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빌리러 도서관을 갔다가, 도서관이 가까우면 뭐 하나, 휴관일만 골라 가는 나인 걸 확인하고 터덜터덜 돌아왔던 밤,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시전집 소식을 접하니 역시 오늘은 시 밤이었어! 그 시밤 말고....
반가운 마음에 [지만지]에서 폴란드 원문 번역으로 50편을 수록했던 <헤르베르트 시선>을 다시 펼쳐봤다. 철학과 아름다움이 압축되어 있던 시가 와락 다가왔다. 그래, 여전히 거기 있었다. 나는 그 앞을 매일 무심히 지나쳤지.

전쟁 시기나 암울한 시대엔 신화 모티프가 예술에 자주 애용되는데, 인간 심리(융의 집단무의식, 원형의식 등등)와 엮어서 생각해 볼 문제다. 헤르베르트(1924~1998) 詩도 신화와 역사, 당시 시대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형식의 압축미가 강하다. 폴란드어를 외국어로 번역했을 때 시를 잘 살리지 못한다는 평(늘 나오는 골칫거리;)이었는데, 김정환 시인은 분명 영역본으로 번역했을 테니 그게 좀 걱정된다. 같은 폴란드 시인이자 동시대(2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전체주의)를 겪은 노벨문학 수상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시선집 <끝과 시작> 경우 폴란드어 전문 번역가이자 폴란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최성은 교수였던 걸 생각하면 좀 아쉽지만....각각 일장일단이 있겠지.


쉼보르스카는 헤르베르트의 새로운 시를 사람들이 늘 기다렸고 이름을 가려도 그인 걸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나는 ˝판 코기토˝나 신화와 전쟁 참상을 엮은 시 경우 독특한 형식 때문에 단번에 알 수 있는 정도다; 애정도 문제인가, 판별력 문제인가....무엇이든 반성하게 되는군...
소설도 아닌 시에서, ˝판 코기토˝ㅡ폴란드어 pan(남자 귀족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과 데카르트의 Cogito(생각하는 존재)ㅡ라는 캐릭터를 구축한 것만 봐도 예사 시인은 아니다. ˝판 코기토˝는 어찌 보면 이성적인 돈키호테 같기도....


방대한 시집 분량과 시인 소개글에 독자들이 선뜻 접근하기 저어할까 싶어 <헤르베르트 시선>(2008, 지만지)에서 비교적 난해하지 않은 시들을 발췌해 소개해 본다.





개의 물방울 (全文)


˝숲이 불길에 휩싸이면 장미를 위한 시간은 없다˝
-율리우시 스워바츠키


숲들이 불타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목을 팔로 휘감고 있다
장미 꽃다발처럼


사람들은 은신처로 달려갔다
그가 말하길 아내는 긴 머리카락을 가졌기에
그 안에 몸을 숨길 수 있다고 했다


한 이불을 덮은 채
그들은 속삭였다 음란한 밀어들과
연인들을 위한 연도(煉禱)를


상태가 악화되자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 속으로 뛰어 들어가
눈꺼풀을 굳게 닫았다


끝까지 용감했다
끝까지 서로에게 충실했다
끝까지 서로와 닮은꼴이었다
얼굴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멈춰 선
두 개의 물방울처럼





내면의 목소리 (全文)


나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목소리는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으며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도 말하지 않고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 파장이 너무나 미약해서
거의 알아들을 수조차 없다


아주 깊이 몸을 숙여 귀를 기울여도
간신히 들려오는 건
의미를 벗어난 분절음뿐


행여 다른 소리에 휩쓸려 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나는 그를 정중하게 다루려 애쓴다


마치 그의 말이 중요한 의미라도 있다는 듯
동등하게 대하는 척한다


심지어 때로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시도도 한다
ㅡ알잖아 내가 어제 거절했던 일 말야
지금껏 그런 일은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안 할 거야


ㅡ글루(glu)ㅡ글루(glu)ㅡ


ㅡ그러니까 네 생각엔
내가 잘했다는 거지


ㅡ가(ga)ㅡ고(go)ㅡ기(gi)ㅡ


우리의 의견이 서로 일치되어 기쁘다


ㅡ마(ma)ㅡ아(a)ㅡ


ㅡ자 그럼 편히 쉬어
내일 또 이야기하자


내게 전혀 필요치 않았기에
그에 관해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내게 희망은 없다
그저 약간의 회한만 남았을 뿐
그가 연민의 이불을 덮고
거기 그렇게 누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벌릴 때
그리고 무기력한 머리를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는 걸 보면서





포위된 도시에서 온 보고서 (발췌)


만일 도시가 함락되고 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면
그는 망명길에 도시를 지니고 갈 것이다
그가 도시가 될 것이다





이력서 (발췌)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알고 싶었다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집은 새로 얻게 되는지 사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과 악한 것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무엇이 희고 무엇이 완전히 검은 것인지도 확실히 알고 싶었다





시인의 집 (발췌)


그의 찬장과 침대, 의자 사이에 부재를 뜻하는 흰 외곽선이 아로새겨져 있다. 뭔가를 던지던 그의 손동작만큼이나 날카롭게.





