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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ory girl》에 대한 대부분의 리뷰들은 앤디 워홀의 60년대 뮤즈였던 이디 세즈윅이란 인물의 안타까운 몰락에 초점이 그쳐버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다 보고 나서도, 그녀가 예술가였을까 하는 점이 고민이었다. 내 욕심에서는 감독이 영화를 못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컷은 팩토리에서 서부 영화를 찍는데 영화 속으로 앤디 워홀이 걸어 들어가 전화를 받던 것... 말이 히히힝대고 전화벨이 울리는 평행우주. 앤디 워홀의 전위성을 그대로 보여주던...
《Factory girl》에서, 시대 아픔을 노래로서 싸워나간 아이콘으로 밥 딜런을 갖다놓고, 앤디 워홀은 출세에 현혹돼 주변을 착취하는 예술가쯤으로 대비시켜버리는 데서, 과연 그렇기만 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감독은 앤디 워홀에 대한 백과사전만 한 평전을 보고 이 영화를 찍었을까. 앤디 워홀이 예술가로 본격 입문하기 전에 신문 삽화 만화를 얼마나 멋들어지게 그렸는지 봤을까. 그의 모든 작품들 속의 예술적 끼를 보려고 노력이라도 했을까. 아니, 아니라고 본다. 감독은 각본에 그냥 충실했던 것 같다. 각본을 쓴 캡틴 모즈너도 심층에 대한 이해보다는 혹은 무시하고 이목을 끌만한 이야기를 만들기에 바빴던 것 같다. 오, 세상에. 이 영화는 예술은 그저 무대배경이고 나는 그 유명한 인물들의 일화를 찍었을 뿐이에요. 하는 영화다. 나는 앤디 워홀이라는 예술가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어떤 성질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재능'에 대해서 요네하라 마리가 말한 것에 대해 나는 동의한다. 재능을 꽃피우는 힘도 재능 속에 포함된다는 것. 이 말은 재능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창작자들의 뛰어난 재능이 우리의 고정관념을 부술 때 예술적이다, 천재적이다라며 왕관을 씌워준다. 이러한 천재 예술가들 주변엔 늘 낙오자가 있기 마련인데, 이때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자주 거론한다. 헌데 천재와 주눅 든 이인자라는 컨셉은 극대화된 영화 속 픽션이다. 예술적 성취를 떠나 실제 삶에 있어선 살리에르는 궁정악장으로 노후까지 잘 먹고 잘 살았고, 모차르트는 알다시피 빚에 쪼들려 단명했다. 예전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로댕 같은 천재 예술가들에 비해 빛을 보지 못한 천재들이 더 많았다. 고흐, 에곤 실레 등등.
현대의 천재적 예술가들의 삶은 양상이 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현재적으로 꽃피울 뿐만이 아니라 잘 팔 줄도 안다. 피카소나 앤디 워홀은 그걸 잘 알았고 즐겼다. 예술이 본격적으로 산업이 된 지금, 뱅크시 같은 예술가는 예술을 포장하고 우러르는 어리석은 세상을 끝없이 조롱한다. 그 조롱마저도 상품화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점은, 이디 세즈윅과 앤디 워홀이 갖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재능에 대한 자세다.
표출할 줄 모르는 자(이 말은 이미 재능 없음과 동일)와 쓰레기조차도 끝없이 재창조하여 제시하는 자.
피사체가 되는 것에 빠져 있는 자(스타)와 피사체를 만들며 즐기는 자(예술가).
