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기형도 -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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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기형도에게 편지를 쓰며, 이제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밤 그렇게 멍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매번 이 모양이다. 아, 차라리 기형도를 몰랐다면. 이 생각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죽은 당신이 원망스럽다. 당신이 해명 좀 해! 무지했던 어린 내가 기형도를 신화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선고는 잊을 만하면 날아든다. 이제 이건 내 문제다. 삶은 늘 이런 식이지.
이 글의 계기는, 흔적님 <신화화, 매혹, 시마(詩魔)....> 글 때문이다. ‘2005년 계간 ‘시인세계’의 기획 글 ‘과대평가된 시인, 과소평가된 시인’에서, 과대평가된 시인으로 서정주, 윤동주, 김수영, 기형도 시인이, 과소평가된 시인으로 박목월, 박인환, 전봉건, 김종삼 시인이 선정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과대 평가된 시인들 특히 기형도에 대한 내용이 主다. 동의되는 부분도,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2005년 나는 뭘 했더라. 그들이 이리 편을 가르든 저리 편을 가르든 나와 무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일용할 양식을 코로 뒤적여 찾는 숲속의 생물일 뿐이다.
전봉건과 김종삼은 특히 눈에 밟히는데, 이 글은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형도’에 집중하기로 한다.
이 신화의 발단은 ‘요절’ 에서부터 왔다. 나는 가장 가까이 비교해 볼 대상으로 진이정 시인을 생각했다. 고인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려고 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고려 바란다.
기형도 - 60년 출생, 연세대, 85년 동아신춘문예 등단, 89년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1989)
진이정 - 59년 출생, 경희대, 87년 실천문학 등단, 93년 폐결핵으로 사망. 유고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 1994)
두 사람 다 첫 시집이 유고시집이며, 기형도는 김현 평론가, 진이정은 황현산 평론가가 해설을 맡았다. 진이정의 시집엔 지인인 유하 시인의 발문까지 있다. 기형도 시인이 스펙상(죄송...)으로 조금 더 앞서는 듯 보이지만, 지금 진이정 시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집은 절판된 지 오래다. 세계사가 망한 관계로 재출판 될 가능성도 없다.
결정적인 차이는 뭘까. 기형도가 먼저 죽어서? 기이한 죽음이어서? 유명한 출판사여서? 김현 평론가의 후광 때문에? 학벌? 인맥도 넓고 유명한 지인들의 끝없는 추도 때문에? 잘 생겨서?
아트만의 나날들
약 냄새,
돈은 슬퍼라,
어린 육체보다 더 슬픈 십원짜리 지페,
황혼, 두견, 소양강 처녀보다 더 슬픈
내 어릴 적의 십원짜리 지폐,
미국 중앙정보부가 노나주었던 십원짜리 지폐,
어느덧 나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그 사내의 선의를 믿지 못하네
코끝에선 약냄새가 났고,
미친 듯이 돈을 뿌리는 백인 병사의 곁을 지나
적산가옥 앞길을 지나
포대기에 업힌 나는 어디론다 실려가고 있었다
외삼촌의 술주정이 약냄새에 섞여 날 어지럽게 한다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곤 다시 잠든 외삼촌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의 아트만은 사라지고 없다 한다
그러니 거룩한 브라만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그리워하는 건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
난 그런 현실감에 목마른 것이다
자동차 바퀴살을 호이루라고 부르던 시절,
<빵구 나오시> 집에서 나는 살았다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의 구체성은
저 머나먼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그러나 내가 브라만을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봉지쌀 아트만이 사라졌듯이, 내 유년시절의 아트만들도
이젠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기분을 슬프다고 하는 것일까
이 범아일여의 천지에서 아니 슬픈 것이 무엇이던가
오십환짜리 백동전처럼 남루한 슬픔이지만,
슬픔의 화폐개혁은 아직도 기약 없어라
슬픔의 지폐에서 길어올린 육십년대 꼬마의 쾌락들,
땡이와 연필 함대, 크라운 산도, 코롬방 아이스케키…
고 코묻은 아트만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라는 말씀조차
내겐 더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브라만을 믿지 않듯, 지금 나는
온갖 종류의 아트만을 신뢰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렇다 …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거의 삼십 갑자가 흘렀다
그리고 나는 중년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제 난 구체성의 신, 일상성의 보살만을 믿기로 한 것이다
덧없음의 지우개 앞에, 난 흑판처럼 선뜻 맨살을 내밀 뿐이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하지만 못내 구체적인, 빵꾸 나오시 가게의 흙바닥에 굴러 다니던
호이루와 몽키스패너들의 그 완강함이다
나,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다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으리라
난 이제서야 그 옛날의 십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
그 슬픈 돈을 내고 구체적인 박카스를 한 병 사먹으리라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내내 위안받으리라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각성이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詩 진이정
내가 두 사람의 시들을 꼼꼼히 읽어본 바로, 시에 대한, 시대에 대한, 사람에 대한 고민은 죄송하지만 진이정 시인이 더 치열하다. 그런데 그는 왜 잊히는 걸까. 진이정이 쓰고 있는 시어들을 언급하면 당신은 짐작할지 모르겠다.
