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사회 5
파스칼 피크 외 지음, 배영란 옮김 / 알마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사실 나는 대화를 자주 포기한다. 많은 이들도 그렇겠지만 대화를 할 때 무의미와 의미를 동시에 느끼며 절망하기 때문이다.
소통하길 바라면서도 어떤 말들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서로 막히고, 어떤 말들은 너무 단순해서 거기서 끝나기 일쑤다. 말은 장소에 따라 또 얼마나 달리 해석되는가. 인터넷으로 인해 공간은 무한으로 확장되었다. 나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지만 어디에도 없기도 하다. 순간에만 존재하는 내 말과 인식이 가장 막다른 골목 같기도 하다.
˝변이와 선택˝이라는 진화 과정처럼 언어도 ˝생략과 압축˝이 필수적이며 그래왔다.
언어 속엔 정보 교류 같은 실리적 이득 뿐만 아니라 교감, 순수한 나눔 같은 감정의 교류도 섞여 있으며, 지적 만족과 배설 혹은 목적 같은 자기 충족적 정서도 있다. 인간은 언어 & 행위를 통해 이 모든 걸 충족하고 싶어한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 이제껏 인간은 늘 바랐다. 소수의 로또 당첨자가 어쩌면 자신이길 바라듯, 예수나 부처가 이 지상에 머문 기적이 여기 깃들 수도 있다는 듯. 너무 거창한 표현이라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우리는 언어 & 행위를 통해 소소한 만족을 얻는다고 미덕처럼 말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원하는 바를 관철하려는 완강한 자기중심성-개인주의가 벽이자 뿌리로 그 안에 있다. ˝공통의˝ , ˝모두를 위한˝이라고 말할 때 조차 사실 의심스러운 게 많다. 정치 공략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런 성격을 단순히 좋고 나쁨으로 볼 수 없다. 우리 본성 속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탓하고 따질 순 있겠지만 없앨 순 없다. 영원히. 그래서 이 세계는 ˝바꾸려˝는 노력들로 가득한 지 모른다.
존재만으로도 스스로가 스스로의 원인이며 결과이다. 그리고 존재들은 모인다. 몇몇과 소통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와 소통할 수는 없다. 애석하게도.
끊임없이 쌓으면서 마침내 소진되길 바라는 인간이여,
나는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나간다. 내 글의 추상성에도 화가 난다. 완벽이 아니라 한계에 대한 절망.
돌아오지 않길 바라며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바라 건대, 바라 건대 였다.

플라톤이 `인간은 털 없는 두 발로 걷는 동물`이라고 주장하자 털 뽑은 닭 한 마리를 던지며 `옛소, 당신이 말한 사람`하고 당당히 말한 뒤 술독으로 돌아간 디오게네스를, 그 자유로웠던 인간을 조금 부러워하는 밤들 속에 나도 인간이었다.

영원은 시간이 있기에 가능한 표현이고, 그걸 만든 건 우리다.




http://youtu.be/CrWN0-MuK38

Charlotte Gainsbourg [IRM] (2009) - Heaven Can Wait(featuring Beck)

