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욕망 자본론 - 욕망의 눈으로 마르크스 자본론 다시 읽기
신승철 지음 / 알렙 / 2014년 8월
평점 :
[BGM: Antonio forcione – Dedicato http://youtu.be/6wAhi5pklFk]
§ 북플에는 싫어요 버튼이 없다
자본주의와 뗄 수 없게 된 욕망을 모두 펼치거나, 쳐부수거나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을 전격적으로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욕망은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고 그 정동을 잘 파악하기도 어렵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것의 좋고 나쁨/옳고 그름을 가려낼 능력도 별로 없다. 기쁨을 서로 다르게 본 스피노자와 애덤 스미스의 예만 봐도 말이다.
p49 스피노자가 생각한 정동(affection)과 애덤 스미스가 생각한 감정(emotion)은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기쁨인데도 말이죠. 스피노자는 상대방을 사랑할수록 사랑의 능력이 증폭되는 정동노동과 같은 영역을 의미하는 데 반해, 애덤 스미스는 감정을 소모해서 적정 수준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는 감정노동과 같은 영역을 의미합니다.
(네 번째 편지 – 시장 자유주의인가 공동체 자율주의인가? 中)
ㅡ(Agalma) 스피노자와 애덤스미스가 차를 마시는 정경을 그리는 저자의 상상이 아주 재밌다ㅎㅎ
논점으로 돌아와, 문제점 때문에 좋은 점도 포함해 싹 없앴다고 치자. 그런데 그 모든 욕망을 처단하고 남는 것이 사람이고, 세상일까?
욕망은 양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욕망을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말과 생각이 표출하는 열광과 환호는 예속과 복종의 제스처일 때가 많다.
p26~27 빌헬름 라이히(1897~1957)가 『파시즘과 대중심리』에서 부른 ‘성격갑옷’이란,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기(being)라고 불렀던 상태와 유사합니다. ‘나는 군인이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간호사다’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표정이나 외양, 근육이나 신체까지도 자신의 직분에 맞게 만들고 역할과 정체성 내에서만 움직이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성격 갑옷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사랑과 욕망의 흐름에 몸을 싣지 못하고, 오히려 욕망을 억압하는 데 욕망을 동원한 당대 파시스트의 모습이 이 책에서 묘사되어 있죠.
p29 스피노자(1632~1677)는 『에티카』에서 “왜 인간은 예속을 영예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 문제제기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자는 무엇을 정의하기보다는 색다른 문제제기를 잘 해야 한다고…색다른 문제제기는 색다른 사유의 경로를 개척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죠. 스피노자는 ‘예속인’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의 해방 전략을 제시하였습니다.
(두 번째 편지 – 욕망은 마조히즘인가? 中)
모든 웹 시스템에 필수 인테리어로 달려 있는 수많은 좋아요♥ 버튼을 누르기 전 혹은 후, 그 속에 과연 몇 %의 당신 생각이 있는가. 좋아요♥ 버튼을 우린 물신하고 있지 않은가.
p54~55 고정관념을 개념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소쉬르(1857~1913)의 기표(signifiant)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소쉬르는 언어기호를 청각영상과 개념 즉,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서 파악할 때 자신의 이론이 자의성을 갖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쉬르의 의도와는 달리 구조주의자들에 의해서 기표의 질서는 고정되고 동결된 기호 작용으로 재해석되고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를 ‘기표 독재 체제’라고 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고정관념으로서의 기표 질서가 장악한 자본주의는 ‘흐름’을 내쫓아버립니다.
(다섯 번째 편지 – 흐름인가? 고정관념인가?)
책 좋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이 책 싫어요 버튼이 있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논점은 버튼만 누르고 끝나는 그 지점에 있다. 흐르고 충돌하지 않는 생각과 감정의 단선.
좋아요♥ 버튼은 니카자와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에서 언급했던 대로, '상품'이 아니라 '선물'(p56)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내겐 그것이 "가장 선물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상품권"(p153)같이 보인다. 주는 행위 이상의 문제도 있는데, 좋아요♥ 버튼을 받고자 하는 우리 자세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절망적으로 동조를 바라는지. 반대 의사를 밝힐 때조차도 좋아요♥ 버튼을 바라지 않는가. 좋아요♥ 버튼이 없는 것에서 곧 싫어요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받기 위해 주는 등가교환은 아니고?
