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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평점 :
§ 로마의 테라스는 어디이며 무엇인가
소설에서 ‘로마의 테라스’(p37)는 단 한번 언급된다.
판화가 몸므는 로마의 테라스에서 천국의 이미지를 판각하며 몰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몸므는 이 예술의 황홀경에 대해,
"질료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하늘이야. 하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생명이지. 생명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자연이고, 그러면 자연은 자라서 각양각색의 형태들로 모습을 드러내네. 그 형태들은 자연이 품고 있던 이미지라기보다는 공간을 휘저으면서 고안해낸 이미지들이야. 우리의 육체도 자연이 빛의 도움으로 시도했던 하나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육체적 사랑(이 또한 황홀경)의 공간은 얼마나 어둡고 누추했던가.
정원, 침실, 지하실, 제조소, 다락방, 반찬가게, 작은 배.
첫 장에서 몸므는 사랑의 실패 후, 이탈리아로 가 2년 간 해안 절벽에 숨어 살았다고 말한다.
그 살레르노 만을 굽어보는 벼랑은, 나니를 향해 몸므가 만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좁은 내면의 공간이기도 하며, 육체적‧실재적 엑스터시를 초월하려는 예술적 엑스터시로의 발판이기도 하다.
몸므의 판화들에서 제시되는 '고딕식 망루의 꼭대기'(<파트모스의 성 요한>, <헤로와 레안드로스>), '절벽'(<1667년 6월 판화>)과, 몸므가 죽기 전 꾼 '꿈'들(灣이 내려다보이는 창, 물 위의 나무 부교, 루브르 궁전과 넬 탑, 다리)은 절대 고독으로 투영된다. 그리고 그 주위는 일체가 어둡다. 그때 무엇이, 누가 몸므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 그가 허용하는 예술만이 가능할 것이다.
추락의 공포와 어두운 아름다움이 깔린 그 고도(高度)의 위치가, 파스칼 키냐르가 몸므에게 제공한 공간이었다.
바슐라르가 니체의 저작들에서 “심연은 높은 곳에 있다”라는 메시지를 읽었듯이, 바슐라르가 이 소설을 봤다면 키냐르를 ‘공기’의 시인 대열에 넣었을지도 모르겠다.
‘로마의 테라스’라는 제목 자체만으로 파스칼 키냐르의 주제의식을 읽어볼 수도 있겠다. 17세기 바로크예술의 중심인 ‘로마’, 그 당시 고딕 양식의 하나인 ‘테라스’를 생각할 때, ‘로마의 테라스’는 ‘절대예술을 추구한 한 예술가’의 상징으로 읽힌다.
§§ 왜 판화인가
마지막장, 몸므의 어린 시절 삽화와 늙은 그의 표정을 오버랩시킨 것은 왜 일까. "불확실한 표정에 얼굴의 흉터가 보태져 더욱 애매…" 이 표현은 판화처럼 몸므에게 새겨진 삶을 말한다. 뒤이어 몸므의 커다란 눈이 검은 물 아래로 서서히 잠겨가듯 소설은 막을 내린다. 많은 사건들을 겪지만 우리는 기억의 편린, 장면들만 간직한 채 살아간다. 질산을 붓거나, 도구로 긁어내거나 하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만들어지는 판화는 결국 우리의 굴곡진 삶에 대한 은유이다.
§§§ 형식인가, 내용인가
어느 예술장르든 전위적인 작품의 탄생은 늘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그로 인해 문화의 범주가 넓어진 건 부인할 수 없다. 앤디워홀의 캠벨스프 판화나 뒤샹의 샘 같은 개념 미술, 인상파나 야수파들의 등장, 초현실주의 ‧ 다다이즘 시들, 메타픽션과 SF 같은 장르소설 등의 새로운 예술의 탄생들. 하나의 작품은 한 예술가, 한 작가의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반대의 제스춰라도 시대와 문화를 포함한 산물이다.