...우리는 시간의 관점에서 본 자연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법을 배웠다. 따라서 우리는 망치나 침대처럼 실용적이고 편리한 도구와 황소나 양 같은 번식 생물 속에 시간을 접어넣고 숨기고 보존하고 소비하고 끌어넣고 펼쳐놓는 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며, 이들을 하나의 기억으로 만들 줄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변이의 길을 열어준 생명과학은 급격한 혁신의 과정을 통해 이 같은 과거의 전통을 따라가고 있다. 우리는 예전에는 변덕스러웠던 이 시간의 조작법을 알고 있다. 종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 우리는 생물체를 탄생시킨다. 따라서 거대 담론의 어마어마한 시간을 기술적 혁신의 짧은 시간에 압축하는 것은 하나의 탄생 위에 하나의 기억을 투영하는 셈이다. 우리의 손에 세상의 체험시간, 진화의 시간, 새로운 종의 형성, 그리고 사람화가 쥐어진 것인가? 그렇다. 이번에는 또 그 보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탄생시킨다. 우리의 기나긴 기억 속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nature`을 간파하고 이로부터 하나의 `문화cluture`를 만든다. 그러니 인간이란 무엇이겠는가? 자가 진화의 길을 가는 생물이다.
베르그송의 `지속`개념을 한 세기 만에 형이상학에서 실용으로, 창조적 진화에서 진화의 창조자로 전락했다. 치명적인 여건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어쨌든 하나의 운명으로 여겨졌던 지속은 이제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다. 게다가 이 지속은 이성적이기까지 하다.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것은 계획된 수순에 따라 진행되는 우발적 진화보다 설득력이 약하다. 사실 더 새로울 것도 없고 일반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더 인간적일 것도 없다. 우리는 지극히 추상적인 우리의 생각에 작업대 따위를 끌어들이거나 조작을 가하여 이 생각을 추상적으로 만드는 습관이 있다. 더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림으로써 최초의 석기를 기반으로 우리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란 무엇인가? 압축해놓은 진화 과정의 상대적 제어다.
고대 스토아학파는 우리에게 종속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했다. 이어 우리는 데카르트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를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 우리에게 종속된 것들은 늘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줄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 같은 효율성의 극대화를 실현한 우리는 우리가 결국 우리에게 종속된 것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에게 의존도가 점점 더 심화되는 체험시간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로써 자가 생산의 사이클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사이클의 재개는 순수한 시간성 안에서 이루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탄생시킴으로써 탄생한다.
(p91~93)
ㅡ3장 철학자가 바라본 인간
인류의 시대: 창조적 진화에서 진화의 창조자로 / 미셸 세르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5-12-23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르그송의 `지속`개념은 한 세기 만에 형이상학에서 실용으로, 창조적 진화에서 진화의 창조자로 전락했다.˝고 해야 자연스러울 것 같네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읽어보고 싶네요.

AgalmA 2015-12-24 22:2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수정 감사합니다. 제 오타가 아니라 번역 오류입니다. 그 외에도 거슬리는 오타들이 더러 있습니다. 저 인용문 속에도 참 많죠;
`과학과 사회`를 연결해 프랑스 학자들의 발표를 대중적으로 전달하려는 기획시리즈인데, 다른 책도 재미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고인류학자, 신경생물학자, 철학자가 각각 바라보는 `인간 개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통념을 건드리는 줄기는 서로 맞닿고요. 흥미로우면서 그간의 진화론을 정리하는 이점도 있습니다. 짧고 굵직굵직하게 다루고 있어 대중서로는 괜찮은 책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논의들은 2003년도 것이라 그간 또 어떤 인류학적 발견들로 수정된 것이 있는지 살펴볼 부분도 있을 겁니다. 이 분야는 뭔가 발견되면 수정되는 일이 다반사니;
흔적님은 이 분야 책을 많이 보셔서 큰 도움이 되실 지는 모르겠네요...
하여간 원숭이와 인간 문제, 네안데르탈인-호모 사피엔스 문제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었습니다/

비로그인 2015-12-24 07:24   좋아요 0 | URL
네.. 사실 그 부분을 문의하려 했었습니다. 도움이 될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2015-12-23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4 0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3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12-24 06:17   좋아요 1 | URL
언어 자체가 여러가지를 압축하며 이어져 왔으니 파생되는 문제라고 보는데, 그럼에도 최대한 현실화 작업이 없다면 결국 (허)무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없지 않나 싶어요. 정립과 공유 이 두 속성이 언어에 내재해 있는 데다 발화자가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질적으로 달라질테니 균형 맞추기가 참 어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추상성을 우려하는 이 글은 제게도 하는 말인데, 참 남일 아니지요..흐유...
몰입하다 보면 동화되기 쉬운데, 늘 경계해야 할 점이기도 하죠. 괴물 어법이 되긴 싫다고요<(ㅜㅜ)>;;

초딩 2015-12-24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이야기할 때, 특히 두 대화자에게 사용 언어가 모두 모국어가 아닐 때 소통이 되는거 보면 신기한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화 이후에 머리와 마음에 남겨져 있는 것은 단어가 아니고 감상과 이미지 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눈을 보고 상대와 마주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AgalmA 2015-12-24 22:31   좋아요 1 | URL
스티븐 핑커가 인간 뇌에 언어문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인간 뿐만 아니라 고래도 박쥐도! 서로 소통하는 고유의 수단이 있죠. 늑대소년 예 같이 사회화나 교육의 중요성을 더 강조할 수도 있겠으나, 그 습득과 활용에 있어 저는 인간 언어의 특징적인 고유성을 강조하는 겁니다. 우월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인간 언어는 다른 동물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죠. 인간의 고도의 기술력과 추상성은 그런 성질에서 나온 것이고요. 오히려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의 세포적(DNA), 동물로서의 성질은 구별적이기 보다 유사한 게 더 많잖습니까.