나는 재능이 있는데 세상이 몰라준다! 고? 내 편협을 인정하고서도, 나는 우리나라 거리 화가들에게서 예술가를 느낀 적이 없다. 멋진 전시장이 아니라서, 알려지지 않아서, 가난해서 멋진 재료를 쓰지 못해서의 문제가 아니다. 그 붓끝엔 재능의 들끓음이 없다. 습관적이고 그 시간에 대한 집중만 있을 뿐이다.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손바닥만 한 그림일지라도 이중섭의 재능은 발견된다. 이 경우는 타고난 재능이라 좀 억울할 수도 있다. 우리가 예술가에게서 보는 것은, 예술의 재능은 답습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고 발견해낸다는 것이다. 예술을 이끌어낼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그러나 대부분은 중도에 포기한다. 이 길이 아니었나 보다고, 운이 안 따라 줬다고. 이디 세즈윅처럼 만신창이가 안 되어서 어쩌면 다행이라고 위안 삼으며, 이제 남은 생 동안 먹고살 일을 걱정한다. 여기서 모범이 되는 예술가가 바로 고흐다. 그의 초기 데생들은 요즘 웹툰 만화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스포트라이트도 부도 없이 오직 자신의 재능을 광부처럼, 농부처럼 캐냈던 사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술 관점에서 본 국한된 해석이고, 요즘의 예술은 앤디 워홀 시대보다 더욱 기술과 아이디어와 비즈니스의 場이 돼가고 있다. 이미 예술도 레드 오션이다. 넘쳐나는 클리셰, 표절, 모방들(각종 리메이크와 콜라주), 상품화에 열 올리는 시장, 소비를 지식으로 아는 대중. 요즘의 예술은 아주 골치 아파졌다. 이 모든 것들을 편집하는 창작의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은 이걸 파악하고 그 스스로 가치·생산·소비를 완벽히 구축해 간 인물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겐 돌 맞을 소리일 수도 있지만, 우리 솔직해지자. 프롤레타리아들이 원하는 혁명은 도덕적 평등이나 부르주아의 몰락이 아니라 자신도 부르주아가, 욕망이 되고 싶다는 거다. 앤디 워홀은 그런 인간의 욕망을 뿌리 깊게 간파해 낸 사업가이자 예술가였다. 그는 미술뿐만이 아닌 잡지, 영화 등 활동 영역을 전 방위적으로 넓혔고, 사람들은 부와 명예를 좇아 워홀의 팩토리로 늘 몰려들었다. 그렇게 워홀은 온갖 매체들이 자신을 인터뷰하게 만들었다. 생산되자마자 가치로 바뀌고 상품이 되는 예술. 워홀은 상품이 되자마자 바로 다음 예술로 전진한다. 그것은 또다시 상품이 된다. 워홀은 끝까지 잡히지 않으려 했다. 그렇듯 워홀의 예술은 데리다가 말하던 '미끄러짐'이었다. 예술은 느긋하게 스웨터나 만드는 시간이 아니다. 앤디 워홀이 수 십 장씩 찍어낸 실크 스크린 작업이 쉬워 보인다면, 직접 해보라. 공간이 순식간에 고추장 공장이 되는 걸 경험할 것이다. 고추장일지 예술일지, 해석도 되기 전에 확률 싸움이 된다.
작업의 노고만이 아닌 온갖 세파의 오물에 맞서야 하는 예술가의 삶 앞에서, 이디 세즈윅과 앤디 워홀은 그렇게 대비되고 있다. 나는 앞서도 말했다. 그들은 예술의 방법적 문제가 아니라 재능의 자세 문제라고.
망가진 이디 세즈윅이 앤디 워홀을 맹비난하며 울부짖을 때의 마지막 대사가 그래서 더 가슴 아팠다.
"당신이 우리 보스잖아."
자신의 재능을 위해 노력하지도 못 했던 자의 변명.
영화에서는 없었지만 앤디 워홀을 동경했던 이디 세즈윅과 바스키아가 각기 어떤 식으로 자신의 예술을 성취했는가를 생각해보라. 안타깝게도 이디 세즈윅은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어떤 세파에도 자신의 예술을 꺾지 않는 인간이다. 예술가란 자리에 시인, 작가, 깨달은 자, 혁명가, 무엇으로 바꾸든 이 말은 손상되지 않는다. 그는 몰락할지언정, 그의 예술은 탈출하여 기필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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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디 세즈윅이 예술가였는가에 중점해서 이 글을 썼다. 이 작품으로 이디 세즈윅의 삶을 가치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영화가 이디 세즈윅이나 앤디 워홀에 대해 더 고민했었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크다. 사람에 대해, 그것도 실존했었던 사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 일인가,를 절감케 했다.
그리고 앤디 워홀과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와 니코를 아우르는 스토리가 영화 관객으로서는 더 기대된다는 점. OST도 엄청 멋지게 만들어졌을 테니까! 가만-_-, 루 리드가 얼마 전 세상을 떴으니 곧 영화화될 수도 있겠군.. 흠.
ㅡ Agalma
* 『21세기 자본』을 능가하는 『앤디 워홀 일기』의 두께;
언제 다 읽을 지 모르겠다. 그러니 묻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