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입 속의 검은 잎> )

 

당신을 안 지 20년이 지났어. 누군가에겐 20살 넘은 아들이 있다면, 내겐 20년 넘은 허무가 있는 셈이야. 책갈피로 꽂아두었던 낙엽이 페이지를 누렇게 물들이는 것을 매해 지켜보았고, 년도를 확인할 수 없는 메모들 속에 올해도 몇 자 끄적였어. 이건 희망일까.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 )

 

당신 시집 속에 희망이란 단어가 얼마나 많은지 당신은 세보고 죽었을까. 아니었을 거야. 20번도 넘을 텐데 나는 굳이 세지 않았어. '희망'으로 가장했지만 ‘허무’였지. 그건 세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 삶과 허무는 동등하며 계속돼. 진짜 ‘희망’ 또한 셀 수도 재현할 수도 없어. 그래서 당신은 미안하지만을 붙였을 거야. 그 문장에 이어지는 시 속에 떨어지고’, ‘덮는다’, ‘멎는다’, ‘쓰러져’, ‘굴러다닌다’, ‘떠나’, ‘없으니’, ‘나부낀다’, ‘들이닥쳤는지’, ‘알지 못한다’, ‘갈라졌으니’, ‘주저앉으면’, ‘감시해온’, ‘머물다’, ‘흘러온다’, ‘늙은으로 끝나는 동사들에서 희망’은 계속 실패 중이지. 형용사들도 마찬가지고. 당신의 시집 전체가 그렇지.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植木祭> ) 각오는 무력하고,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물 속의 사막> ) 말하는 자조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 ) 말하는 탄식은 스스로를 휘어잡지. 무관심만이 우리를 쉬게 한다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는 없어진다”(<종이달> ) 말하며 추억을 부르고 죽여도 이 허무는 계속돼. 글로 집을 짓고 버리는 한 내내.

 

“‘내버려두세요. 뭐든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까?’ …… 아무도 없을 때는 발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 법이죠스위치를 내릴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 가슴 알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그 소리는 분명히 내게 들렸다.”(<소리 1> )

 

끈질기게 귀 기울이는 <소리 1>에 이어지는 시는 <소리의 뼈>. 소리의 뼈가 무엇인지 우리는 많은 견해를 내세우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보다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소리의 뼈>中) . 하지만 슬픔은 유예된 것에 지나지 않지.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 순간은 나타나자마자 죽어. 잃어버림과 시간은 영원한 짝.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럽지만 창밖에서 사내의 울음을 중지시키지 않고 들어주는 일(<기억할 만한 지나침> ). 나는 당신 시집을 그렇게 들어주고 있어. 매년. 당신은 알지 못하지. 나는 살아남았지만 당신은 없어. 당신이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나도 당신에게 그래. 당신이 짐작하지 못한 '희망'이 이런 거면 안 될까.

 

나도 미안하지만 이거 하난 짚고 넘어갈게. 당신은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詩作 메모)고 말하면서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썼어.

밤눈은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아. 지상도 거부하지 않고. 그렇게 연결 짓는 건 우리야. 나는 이걸 교훈 삼고 다른 걸 생각할 거야. 그런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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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은 시인을 위한 변론, 그리고 두 갈래 고해
    from 공 음 미 문 2015-06-07 03:43 
    § 나는 어제 기형도에게 편지를 쓰며, 이제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밤 그렇게 멍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매번 이 모양이다. 아, 차라리 기형도를 몰랐다면. 이 생각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죽은 당신이 원망스럽다. 당신이 해명 좀 해! 무지했던 어린 내가 기형도를 신화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선고는 잊을 만하면 날아든다. 이제 이건 내 문제다. 삶은 늘 이런 식이지. 이 글의 계기는, 흔적님 <신화화, 매혹, 시
 
 
AgalmA 2015-06-0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오늘부로 버린다

2015-06-05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5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5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애 2015-06-06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난 적 없지만 소년이며 청년 시절엔 전 그의 그림자 같기도 하였죠.

AgalmA 2015-06-06 15:00   좋아요 0 | URL
기형도....제 인생을 참많이 뒤흔든 지진였어요.....지금도 그 여진이 가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