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 인간은 로봇이라는 다중의 이야기 - 패턴화
“겉모습은 어떤 사람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사실은 외계 생명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어서 그 사람을 흉내내는 거. 그래서 옆 사람이 계속 저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거.”(p33)
이 대사는 ①<블레이드 러너> 여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로 서술되지만, 이 소설에서 ②‘우주알’이 몸에 들어간 남주인공과 ‘너는 누구였어’라고 계속 묻게 되는 여주인공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장강명 작가는 복선이랄 것도 없이 노골적으로 이런 패턴화를 보여준다. 장강명식 패턴화는 출판계에서나 독서시장에서도 성공한 것 같다. ③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하면 인간은 찾는 재미를 느끼고 계속 읽으니까. 내 현실과 가까운 이야기일수록, 리얼하면 리얼할수록 더.
그런데 이 소설의 패턴은 게임에서처럼 상향식이 아니다. 작가는 평준화된 패턴을 계속 제시한다. 박석거리 전설의 부부 이별 : 『그믐,…』주인공들의 이별 식으로 1:1로 입력해 놓았다. ‘시공간연속체’를 볼 수 없는 인간 : 로봇 : 독자를 위해. 반복의 단순패턴화에만 천착하는 작가의 논리를 위해. 남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교도소로 간 이영훈 어머니에게 '우주알'이 들어간다는 설정은 반복이라기보다 인위적이었다.
이 소설에는 반복을 위한 반전인 터닝포인트가 있다. 반전을 제시하면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 패턴을 보인다. 과거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었고 이게 진실이군! / 과거를 모두 거짓으로 만들면서까지 진실을 보여주려 하는군! 이 반응은 이 소설의 심사평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진실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사람들을 위한 거짓을 만들어내는 데 최선을 다하고, 그 거짓을 통해 시적 정의를 실현한다”(p168) - 강지희 문학평론가
“남자가 죽고 나서야 그가 해온 거짓말이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진실임을 깨닫고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라고 절박하게 물어야만 했던 여자의 이별 이야기?”(p169) - 권희철 문학평론가
남주인공의 반전은 소설(내면)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외면)에서까지 진실/거짓이라는 혼동을 일으킬 예견된 패턴이다. 우려점은, 장강명 박사(어울려서 한 번 붙여봤다. 놀림은 아님)가 현실 패턴화를 소설 시스템화 하는데 경직되어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그래서 김도연 소설가의 ‘의문’ 평과 신수정 평론가의 ‘작위성’ 평이 나온 것이라 짐작된다.
§§ 저널리즘과 환상성 – 환상적 사실주의? 사실적 환상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환상성에 방점이 크게 찍혀 회자되지만 ‘환상적 사실주의’라는 어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주의’가 더 핵심이다.
마르케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널리즘에서는 기사가 가짜라는 한 가지 사실만이 기사 전체에 편견을 갖게 만듭니다. 대조적으로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진짜라는 한 가지 사실이 작품 전체를 정당화해 줍니다.”(『작가란 무엇인가 3』 파리리뷰, p359)
저널리즘을 강조한 마르케스만의 작법은 그렇게 등장한다. 내적 독백 기법, 글에 딱 맞는 자연스러운 어조, 환상적인 것을 현실적으로 믿게 만들어줄 세세한 묘사.
언론계에서 온 장강명 작가 『그믐,…』은 마르케스의 취지와 작법의 괘를 같이 한다. 헌데 이 소설에서 어조가 마뜩찮았다. 어조 뒤의 화자가 작품을 규정짓는 느낌이 확연했다. 분명 더 풍부하게 확장될 수 있는 소설이었는데....
소설 말미에 작가가 소설 재료들을 주머니 털 듯 보여주는 것도 이 소설의 패턴화를 보여주는 이중주이다. 표현된 이상 저의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소설을 무척 도구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 그렇다고 해도 나쁠 건 없지. 세상 많은 것이 이미 그렇게 이용되고 있다. 시작과 끝을 우리가 인과적으로 받아들이듯이 가벼움과 무거움의 의미도 매우 자의적이다.
장강명 작가의 저널리즘에서 ‘사랑’은 느껴지지 않는다. 인물들의 관계와 사랑은 도식적인 클리셰로 다가온다. 이 작품만이 보여주는 독자적인 실존의 문제와 긍정성은 적어도 내겐 와닿는 게 없다. 작품의 긍정과 부정의 호불호를 따지자는 게 아니라 작가가 표방하며 성취하려는 저널리즘의 좌표가 나는 계속 걸렸다. 이 작품 전체는 세계에 대한 거부의 어조가 짙게 배어 있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욕망과 적의로 가득차 있고, 이영훈의 어머니가 그토록 강력한 캐릭터로 작동한 것도 그 영향이라 생각된다. 단지 현실 반영일까. 평온한 내면은 '우주알'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패턴을 알고 있는 남주인공 뿐이다. 그런 현실 해법 밖엔 정녕 없었는가. 이러한 경향은 작가의 허무주의에서 기인한 걸로 보인다. 객관적인 듯 냉정한 데이터 중심에 기반한 패턴화를 보는 관점은 거기서 온 것 같다. 이 저널리즘은 아직 많이 의심스럽다. 인터뷰를 보니 작가도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고, '어떻게'를 무척 고심하고 있는 듯했다.
작가든 인간이든 극복되어야 할 현안은 같다. 외부적 패턴화와 내부 근원적인 문제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 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뇌간이 없으면 인간은 꿈을 꾸지 못한다. 꿈이 억압과 충동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프로이트와, 꿈은 다음날을 위한 예비연습이라는 앨런 홉슨의 분석은 차후 문제다. 패턴은 꿈 자체에 있지 않다.
§§§ 오래된 꿈 - 소원
뇌에서 운동을 담당하는 시스템과 꿈을 담당하는 시스템은 연결되어 있다. 뇌간에는 보다 강력한 뉴런이 작동하기 때문에 꿈속에서 우리는 현실보다 더 강력한 시뮬레이션 쾌감에 빠져들게 된다. 상상과 꿈은 인간이 지속적으로 현실로 가져오길 원한 힘이다. 오래전부터 작가와 예술가는 그것에서 영감을 가져왔다.
21세기, 장강명 작가는 이 소설의 재료들을 이렇게 밝혔다. ‘본인의 기사, TV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 미국드라마 <멘탈리스트>, 영화 <인터스텔라>, 드라마 사운드트랙으로 쓰인 최백호 <아름다운 시절>, 대니얼 카너먼 책 『생각에 대한 생각』, 짐 홀트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에서 ’우주 알(cosmic egg)‘, 메이플 학습만화 도둑시리즈 『역사도둑』, 마포구 설화 등.
장강명 작가의 재료들은 매우 현실적이다.
꿈에서 빌려오든 현실에서 빌려오든 우리가 세계를 기억하고 착각하는 방식은 유사해서 어느 작품에서든 공감할 수 있는 점이 있다. 결말들도 거의 동일했다. 자유에 대한 갈망. 그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이미 도착해 있는 소설이자 거짓 같은 사실이거나 사실 같은 거짓이다. 이 문장에 나는 긍정의 뜻도 부정의 뜻도 넣지 않았다.
『그믐,…』의 마지막 패턴 제목은 '소원'이다.
“자유로워지고 싶어”(p161)
그리고 끝내 덧붙이는 말은, 전달되어야 할 명철한 사실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탄식이었다.
“오직 패턴만이 있었다”(p161, 소설 마지막 문장)
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많은 이들은 패턴을 느낄 때 비로소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렇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끝없이 패턴을 만들었다.”
ㅡ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