형식의 낯설음으로 인해 작품들을 외면하기보다 그 내용의 직조에 더 관심과 호응을 보낸다면 다음 작품, 다음 문학에 대한 격려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도착한 그들은 또 우리를 위로하고 사랑하고 세상을 함께 바꾸려....
키냐르의 소설을 많이 낯설어 하지만, 나는 그 문장들이 소설의 기원인 읊조림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한 번으로 사라지는 읊조림 말이다. 다음 문장에게 길을 내어주고 사라지는 음률들.
우리는 무수히 언어를 붙잡고, 배척한다. 언어 앞에 자유는 있겠지만 권리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생각을 오래 고민해봐야 한다.
ㅡAgalma
§§§§ Musee Maillol (French,1861-1944) / La Riviere (The River)
§§§§§ Air
프랑스 소설 소개라 프랑스의 유명 일렉트로닉 뮤지션 Air를 모셔 왔습니다.
"사람은 늙어갈수록, 자신이 통과하는 풍경의 광채에서 몸을 빼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네. 바람과 세월에 닳고, 피로와 기쁨에 탄력 잃은 살갗, 갖가지 체모, 눈물, 땀방울, 손톱과 머리카락, 이런 것들이 마치 낙엽이나 죽은 나뭇가지처럼 땅에 떨어져, 두툼한 살갗 외부로 점점 더 빈번히 빠져나가는 영혼을 흩어지게 하지. 마지막 떠남은 사실상 흩어짐에 불과해. 늙어갈수록 나는 내가 도처에 있음을 느끼네. 이제 내 육체 속에는 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두렵네. 내 살갗이 지나치게 얇아졌고, 구멍이 더 많이 생겼다고 느끼지. 난 혼자 중얼거리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p82)
몸므가 대답했다.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삶이 영위되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지. 삶을 산 채로 집어 삼키는 시간만 보이는 걸세. 그러면 가슴이 저리지. 우리는 나무토막들에 매달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을 느끼며 피 흘리는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는 하지만 그 속에 떨어지고 안간힘을 쓴다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매혹적인 하룻밤이 있어. 저녁마다 여자들과 남자들은 잠이 들지. 그들은 마치 어둠이 추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밤 속으로 빠져들어. 그것은 추억이라네. 남자들은 때로 자신들이 여자들과 가까워진다고 믿지. 그들은 여자들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네. 그녀들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고 팔을 뻗어. 그들은 저녁마다 상대방의 몸을 향해 돌아누워 서로 옆구리를 맞대고 잠이 드네. 그렇다고 더 깊이 자는 것도 아닐세. 그들은 단지 밤의 노리개에 불과해. 그들을 태어나게 했고, 어디서나 무엇에나 그림자를 드리우는 보이지 않는 장면의 노예일 따름이야."(p128)
클로드 로랭은 웃었지만, 몸므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진지한 태도로, 우리는 무슨 말을 하든 언제나 거짓을 말하게 된다고, 또 진실을 주장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일수록 그만큼 더 거짓을 말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여보게 친구, 진실이란 그런 거야. 아무도 거짓말을 하면서 완전히 거짓말만 하지는 못하는 걸세."(p134)
번역가 송의경의 해설 中
… 1은 최초이며 지금은 잃어버린 불가능한 사랑, 곧 어머니이다. 현실의 어머니가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는 첫사랑이다. 적어도 키냐르의 요나들에게는 최초의 사랑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랑은 첫사랑뿐이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첫사랑은 이미 두 번째이므로, 나니와 네미의 머리글자가 N인 것은 전혀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N은 M과 유일하게 비슷한 철자이면서 바로 다음 M 다음에 오기 때문이다. 첫사랑 여인의 이름은 모두 N으로 시작한다. 『은밀한 생』의 화자인 `나`는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네미 사틀레라는 이름은 가짜다. 이 세상에 존재했었으나, 이제는 없는, 내가 사랑했던 한 여인을 나는 그렇게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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