ㅡ 이상
얼마전 현재 한양공대 야간부에 재학 중인 이연복 군이 낡은 노오트 한 권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이 군은 초면이었으나 그가 문학청년이며 특히 이상을 좋아하고 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보이는 노오트는 이상의 일본어시작 습작장임이 곧 짐작되었다. 그 노오트를 이 군이 발견하게 된 것은 그의 친구인 가구상을 하는 김종선 군의 집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서 그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김종선 군의 백씨가 친지인 고서점에서 휴지로 얻어온 그 노오트는 그 집에서 그야말로 휴지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서 백 면 내외의 노오트가 이미 십분지구(十分之九)쯤 파손되고 십분지일(十分之一)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ㅡ조연현, 「이상의 미발표유고의 발견」,『현대문학』,1960. 11
이상의 작품이라는 걸 모르고 휴지로 사용한 사람도 있었고, 이상의 작품을 발견하고 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해석도 발견 이후에 가능합니다.《이상 전집 2》에 실린 수필과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 수필을 비교해보니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 가 미발표 원고, 원문, 해설, 주석 등을 더 잘 챙겼다 생각합니다. ˝레몬 향기를 맡고 싶다˝는 이상의 유언이었습니다. 이상이 실험시 <오감도>로 신문 연재를 중단 당하고 정신병자 소릴 들을 때 이태준 선생과 박태원 선생이 이상을 지지해 준 건 그에게 무척 힘이 되어 줬지요. 《문장 강화》에서 이태준 선생이 이상 수필을 여럿 인용하며 설명할 만큼 명문이므로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이 읽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 책에서 좋은 문장은 부사, 형용사를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죠. 그런 말을 할 때는 '잘 쓰지 못할 때' 쓰지 말라는 수식을 꼭 덧붙여 주세요. 잘 쓰면 어찌 되는지 다음을 보시죠.
하현달이다. 굳이 나는 아름답다고 본다.
개들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마구 야위어 갔다.
ㅡ 이상 <첫번째 방랑> 中 『문학사상』, 1976, 7
이상의 삶이나 문장을 보며 자꾸만 한 인물이 생각났습니다.
이상은 태어나자마자 백부에게 입양되었다가 백부가 사망한 뒤 23살에 극도로 가난한 친가로 돌아왔는데 그때 그의 혼란스러움을 생각해보십시오. 수필 <조춘점묘>, <슬픈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건만 나는 돈을 벌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버나요, 못 법니다. 못 법니다.
동무도 없어졌습니다. 내게는 어른도 없습니다. 버릇도 없습니다. 뚝심도 없습니다. 손이 내 뺨을 만집니다. 남의 손같이 차디차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이렇게 야위었는데.' 모체가 망하려 드는 기색을 알아차렸나 봅니다. 이내 위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얼 하나ㅡ속절없지ㅡ내 마음은 벌써 내 마음의 최후의 재산이던 기사記事들까지도 몰래 다 내다버렸습니다. 약 한 봉지와 물 한 보시기가 남아 있습니다. 어느 날이고 밤 깊이 너희들이 잠든 틈을 타서 살짝 망하리라 그 생각이 하나 적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는 고하지 않고 우리 친구들께는 전화 걸지 않고 기아棄兒하듯이 망하렵니다.
ㅡ 이상 <슬픈 이야기 - 어떤 두 주일 동안> 中 『조광』, 1937, 6
이후 황해도 백천 온천에 요양 갔을 때 그 유명한 금홍을 만나 동거 열애를 하게 됩니다. 게으르고 유약한 성품, 삼각 관계들, 변동림과 동반자살 시도, 근대 세계(인습, 제도, 윤리, 전통)의 지리멸렬함에 대한 토로 등 다자이 오사무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방바닥 위에 한 마리의 고양이의 시체가 버려져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발을 멈추었다. 그것은 역시 고양이었다. 눈이 오듯이 영혼이 조용하게 내려앉고 고양이는 내 얼굴을 보자 미소를 짓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그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무서운 비예(睥睨:눈을 흘려 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자는 나의 손을 잡았다. 고급 장갑을 줍는 것처럼.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여자의 체중을 절취했다. 그것은 달마인형처럼 쓰러뜨려도 다시 일어나고 또 쓰러뜨려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백지는 까맣게 끄슬려 있었다. 그 위를 땀의 행렬이 천근같은 발을 끌고 지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의 두 볼은 둔부에 있는 그것처럼 깊은 한 줄씩의 주름살을 보였다. 기괴한 일이다. 여자는 도대체 이렇게 하고 웃으려고 하는 것인가.
여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듯이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있다.
ㅡ 이상 <애야哀夜 - 나는 한 매춘부를 생각한다> 中 『현대문학』, 1966,7
* <애야>는 매춘 경험을 기록한 산문으로, <이십이년>이라는 시와 연관이 있다. 이 작품은 엮은 이에 따라 시 혹은 산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상의 다른 시와 비교해 볼 때 형식과 내용상 시적 응축력이 부족하므로 산문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박현수 해설)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
※《이상 전집 2》에는 실려 있지 않다
막스 리히터(Max Richter) 신작 《Three Worlds: Music From Woolf Works》(2017)을 찾아 들었다.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올랜도", "파도"에서 16개의 대목을 가져와 음악화 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이 나레이션으로 중간중간 나온다.
리히터의 음악을 들으면 세상을 치유하려는 것만 같다. 달빛처럼 파도처럼 몽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