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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옮긴이 김현경씨가 머리말에서, 예전 번역본 <상징권력과 문화재생산>(정일준, 새물결)에 대해 일갈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다.
˝독특한 (자의적인) 구성과 인상적인 옮긴이 서문, 그리고 기념비적인 오역을....˝
원서든 오역본이든 본질을 제대로 간파했다면 다행이겠다. 프리모 레비는 언어를 배울 때, 말하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객관보다 자의적 해석이 더 많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마지막 강의>에서 객관성의 속임수보다 주관성의 속임수가 더 낫고 주체의 상상계가 주체의 제거보다 더 낫다고 말했지만, 나는 객관성의 착각이 주관성의 착각보다 더 고치기 쉽고 객관성의 모색이 주관성의 불통보다 더 낫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ㅡ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인정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무비판적 수긍은 우리를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언어가 통과한 `나`라는 유령.
속의 소용돌이를 언어로 바꾸며 경색되어가는 그 모습들에서 자주 끔찍함을 느낀다. 내 말들도 끔찍하다. 언어는 도대체 왜 이런 것인가. 자연에서 추출한 추상미술과 언어 둘 중 누가 더 나을까. 그렇다고 음악은 자유로울까. 조금 더 자유로운 거겠지. 존재하기 위해 틀을 감수한다.
형상 없는 신의 말씀을 들었다고 치자. 우리 지식으로 어떻게 이해 가능한가? 텔레파시로? 혹은 전파를 보내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스템 같은? 오, 비루한 내 언어능력이여. 어떻게든 번역해서 전달한다고 치자. 몇 %나 제대로 도착한 것일까? 여전히 진행 중인 거 같은데? 결국은 다 불가해하다고 하는 것 같은데? 많은 걸 배웠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 같은 앎이여. 결국은 무지한 승객들이 탄 순환선에서, 나는 역 하나를 보았고 내렸다. 알라딘 서재라는 곳인데, 최근 북플로 최신식 개장을 했다고 떠들썩했다.
진열대에서 책 하나를 빼들었고, ˝각자가 지닌 언어자원을 활용하여 상징적 이익을 얻는 행위˝라는 문장에서 이곳의 이미지를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멀리서 여길 보고 있는 존재는 뭘 느낄까. 이 지식공장은 날마다 바쁘다. 산업혁명 시대 방직공장 저리 가랄 정도~
읽고 쓰는 것 ㅡ 윤리를 염두에 둔 자라면 그 행위를 ˝반성˝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왜? 왜? 왜? 나 ˝해! 해! 해!˝만 반복하여 말한다.
보고 듣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식물인간? 죽음? 그렇게 단순한 답일 리가..... 답이 아니라 나는 원하는 걸 알아보길 바라는 거겠지. 그리고 내내 무지한 채 이 언어를 반납하길 기다린다. 그전까진 어떻게든 더 챙기겠지. 지식과 언어의 프롤레타리아여.
ㅡ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