우주 속에서 생물이 존재하듯 우리는 그 모든 포함 속에서 소통하는 거 겠죠. 당장 공기만 없어도 말로 소통하는 건 불가능하죠. 어떤 문화는 코를 스치며 인사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어떤 문화는 그게 모욕이듯 인간 문화는 지나치게 관습과 의례들이 많아 저는 불만스럽기도..
말 하다보니 좀 중구난방 되어서 죄송^^;
여러 석학들이 그 중요성을 강조하듯이 ˝공감력˝...초딩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이게 아닐까 합니다. 공감력이 상상력과 아주 가까운 위치라고도 생각하고요~

살리미 2015-12-2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겠고, 그저 디오게네스가 너무 재밌네요 ㅎㅎㅎㅎㅎ
할수만 있다면 그런 인생 살고싶은데...
소란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정리하고 혼자 와인 한 잔 하면서 서재 둘러 보는 시간입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Agalma님 글을 북플에서만 읽었었나봐요^^ 서재에서 뵈니 더욱 멋지고 새롭군요^^
행복한 크리스마스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AgalmA 2015-12-25 03:31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죠? 저도 디오게네스 일화가 이 글에서 제일 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해서 자주 들었던 일화인데 들을 때마다 신나요ㅎㅎ 이 책에서 파스칼 파크는 디오게네스를 ˝고인류학자의 수장격˝이라고 말하고 있죠^^
제 생각을 뭉쳐서 던져 놓기만 했지 잘 풀어내지 못했어요. 인정합니다.
고즈넉한 밤 제 서재 마실까지 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오로라^^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살리미 2015-12-2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ㅎㅎ Agalma님 글이 어렵다는 지적은 아니고요.... 전 인용하신 저 글을 읽고 이만큼이라도 정리할 자신이 없다는.. 그런 얘기였..... 아시죠? ㅎㅎ
오히려 Agalma님 설명덕에 조금은 이해가 되었답니다^^

AgalmA 2015-12-25 17:15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건가요...다행입니다^^ 제 좋은 쪽으로 약간 안심이 됩니다ㅎ;;
오로라님 <읽다> 리뷰 보면 자신 없어 하실 글은 아니던데요; 평소 글도 그랬고요. 각자의 고민 속에 읽어나가고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

살리미 2015-12-25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응원해주시는 걸로 생각할게요^^ 사실 제가 글이란 내게 와닿는대로 읽으면 그만이다 하다가도, 좋은 글들 보면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생겨나면서 이런 걸 리뷰라고 올려도 되나 하고 고민하게 되는 소심쟁이라서요 ㅎㅎ 그러니 <읽다>를 읽으면서도 그런 부분에 막 꽂히고요 ㅎㅎ
더 많이 읽다보면 더 시야가 넓어지겠죠? ㅎㅎ

AgalmA 2015-12-25 18:50   좋아요 1 | URL
서로 응원해야 할 상황이죠 ㅎㅎ;; 그래서 읽고 쓰고 좋은 글 보면 질투도 하고...아이고, 사람 맘 참 그래요. 그렇죠^^;;
부러운 작가도 한둘이 아닌데, 요즘 글 잘 쓰는 사람 정말 많은 거 같아요. 알라딘 서재는 수준급이라 제가 딴 데를 못 가겠다는ㅎㅎ;;

AgalmA 2015-12-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말하는 내가 엄청난 댓글쟁이였단 걸 알고 헉;;
http://blog.aladin.co.kr/zigi/8019870 2015 알라딘 서재 기네스 - 다른 서재 최다 댓글 작성자 4위-_-; 앞에 다른 분들이 있어서 다행인지 섭섭인지 헷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