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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The Aluminum Group - Little Boy
●첫째 밤 - 비약의 대가를 만나다
사사키 아타루는 진정한 지성들은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았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쁜 ‘知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말하려는 비평가”와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전문가”를 거론했다. 책의 명령에 휘둘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창조의 독립성을 강조하려 한 뜻은 알겠다. 니체와 그리스도교를 통해 ‘임신-세계를 다시 낳는 것’의 의미를 가져오며, “쓰는 이유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남자라는 것의 부끄러움이 아닐까”(질 들뢰즈)라는 말을 이치에 맞는다고 했다. 저자가 아감벤에게 사전 정도 찾아보고 말하라고 맹렬히 비판했듯이 나도 저자의 논리 연결들을 보며 무리한 귀납을 하고 계시군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철학을 개념의 창조라고 말한 들뢰즈를 인용한 건 수긍하겠지만, 부끄러워하는 남성의 도피 같은 수태 과정이 창조라는 식의 연결은 내겐 비약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타인이 쓴 책은 근본적으로 이해(읽고 번역) 할 수 없고,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걸 알면서도 반복해 읽는 것이 최고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아카데믹한 知의 숭상으로 보인다. 새로운 발견과 정보로 추종자가 되는지 편견을 타파하는 주체자가 되는지 저자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 읽기들이 그가 숭상하는 ‘반복해 읽는’ 것보다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저자의 어떤 知에 대한 혐오와 어떤 知에 대한 열광(무의식과 대면하는 읽기와 쓰기)이 모두 과했다. 그의 다독, 다상량에 대한 내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둘째 밤 - 문학이 혁명의 근원?
저자는 혁명과 폭력과의 관계를 거부하며 언어의 혁명으로서 마틴 루터를 데려왔다. 마틴 루터는 성서를 읽고 또 읽으며 세계의 질서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이단으로 내몰렸지만 루터는 언어로 이 깨달음을 알리려 했고 그의 성서는 민중에게 퍼져 나갔다. 그는 읽고 다시 쓰는 자가 된 것이다. 저자는 루터가 정초한 독일어가 독일 철학과 독일 문학의 기반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후 루터파는 교회법 관할에 있던 사항을 세속국가 법률의 관할 하에 이행하는 법 혁명을 이뤄냈으며 이는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중세 해석자의 혁명이 현재의 복잡성을 설명할 중요한 단서라는 건 잘 알겠다. 이에 대한 내 판단은 일단 유보했다.
●셋째 밤 - 종말이 그리 쉬운 게 아니라는 말에 동의
문맹인 무함마드는 읽을 수 없는 신의 계시를 읽음으로써 『코란』(‘읽는다는 것’)을 이 세계에 가져왔다. 코란 원본은 이슬람에서 ‘책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누구의 아버지도 아니며 신의 아들도 아님을 강조한 무함마드는 폭력의 법을 따르지 않고 반복해 읽는 자였고,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지 하는 물음 속에서 자신과 세계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일체감을 깨달았다. 여기서 ‘일체감’이란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절대적 향락’ 상태와는 구분된다. 그러나 나치와 사이비 종교와 많은 종말론들은 이런 사고로 현실을 변질시켰다. 아감벤과 코제브도 비판 대상이 되었다.
병든 사고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은 문학이 해왔다며 저자는 조이스와 베케트를 예로 가져왔다.
앞선 장에서처럼 '수태'를 어떻게든 연결하려는 억지가 느껴졌는데, 무함마드와 어머니를 연결하는 논리 전개만 빼면 대체로 수긍할 만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말세다”라고 말하며 세상을 더욱 죽이는지.
●넷째 밤 - 종말론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새로운 것에 대한 인간의 열광을 조소하며 저자는 그 반대의 역사로 로마법 대전의 예를 들었다. “6세기부터 11세기 말까지 600년 가까이 완전히 망각에 묻혀” 있던 로마법 대전이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에서 발견되면서 유럽은 법 개념과 법률 용어를 대량 입수하게 됐다.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은 범유럽 공통법으로 탄생(‘중세 해석자 혁명’) 했다. 이 새로운 법을 추축으로 교회가 성립되었고, 그것은 근대국가, 근대 관료제의 기원이 되었다. 이 법질서에 귀속된 인간은 ‘재생산’의 법적 대상이 되었다. “근대법, 근대국가, 근대주권, 회사, 신탁, 계약, 조합 등 근대 자본제의 원형” 체제 속에 자연히 인간도 이양되었다. 법문은 좀 더 정교히 수정되어 정보와 데이터베이스가 되었으며 정보에 의한 통치를 쉽게 만들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비롯된 “정보와 폭력과 주권의 삼각형으로 구성되는 ‘세계’, 제도적인 것의 세계는 유럽의 한 버전에 지나지 않”으며, ‘세속화’라는 가면(유럽의 우수성을 전파하는 전략 병기, 개종, 정복) 속에 전 세계에 수출된 것이라는 르장드르와 저자의 주장은 타당해 보였다. 다른 무의식을 지배하는 무의식인 셈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중세 해석자의 혁명이 세계의 법과 무의식을 더 공고히 한 혐의는 보이지 않는가? 자유롭다 말하지만 온갖 훈련을 통해서 탄생하는 예술과 문학의 아이러니는? 재생산들의 종말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순수성이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할 문제 아닌가. 어떤 것도 본질로서 있을 수 없는데 우린 지금 무엇을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지.
●다섯째 밤 - 다음 아침을 기다릴 뿐인 아침
20만 년 전에 호모사피엔스가 탄생한 뒤 농경, 목축, 자본의 축적에 의한 경제활동은 1만 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고, 예술의 역사는 그보다 더 오래되었으며,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000년밖에 되지 않았고, 문학이 탄생한 이래 90퍼센트는 완전한 문맹이었다. 이런저런 제반을 살필 때 문학은 너무도 젊은 예술이며, 생물종의 평균수명은 400만 년이라는 고생물학자의 통계를 가져와 인류 멸종은 터무니없다 저자는 강조했다. 인쇄술이나 종이의 발명이 이 읽고 쓰기의 세계를 대단히 발전시켜 왔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구전성(口傳性)이 구전성(舊典性)으로까지 발전했다고 보기에, 인간이 유용성을 발견한 모든 것을 인류가 끝날 때까지 가져갈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말, 종언 타령엔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
저자는 마무리에서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나 블랑쇼가 없었다면 무엇을 쓰고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몰랐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그들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었느냐고. 당신이 그 책들을 읽고 미치고 이렇게 쓰게 되기까지 과연 자유로웠냐고. 이 생각의 자유로움은 비평가와 전문가를 합한 또 다른 知의 모습은 아니냐고. 나는 그의 이 글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를 따지는 게 아니다. 이 책은 《야전과 영원》 입문서일 뿐이고 향후 사사키 아타루는 《야전과 영원》을 깨는 다른 글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도 기도하는 비평가와 전문가 어느 부류에 분류될 테니까. 언어와 인간의 이 체계들을 이토록 추적해봤으니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아, 혁명을 담으려는 언어의 운명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