묘사를 위한 시도 (발췌)


내 새끼손가락은
나와 똑같은 날 태어나
죽는 날을 함께하고
똑같은 외로움을 공유한다




수치 (발췌)


내가 몹시 아팠을 때 나에게서 수치심이 떠났다
아무런 저항의 의지 없이 내 몸의 가련한 비밀을
낯선 손에 내보이고 남의 눈에 보여주었다





판 코기토와 상상 (발췌)


그는 동어반복을
같은 말을 같은 말로 번역하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새는 새다
노예는 노예라는 뜻이고
칼은 칼이고
죽음은 죽음이다





계곡의 문에서 (발췌)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그것은
어린아이를 빼앗긴 어머니들의 울부짖음
왜냐하면 밝혀진 대로
우리는 한 명씩 구원되기에




기도문 (발췌)



제 인생은
끝없는 심연에서 깨어난
물 위의 원과 같이 되지 못했을까요
나이테에 겹겹이 주름을 만드는
생장의 시작점이 되지 못했을까요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무릎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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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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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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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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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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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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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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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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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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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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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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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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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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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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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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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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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5-10-20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란드에 이런 시인이 있었군요. 장소가 장소인지라 더욱 관심이 가네요. ˝두 개의 물방울˝이란 시의 이미지가 너무 선명해서 좋네요 . 이북이 있나 찾아볼래요.

AgalmA 2015-10-20 20:39   좋아요 0 | URL
전집을 보면 확연하겠지만, 작품 시기별로 경향 차도 꽤 있는 것 같아요. 헤르베르트를 ˝신고전주의˝라고도 하던데, 어떤 시들은 사물에 대한 천착이 두드러지고(특히 ˝돌˝), 또 어떤 시들은 대단히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가 하면, ˝두 개의 물방울˝ 경우는 시대의 비극성과 시적 아름다움이 절묘하고...쉼보르스카와 헤르베르트 수준을 보면 그곳 시 세계도 대단할 거 같은데, 달걀부인님 눈 크게 뜨고 찾아보셔야 할 듯~_~ 세계엔 우리가 모르는 작가가, 시인이 얼마나 많은지....

북다이제스터 2015-10-20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는 같은 내용이라도 사람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힘이 있는거 같아요.

AgalmA 2015-10-20 20:21   좋아요 1 | URL
언어가 그래서 참 대단한 듯. 시에서 저는 그런 충격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위안 또한. 그래서 참 끈질기게 연연해 하고....그래서 참, 그래서 참....

북다이제스터 2015-10-20 20:29   좋아요 1 | URL
북플 어느 이웃님께서 제게 근래 알려 주신게... 현대 철학은 결국 언어로 귀결 된다고 하던데... 님 글 보니 막연하게 동일하게 느껴집니다. 어제 들은 팟케스트 지대넓얕에서도 현대인 인식은 언어라고 한 것도 같은 선상 공감 많이 되네요 ^^

AgalmA 2015-10-20 20:52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들어서야 철학, 문학, 과학, 인식 이 모든 문제에 ˝언어˝가 관건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전에 마냥 어려웠던 부르디외 ˝언어권력˝도 요즘 이해하게 됐고...제가 프랑스철학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게 ˝언어˝ 문제에 대한 제 의문을 많이 다뤄주기 때문이죠.
아, 갈 길이 참 멉니다

2015-10-20 2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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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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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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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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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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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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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0-20 21:36   좋아요 1 | URL
이 문젠 많이 생각해 봤는데도 아직 답을 못찾고 있어요.
어, 틀렸네. 고치고 끝~~이 아니라 아니@@ 틀렸잖아! 왜 틀린 걸까, 나는 이 개념과 뜻을 잘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가, 이러한 불협은 어째서 생기는가, 상대가 오해할 소지를 더 줄여야 한다!, 더 철저히 훑어봐야 한다!!, 더 정확하고 완벽한 표현은 없을까...생각의 자물쇠들을 모두 점검해보는 지옥이 되는데-_-....서재를 둘러보며 글쓰는 사람들 대부분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해 하더군요.
제 경우는 ˝개념˝ 지탄을 받은 트라우마가 있어서 좀 더 심해졌고요;;
완벽성이란 자기보호와 자기치장의 극대화라고도 할 수 있겠죠.

언어 얘기도 나왔던 만큼 언어도 우리 자신을 위한 최대 장치니 더욱 그런 상황이죠

2015-10-20 2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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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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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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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5-10-20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넵넵. agalma님 글을 읽는것으로 먼 곳에서의 독서갈증을 다소 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당.

물고기자리 2015-10-20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면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서글프게 읽히는지 모르겠어요.. 서글픔을 서글픔으로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오물이 될 수도 있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승화시킬 수 있는 것, 걸어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글의 힘인 것 같아요..

AgalmA 2015-10-20 21:33   좋아요 1 | URL
그쵸! ˝내면의 목소리˝ 베케트랑도 비슷하지 않나요? 정말 소진될 대로 소진된, 그러나 그 손에 무언가 놓지 못하고 있는 심정...헤르베르트 시들 중에 이런 내면의 극지를 드러내는 시들, 표현들이 저는 특히 좋더군요.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폐허가 된 저택 창가에 걸린 커튼의 휘날림을 보는 기분....

물고기자리 2015-10-20 21:22   좋아요 1 | URL
시인들은 조각가인 것 같아요. 소설가들이 화가라면 말이죠.. 소진되었다는 느낌도, 아갈마님의 마지막 구절도 황량함 속에서 흔들리는 애처로운 손짓처럼 와 닿아요..

2015-10-20 2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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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1 0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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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1 0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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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1 15: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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