‘천지, 영겁, 백마부대 용사들, 기지촌, 이태원, 보광동, 인류애, 윤회, 보수화, 수호신, 카바레, 조국, 미국 중앙정보부, 아트만, 브라만, 보살, 강남 중산층, 사바세계, 굿, 민족반역자, 해탈……’
나는 이 시어를 부정적으로 가져온 게 아니다. 두 사람의 발화방식도 매우 상이하지만, 이 시어들은 기형도 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와 가난을 겪었지만, 기형도는 광주나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시로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결정적 차이는 ‘비겁함’과 ‘모던함’이다. ‘그의 죽음이 완벽한 액자’가 되었고, 그림은 전시되었다. 내가 정리하는 기형도 신화는 이것이다. 내가 그랬듯 지금의 독자들이 여전히 열광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이 비겁하고, 우리 속내를 모던하게 꾸미길 바라며, 겪지 않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흠모하는 자이기 때문에!!!
또 비교해 볼 시인이 있는데, 이 부분은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다.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같은 해 교통사고로 사망한 신기섭 시인도 <분홍색 흐느낌>(2006, 문학동네, 품절)이 유고 시집으로 나왔다. 그로테스크와 죽음의 향기는 진이정, 기형도보다 더 강렬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앞서 말한 결정적 차이 때문에 그리 알려지지 못했다고 나는 진단한다.
추억
봄날의 마당, 할머니의 화분 속 꽃을 본다
꽃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와 닮았다 마른 강바닥의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헐떡이는 몸의 소리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활짝
입이 벌어지더니 목숨을 터뜨린 꽃,
향기를 내지른다. 할머니의 입 속같아
하얀 꽃, 숨쉬지 않고 향기만으로 살아 있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향기, 귀신처럼
몸속으로 들어온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 속을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에서 천천히 숨쉰다
빨랫줄 잡고 변소에 갈 때처럼
절뚝절뚝 할머니의 몸이 움직인다
내 가슴속을 밟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금은 따뜻한 봄날이므로
아프지 않다고, 다 나았다고,
힘을 쓰다 그만 할머니는 또
똥을 싼다 지금 내 가슴 속 가득
흘러넘치더니 구석구석
번지더니 몸 바깥으로 터져나오는
추억, 향기로운 나무껍질처럼
내 몸을 감싸고, 따뜻하다
詩 신기섭
더불어 기형도와 김수영이 대중들에게 이토록 신화화 될 수 있었던 것도 앞서 말한 ‘비겁함’과 ‘모던함’이 만든 시세계, ‘이른 죽음이라는 완벽한 액자’, 이 구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ɑ가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호남형?
평단의 신화는 평론가들의 것이겠지만, 시장에서는 어림없는 소리다. 이 시장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평론의 신화화가 더 가중되고 있는 걸 그들은 모른다. 선택에선 영향을 줄 지 몰라도 詩의 수용은 오로지 독자만의 몫이다. 그 시들은 바로 우리의 ‘허위’였다!
내 짧은 변론은 여기서 마친다.
언젠가 과소평가된 다른 시인들에 대해서도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내가 살아있다면.
ㅡAgalma
덧)
죽은 이들을 함부로 말한 죄를 통감하며,
마지막으로 황현산 평론가가 진이정 시인의 해설로 쓴 문장을 가져온다.
순간을 그토록 옮기고자 한, 모든 죽은 시인에 대한 추도사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그의 시와 맺는 관계도 그 세계와의 관계와 다를 것이 없다. 육체가 정신의 좁은 감옥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시가 어떤 방식의 해방을 기약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의 삶을 통해서만 증명된다. 해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문제 자체를 없애버리는 해답은 해답이 아니다. 지우개에 지워지는 글자는 지워지고 남은 흑판으로가 아니라 지워지는 순간으로 자신의 존재를 영원에 새긴다."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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