낌새는 있었다. 문은 자동잠금 방식이었다.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쉽게 열리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고집이 느껴졌다. 살아 있나? 시간은 흘러 흘러 급기야 문은 완강해지고자 한 모양이었다.
˝문이 안 열려!˝
누군가 중요한 듯 외쳤지만, 금방 해결되겠지? 하는 안도와 장난도 섞여 있었다. 우리는 위급과 보통을 구분해 듣는 시스템 1(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참조바람. 내 페이퍼에 잘 요약되어 있음-지나친 당부)이 있다. 사무실 직원 중 얌전하고 귀여운 사람1이 다가갔다.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이 해결할 수도 있다는 착각으로 다가가기 마련이다. 그게 요행이더라도.
나는 최근 적극 수용하기로 한 방관자 자세로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화장실도 다녀왔고 급할 게 없었다.
두 사람이 씨름했지만 문은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계속 ˝우린 갇혔어. 어떡해~~~~~˝를 희랍 비극의 코러스처럼 반복했고, 당연하게도 사장님은 엄중하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해결자가 아니었고, 얌전하고 귀여운 직원1은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 급하시면 창문으로 나가시고 나머지 사람은 이후 문이 열리면 나가죠.˝
(부가적 사항: 여긴 2층, 사다리 없음, 뛰어내리란 소리, 누군가는 뚱뚱하다, 운동 부족으로 관절도 좋지 않을 걸로 예상된다)
얌전하고 귀여운 직원1은 언제나 이렇게 얌전하고 귀엽게 말한다. 더 중요한 건 예쁘다! 그런데 이 얌전하고 귀여운 직원1은 빈 패트병을 깜짝 놀랄 정도로 무자비하게 구겨서 버리는 습관이 있다.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듯이.
나는 풋, 숨죽여 웃고 말았다. 밥이나 먹을까. 갇혀도 밥은 먹는다.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더라도. 물론 둘 다 배달을 원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생각에 관한 생각>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대 나일강은 이집트가 대비를 했음에도 매해 범람했다. 우리의 예상은 그 이상을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서 여러 번 시도한 끝에 문이 열렸고, 자물쇠 걸림 부분을 테이프로 막았다. 자동잠금 장치와 손잡이는 수리되거나 교체되더라도 문은 그 자리 그대로 있을 것이다. 다음엔 다르게 고장나겠지. 그 순간은 닥칠 때까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이 문은 나보다 더 오래 살 거란 기이한 확신이 든다.
최근엔 뉴스도 안 보고 아이돌 음악에 빠져 있다. 신나는 비트와 애절한 가창 아래 있는 ˝사랑에 대한 숭배와 애도성˝ 때문에 유치해도 사랑받는 것이리라. 아이돌은 매해 나타나고 사라지겠지만 이 ˝숭배와 애도˝는 K-POP과 가요, 음악의 본질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성질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의 시선집 <꿈 속의 꿈>(아티초크 빈티지 1)에서 황인찬 시인의 서문도 그런 대목을 짚는다.
˝사랑 앞에 엎드리고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모습에 마음이 기울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포우의 시를 계속 읽다 보면 우리는 사랑과 죽음의 또다른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랑의 모습이 `숭배`와 닮은 것이라면,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형태는 `애도`의 양식과도 닮아 있다.˝
며칠 후면 나는 이 사무실을 떠난다. 이곳 문에 대해 잊게 되겠지. 그러기 전에 또다른 이곳인 ˝북플˝에 이 기록을 남긴다. 어떤 애도도 없이. 끝없는 기록이 근사치의 애도일 지도 모른다.
계속 아득하다.
현실을 꿈속처럼 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현실같이 사는 것과 마찬가지 문제다.
문학 또한 두 곳을 동시에 오간다.
정확히 갈 곳이 없는 것 같다.
ㅡAgalma
*이 글은 타인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이런 이야기가 재밌는 일부와의 교류를 위한 글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추측과 증언을 말할 뿐 정확히 대화하는 것일까.(갑자기 반말)
이 글은 (대부분의) 당신이 원하는 정보가 희박할 겁니다. 그러니 좋아요는 신중히!(갑자기 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