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보입니다
선택된 자들의 소망
루 살로메 지음, 이태영 옮김 / 투영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목차]

 

선택된 자들의 소망(~9) / 나와 니체(~206) / 나와 릴케(~227) / 나와 프로이트(~273) / 크리스마스 메시지(~298) /

성이란 무엇인가?(~316) / 승화된 성과 사랑(~334) / 거울 속에서(~359) / 유대인의 예수(~363)

 

 

<릴케편>

(p267~268)

러시아 기행

 

1. 형식과 내용

……

  예술가는 감각적인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는 몸짓 따위에 함께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예술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소작농이 온갖 종교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행동하듯이 예술가는 온갖 미신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신은 양자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가에서 소작농에 이르는 길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에 이르는 길보다 가깝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형식적인 사물들에게서 내용인 자기 영혼을 분리시키는 대신에 자기 주위의 사물들과 합치하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이교(異敎) 적인 성질의 것이 오랜 옛날부터 예술에 있어서는 오히려 참다운 종교였던 것이다. 이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때묻지 않았던 우리들의 유년시절과 우리들이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직관에 의해서뿐이다. 때문에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외부와 내부는 결국 동일한 것이며, 그것들이 온갖 신앙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사물을 아름답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美를 믿게 되는데, 이는 그 사물에 우리들의 영혼을 그대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믿는 것은 生에 있어서의 神 뿐이지만, 그 이유 역시 우리들 자신이 생에 우리의 영혼을 모조리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사물과 신을 창조해 내면서, 피조물의 자세로 그 양자를 겸허하게 믿는다. 그러나 그 이유도 사물과 신이 우리들을 그렇게 강조했다는 이유 때문만이다.

 

 

 

 

 

<프로이트편>

​(p281)

(「파우스트」제 1부, ​「천상의 서곡」에 나오는 것으로 메피스토는 인간에 대해 "세계 속의 조그마한 신/그 신이 인간에게 천국의 빛을 주지 않았다면/인간은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테죠./인간은 천국의 빛을 이성이라 부르면서, 그것만을 의지하고 있지만/그럴수록 다른 동물들보다도 더 동물적으로 되어 갈 뿐이지요"라고 말한다.)

  현실적 경험으로 인한 필요성과 편리함 때문에 인류가 여기까지 그 문화를 발전시켜 오기는 했으나, 그 문화는 결국 원시적 충동을 약화시킨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류는 그로 인하여 충일한 힘을 잃어버렸고, 결국에는 허약하고 하잘것없는 인간 동물로 격하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반면에 동물들은 그 때묻지 않은 몰(沒) 문화성으로 해서 거의 대지의 주인처럼 당당하게까지 보이게 된 것이다. 

(p287) 

​  우리가 승화작용의 궁극으로서 '神的인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 말은 우리에게 있어 항시 가장 친근한 것인 동시에 가장 초월적인 것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가장 지상적인 것을 위해 생겨난 개념으로서, 이미 그것은 극도로 특수한 것처럼 들리긴 하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가장 생생한 자아 극복의 자기 표출인 것이다.

  즉 승화작용에서 생겨나는 힘은 우리들의 충동 의지의 기반에 직접 관계되는 것으로서, 우리들이 의식하든 못 하든 간에 충동의 원천이 강하면 강할수록 승화작용 역시 왕성해지는 것이다.

 

 

 

 

 

 

§

팜므파탈이나 페미니스트로 강조되는 루 살로메의 이미지와 달리 전체적으로 종교성이 강한 책이었다. 표제작인 루 살로메의 중편 소설 <선택된 자들의 소망>은 신앙과 인간의 고뇌가 얽힌 비극성을 다룬 그 시대 소설들 중 헤르만 헤세와 유사하다. 불교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곁들여지는 것까지. 헤세의 <황야의 이리>나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느낌이었다.

고답적 문체에 지루하다 싶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벌써 100년도 넘은 글이었다.

 

릴케 편에선 정신의 원숭이, 정신의 원숭이....라 말하는 릴케의 말이 귓가를 상당히 오래 맴돈다.

 

살로메의 글을 읽으면 말년의 니체는 미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병원에서 그의 정신 승리를 이뤄냈다는 지젝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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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9-06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뚝딱 훌륭한 리뷰가 어찌 가능한지.... 우연찮게 근래 읽으신 건가요?

AgalmA 2016-09-06 19:45   좋아요 0 | URL
알라딘 오기 전에 리뷰처럼 쓴 메모가 상당히 많은데, 옮긴 정도^^; 다시 읽고 쓰긴 시간상 번거로워서 그게 좀 애석합니다. 그건 다른 분이 또 해 주시리라. 제 역할은 이 정도로.

북다이제스터 2016-09-06 19:52   좋아요 0 | URL
미에 우리 영혼을 부여한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근데, 그게 인간의 큰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근래 읽은 책으로 첨 알고 절감하고 있습니다.

2016-09-06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07 01:52   좋아요 0 | URL
에코가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를 각각 쓴 의미가 그래서죠. 우리는 미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지만 관습과 학습에 의한 편향성도 많죠.
추의 미학에 대해 쓴 글도 있는데 이것도 또 올려야 하나...아아, 역시 서재는 뜸하게 와야....

2016-09-06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06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06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07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예출판사 판본은 루 살로메의 소설에 대한 해설이 잘 정리되어 있어요. 역자는 소설이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비견되는 작품으로 설명했어요. 소설 주인공의 아버지가 종교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뭉크의 아버지가 떠올리기도 했어요. 뭉크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를, 신앙심을 갖지 않는 삶에 대해서 아버지와 심각한 언쟁을 했다고 합니다.

AgalmA 2016-09-08 23:35   좋아요 1 | URL
역시 헤세를 떠올리게 되는 소설인 건 맞나 보네요. 네, 뭉크 그 일화는 고흐가 목사되려고 했다가 좌절한 일화와도 겹치고....세상 참 실타래 같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