이런 감정의 기이한 전이들에 물들기 전에, 우리는 이 공간과 시스템부터 고찰하고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 저자의 말에서 나는 '북플'에 대한 고찰을 해볼 단서를 찾았다.
p59 이미 자본은 ‘흐름의 잉여가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탐을 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공동체적 관계망과 집단지성, 흐름의 시너지 효과 등이 자본이 탐내는 영역이라는 점이 최근 들어서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소 양가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행동양식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등은 시장과 공동체를 함께 품고 있는 사회적 경제 영역이 자본과 공동체라는 두 영역의 교차점으로 보이는 역설이 드러납니다. 물론 사회적 경제를 ‘공동체에 대한 자본의 포획이다’라는 식의 염려와 지적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섯 번째 편지 – 흐름인가? 고정관념인가?)
순진하기만 한 건 아닌 우리는 ‘북플’이 우리를 위해서만이 아닌 건 알고 있다. 이곳의 모든 글들이 다 폭파돼도 우리는 어떤 권리도 없다. 당신이 이곳에 남긴 감상과 사고, 열정, 애착 그 모든 것은 이곳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모든 글들을 Ctrl+V해야 할까. 걱정마라, 그쪽도 우리가 필요하니까. 이것이 위 본문에서 말하는 ‘자본의 사회화와 사회의 자본화’다. 최소한 우리는 이 체제를 알고 이용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무소불위의 괴물이 된 것은 애초에 우리가 이런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욕망에 눈이 멀어 무시했던 점이다. 자본주의를 신물나게 겪은 우리는 이제 여기를 잘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걸까. 과연?
아예 별점을 매기지 않는 신비주의 혹은 호혜 독서가도 있지만, 좋아요♥ 버튼에, 별점 ★ 매기기에 연연해 말고 열등감과 경쟁심에 휩싸이지 말고 서로에게 좋은 책들을 성실히 알릴 필요가 있다. 내 말은 침묵하자거나 좋아요♥ 버튼 누르지 말자가 아니라 풍부히 소통하자는 말이다. 그러할 때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 ‘북플’이 탄생하게 되지 않을까? 단순히 내가 읽은 책만 평가하거나 구경만 하기엔 이 공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 모든 걸 알라딘도 알고서 추천마법사나 친구스탬프 기능 등을 써댄 거겠지만. 희망은 우리 스스로 고착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베스트셀러 일색으로 도배된 알라딘 몰(mole)이 되지 않게 말이다.
p68 들뢰즈와 가타리는『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에서 몰(mole)이라는 하나의 모델에 집중하는 움직임과 분자(molecular)라는 여러 모델을 횡단하고 이행하고 변이되는 움직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초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와 모델을 횡단하는 재미있고 자율적인 활동으로 출발하지만, 제도화되고 시스템이 갖추어지면 하나의 모델에 따라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몰과 분자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여섯 번째 편지 – 노동가치인가? 욕망가치인가?)
내 의견에 반대해도 좋다. 그 반대 속에 당신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생각을 피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협착분열’ 상태가 아니라,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며 코피도 흘리고 차도 대접받으며 사는 거, 이상하지 않다. 제발,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나는 당신에게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도) 말하며 내 생각을 바꿀 의향도 있다. 베이트슨 ‘이중구속’과도 흡사하다.
p36 이중 구속 이론은 그레고리 베이트슨(1904∼1980)이 1950년대 수행한 정신병리 현상과 커뮤니케이션 간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했어요. 그는 나치 독일의 사회병리와 매카시(McCarthy) 시대, 냉전을 거치면서 정신병리의 기원을 탐색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발리 섬의 이아트멀 족의 인류학적 탐색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이중 구속적인 대화 방법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추적합니다. … 그가 남긴 이론(『마음의 생태학』)은 생태학과 뉴에이지 운동의 초석이 됩니다.
(세 번째 편지 – 욕망을 생산할 것인가? 욕망을 억제할 것인가? 中)
“자본주의 사회는 문제제기와 대답의 분열을 조성하는 특이한 체제”(p70)라는 점에 있어서, 나는 (긍정과 부정의 성격을 모두 지닌) 자본주의적인 인간이다. 신승철 교수는 자본주의 소수자(주부, 아이, 장애인, 동성애자)의 욕망가치를 위해 이 책을 썼지만ㅡ큰 틀에서 보면 소수자가 아닌 사람이 있나ㅡ하여간에 내가 원용해 이 글을 쓴 것을 이해해주리라 생각한다. 스피노자도, 마르크스도, 질 들뢰즈·가타리도 이 자본주의 세상을 뜯어고치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가치이자 이성이자 사람이지, 위대한 지도자나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내 생각에도 찬성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최종적인 신도, 우상도 없다. 우리에겐 그보다 더 큰 자유가 있다. 그것보다 자유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자유는 그만큼이다.
ㅡ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