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안부’ 문제의 횃불이 세상에 언제 등장한 지 아십니까?
1992년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 발언의 근거가 된 ‘위안부’ 관계 문서를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 씨는 이렇게 말했다.
“1991년 8월 한국에서 김학순 씨가 처음으로 본명을 밝히고 나왔다. 1991년 12월에 일본군 ‘위안부’였던 두 분과 전 군인 군속 및 그 유족들이 함께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도쿄 지방 재판소에 제소했는데, 그 단계에서 일본 정부는 관여를 부정했으며 자료도 찾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연히 내가 그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조사해 1992년 1월에 《아사히신문》에 싣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부정할 수 없게 된 정부는 관여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주석 p292, 이하 페이지 언급들은 모두 이 책에 기반함)
양국(일본/한국) 정부의 회피만큼이나 한국 대중 또한 현실문제에 있어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그게 묻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전쟁피해에 대한 배상차원의 ‘과거사’ 문제가 아니다. 저자 우에노 지즈코의 다음 말은, 역사 앞에 낱낱이 흩어져 있는 우리의 허점을 정확히 찌른다.
젠더사의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역사 방법론과 관계된 근원적 물음과 연결되고 있다. 그것을 ‘위안부’ 문제만큼 절실하게 나타낸 예는 없다. 단지 ‘사실’이라는 점에서 ‘위안부’의 존재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변화한 것은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 그 자체가 매춘(이라는 사실)에서 강간(이라는 사실)으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피해자의 치욕에서 가해자의 성범죄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데 반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p141)
실증 사학 아래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구술이나 증언을 인정하지 않았고 공문서 사료가 없다는 식으로 문제를 일축했으나, 앞서 소개한 요시미 요시아키 씨 같은 역사의 진실에 대한 사명감을 가진 이가 있어 ‘사료’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고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었다. 사료가 있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도 아니다. 지배 권력 측이 요구하는 정통 사료를 피해자가 입증해야 되는 또 다른 시스템이 기다리고 있다. 이거 지금 이 사회에서도 많이 느껴지는 점 아닌가? 세월호 가족들과 뜻을 합친 사람들이 찾아낸 증거들, 난항이 거듭되고 있는 세월호 특위 · 특별법과도 연결되지 않는지?
이제 법리 싸움은 다음을 말한다. “법리는 위정자(강자) 측 사정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때 법적 투쟁이란 사전에 '상대방의 씨름판'에 올라갈 것을 강요받는 불리한 싸움”(p149)이라는 점에서, '위안부' 문제가 전쟁 당시에는 (납치, 강제에도 불구하고) '공창제'가 합법이었다는 것과 거슬러 올라가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법리상의 벽에도 막혀 있다. 이미 박정희 정권일 때 알량한 배상금까지 받아 챙긴 마당 아닌가(※그 돈은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어디로 간 건지 행방도 묘연하다). 또 세월호 생각이 겹치지 않는지? 피해보상금도 주는데 국민 세금 낭비해서 굳이 선체 인양은 왜 하는가, 말하는 자들의 논리 말이다.
이런 역사적 인식의 문제들은 어느 나라든 현재적인데,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입구에 있는 테오도어 루즈벨트 동상에 대해서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p150, 주석 p293)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도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동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사진을 찍은 게 인터넷에 아주 많다. 그러나 문제의식을 느끼며 코멘트를 달고 있는 글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내 글에 누군가의 사진이 언급되는 게 실례일 것도 같고, 저작권 문제도 있어서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한번 찾아보시길. 얼마나 이상한 동상인지. 루즈벨트는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있고, 그 양편으로 흑인 노예와 아메리카 원주민이 수행자처럼 있다. 식민주의적인 표상이라고 원주민 단체가 항의하고 있음에도, 이 동상은 미국의 노예제, 정복사(“원주민 관점에서는 학살”)에 대한 반성의 허위성을 보여주며 굳건히 거기 서 있다.
저자는 ‘위안부’ 문제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었던 것으로,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여성운동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억압해 온 고통의 기억과 침묵의 시간을 깨고 증언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1961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에 유대인 피해자들이 증언하기 위해 나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피해의 기억은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과 그것을 들으려 하는 귀가 존재함으로써 처음 ‘현실’로 떠오른 것이며, 그곳(아우슈비츠-Agalma 해석)에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죄-Agalma 해석)로서 있는 그대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p158)고 말이다.
그들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위안부’ 문제도 ‘과거의 사실’이 아니며, 1년 전 세월호의 억울한 죽음과 피해자 가족의 억울함도 결코 ‘과거의 사실’이 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다 언급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시대의 피해자분들의 아픔도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아닌 것을 ‘아니었다’로 끝내고 넘기지 말아야 하며, 끊임없이 역사와 사실을 재심해야 한다. 진실이 하나인 것처럼 믿고 싶어 하지만, 역사는 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그 역사를 만들어 온 우리 자신처럼. 어제의 고민과 내일의 고민을 동시에 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처럼.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가 단순히 한-일 양국 간의 정치적 쟁점인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반세기가 지나 용기를 갖고 싸우려 나섰음에도 별다른 해결도 보지 못한 채 한 사람씩 숨을 거두는 이 사태가, 얼마나 더 지속될까, 나는 아득하다. 그녀들이 끌려나갈 때 말리지도 못했고, 돌아왔을 때 안아주지도 못했던 현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그 패러다임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힘은 다 어디로 간 건가. 그 뜻을 이을 형제‧자식도 없이 다 굶어 죽었나. 위안부 할머님들이 1991년 그렇게 나선 지 올해로 벌써 24년이 지났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비참했던 이 1년을 생각해보건대, 반세기 이후에는 세월호 참사 문제도 해결되었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 이 횃불들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책은 역사라는 허위, 가부장제 권위주의 사회의 허위, 국가와 국민화의 허위 속에 창부로 끌려 나간 여성만의 문제를 담론하고 있지 않다. 저자가 일본 작가지만 오히려 보통의 한국 사람보다 문제를 더 잘 직시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자는 취지가 아니라, 이 책은 인권,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볼 수 있는 책이라 모두에게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
[세월호]와 관련된 책들 또한 마찬가지다.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것으로 끝내지 말자. 읽고 그다음엔 반드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생각하고, 알리고, 외치고, 모이고, 일어서 나가야 한다. 내 속에 머무는 자가 아니라, 어디 있든 출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삶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만난 듯 사람을 향해.
ㅡAgalma
Jan Garbarek [Officium] ( ECM 2125,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