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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는, 존 허시『히로시마의 증인들』을 위대한 저널리즘 작품으로, 대니얼 디포 『역병이 돌던 해의 일기』 (국내 번역 제목 『전염병 연대기』 , 신원문화사, 2006)를 위대한 저널리즘 소설이라고 꼽았다.
세월호에 있어, 우선적으로 저널리즘 기록이 다양하게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마르케스는 저널리즘과 소설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말했지만, 시의 모호한 함축성과 소설의 영역성(단편은 국지성, 장편은 완성까지의 시간 · 작가의 한계)을 생각할 때, 사태의 엄중함을 직시하기에 나는 세월호에 대한 저널리즘 기록들이 시나 소설보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이 진술이라면, 저널리즘 기록은 결정적 증거일테니 말이다.
어딘가를 찾아갈 때 나침반과 직관 중 어느 게 더 나을까. 이런 비교는 효용성의 문제일까. 문학은 너무 뒤늦은 탐지 기록이다. 저널리즘과 문학이 사건들을 모으고 해석하고 정리하여 보고하는 식은 유사하지만, 문학은 점점 더 느려지고 정체되어 가고 있다. 물론 많은 예언적 문학도 있어 왔지만 그걸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도 드물었고 현실에서 방책이 되는 것은 최소한의 영역이었거나 엉뚱한 곳이었거나 아주 나중 일이 되기 일쑤였다. 최근엔 저널리즘과 소설이 합쳐진 형태의 영화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부러진 화살>, <도가니> 등등. 헌데 다이빙 벨과 천안함에 대한 다큐들의 부진한 호응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전달의 방법을 고심하게 된다.
문학은 언제나 문학 속에서만 빛났고 계승되었다. 문학이 작금의 사태에서 뇌관으로 제대로 작용하여 터져 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을 읽는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변수와 작가의 능력 중 어느 게 더 선행되는 것일까. 무엇이든 기다리고만 있기엔 세월호 사태는 매우 긴급하다.
저널리즘과 소설을 같이 본 마르케스도 이러한 사태의 어려움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쿠바 사태에 관련해 그 당시 그곳의 소설들은 시대의 수행자 역할을 자처하고자 했고, 오히려 소설의 힘은 더 한계에 봉착했고 더 빈약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많은 후일담 소설들이 과연 무엇을 성취했는지 생각해보라. 그때는 그랬구나, 잊지 말자, 기억하자, 그리고 나서 이 나라는 뭐가 그리 달라 졌나.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경우는 어떤가. 그 소설을 읽고 누가 그렇게 역사성에 대해 고민했나. 온통 토마시와 테레사,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 또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소설, 소설의 칭송만 가득할 뿐 역사는 읽을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마술적 사실주의라 칭송되는 마르케스『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실제 역사성을 곱씹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p415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말은 요즈음은 글로벌 의류 회사 갭에서 만드는 바나나 리퍼블릭이라는 브랜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어두운 출생 배경을 갖고 있다. 20세기 초 온두라스, 과테말라, 콜롬비아 등 중남미의 바나나 생산 국가들을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라는 기업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때에 나온 말이다. 가장 끔찍한 비극은 1928년 콜롬비아에 있는 UFC 바나나 농장에서 파업하던 노동자들이 대량 학살된 일이다. 당시 미국 해병대가 UFC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자, 콜롬비아 정부는 자국 군대를 파견해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노동자를 죽였다. (정확한 수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콜롬비아의 위대한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명작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소설화되기도 했다. 미국의 초국적 기업들은 미국 군부 우파 및 CIA와 손잡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남미의 좌파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적극 협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시계를 볼 때 우리는 비유나 이상 세계를 바라는 게 아니다. 어떤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해도, 시계를 보는 행위 자체와는 사실 무관하다. 행위는 행위 자체의 목적성이 있다. 욕망에 충실하든 저버리든 선택은 그 이후다.
현실에서는 반드시 당면한 명시성이 대두되어야 할 사안이 있다. 저널리즘은 분야가 아니라 모든 이의 정신 속에 있어야 한다. 그때 현실은 정상적인 작동이 가능할 것이다. 헌데 계속되는 이 깜빡거리는 초침. 시간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곳은 현실인가, 지옥인가.
분명한 것은 세월호를 바닷속에, 세월호 피해자들을 현실 속에 부식되어 가게 놔둔 채 끝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문학이든 기록이든 한탄이든 무엇이든 계속 나와 달라. 온 나라 사람들이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내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란다. 꿈속에서까지 모두가 지옥에서와 같이 시달리길 바란다. 잠에서 깨고도 망각하지 못하도록.
대선 비리와 연루되었던 국정원을 비롯 각종 정부기관이 한국이라는 바다를 유유히 순항하도록 놔두지 않았더라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반성의 반성을 거듭해도 사무친다.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된다. 죽음의 단계를 보통 부정(거부)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이라고 한다지? 세월호에 있어선 오로지 진상 규명 밖에는 없다. 그것이 과연 해결일까도 가늠하기 어렵다.
ㅡ 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