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은 한 대중 강연에서 자신의 철학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철학에서는 헤겔을, 정신분석에서는 라캉을, 종교에서는 “기독교-유물론” 입장을, 정치에서는 공산주의를 계승한다고 말이다. 즉 그는 두루뭉술한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 하나로도 접근하기 어려운데 그가 논하는 범위가 넓다는 게 더 큰 장애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있지 않은 독자라면 철학적이고 정신분석적이며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걸 한꺼번에 담론으로 펼치는 지젝 철학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 그는 “철학, 존재론, 정치철학, 문학, 영화비평, 생태학, 종교학, 언어철학, 인지철학 등의 분야를 넘나들며 동일성, 세계화, 포스트모더니즘, 프랑스 혁명, 레닌 같은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왔다.”
이 책은 2012년 전까지 지젝이 발표한 저서와 논문 24편을 가져와 일반 독자들이 지젝 철학에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가이드북이다. 원저 제목이 아예 『Zizek : A Reader' Guide』이다.
지젝에 대해서든 철학에 대해서든 근본적인 어려움은 우리가 언어와 의미 관계의 혼란 속에 있다는 데 있다. 언어 자체의 힘을 강조한 유명론(唯名論)과 반기술주의자(솔 크립키가 대표적), 보편적 본성과 이름에 내포된 의미를 강조한 실재론(實在論)과 기술언어주의자(존 설이 대표적) 모두에게 지젝은 반대한다. 지젝은 라캉 이론을 철학으로 발전시켜 설명한다. “언어는 사적일 수 없으므로 의미는 언제나 상호주관적이다. 그것은 상징적 질서, 라캉적 대타자 안에 존재한다.” 지젝은 앞선 이론들이 ”명명에 함축된 근본적인 우연성을 간과”한다고 주장하며, 고유명사뿐 아니라 일상 언어에서의 모든 이름(기표)들은 ‘순환적이고 자기 지시적이라 독단적 비합리와 동어 반복의 형태’(라캉의 ‘주인 기표’)를 취하게 된다고 말한다. 주인 기표는 “어떤 기의적 내용도 갖지 않는 텅 빈 기표”이며, “용어의 모든 용법은 다른 것들에 맞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관계맺음을 통해 규정된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부자유 없이 자유를, 불평등 없이 평등을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쉽게 민주주의를 절대 가치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이념이자 체제의 주요 기둥인 자유와 평등은 끝없이 충돌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와 부조리함에 대해 의견은 분분하고 수습하기 바쁘다. 지젝은 이 혼란의 원인을 정확히 꿰뚫어 봤다고 생각한다.
‘불완전함, 비합리성, 비일관성’은 지젝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계속 거론하는 핵심이다. 헤겔 변증법 독해의 기존 방식에 대해서도 지젝은 비판한다. “지젝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동시대의 대륙 철학은 물론 후기 분석철학이 얼마나 독일 관념론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는지 보여준다.”
“한 용어는 오로지 다른 용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또 용어들이 아닌 요소들(예를 들어 환상이나 이미지)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문제가 되는 관계들은 종종 차이라는 부정적 관계들이다. 요컨대 순수한 자기 동일성이란 없다는 점에서 현실은 변증법적이다. 어떠한 사물, 사건 또는 속성들도 단순히 그것으로만 있지 않다. 사물이 무엇으로 있다는 것(그것의 존재 자체)은 그것이 아닌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부정성 때문에 대립자들은 더 높은 “종합”에서 결코 조화롭게 중재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의 차이가 차이로서 정립되어, 전체가 비일관적인 것으로서 형성된다.”
지젝은 사물들이나 사실들에 대한 우리의 상징적 재현들로부터 “사물들” 또는 “사실들”을 분리해낼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고, 불완전성과 비일관성이 제거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보편적 원근법주의”) 라캉적 ‘행위’를 통해 반복적으로 되돌아와 상징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상징적 현실의 방해꾼 대상 a로 인해 주체에게 “객관적 현실”은 영원히 접근 불가능하다. “자기”(self) 도 대상처럼 자기에게 접근할 수 없음으로 구성적이다. 궁극적으로 고정된 불변하는 현실 또는 상징적 의미도 없다. 즉 지젝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두 비일관적 관점들 양자를 모두 열어놓음으로써 “시차”를 유지하는 방법론이라 하겠다. 지젝은 헤겔적 변증법이ㅡ개념의 총체성이 자기 완결적 원환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관념론”이 아니라ㅡ궁극적으로는 본질적인 것을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드러낸다고 말한다.
지젝은 헤겔을 라캉의 견지에서 다시 쓰며 전통 형이상학(현실에 대한 이론)과 인식론(지식에 대한 이론)을 새로이 고안해냈다. 상상계와 상징계는 한 매듭을 이루는 세 개의 고리처럼 실재와 한 데 묶여 있고, 공유된 상징적 관행들과 상호주관적 언어 체계 안으로 구조화되기를 거절하므로 여하한 ”존재“ 혹은 실존의 개시는 내부에서 파열한다.
“라캉과 지젝에게 욕망은 생물의 기능이 아니라, 상상적 투사(환상의 차원) 그리고 대타자가 가장 욕망하는 무엇이든 되려고 하는 시도와 관련되는 한 탈중심적”이다.
“실재는 우리가 단순히 가리키거나 매일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긍정적으로 존재하는 실체, 사건, 또는 속성이 아니다. 실재는 의식으로부터는 억압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객관적“ 사회 현실의 구성 요소가 아니다. 억압된 실재는 외재하지(exist) 않는다. 그것은 내재한다(insist)"
쉽게 말해보자. 상징적인 것으로부터 억압된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는 징후라는 실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박근혜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당신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같다고 말하는가. 그토록 쉽게.
지젝은 영화 <지젝!>에서 자신의 많은 책 중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년 초판 발행),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1993년 초판 발행), 『까다로운 주체: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1999년 초판 발행), 『시차적 관점』(2006년 초판 발행)을 가장 중요한 것들로 꼽았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라캉에게 덧입혀진 “구조주의” 해석과 헤겔에게 덧입혀진 “절대적 관념론”을 벗겨낸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는 국가주의적 정체성은 숭고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한다. 『까다로운 주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전통적 해석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코기토는 방법적 회의의 기능적 역할이라며 주체가 ‘구성적’임을 보여준다. 『시차적 관점』은 “어떠한 조화로운 개념적 종합도 불가능한 두 사유 양식으로 분리시키는 ‘시차적 간극’을 고찰”한다. 우리에게는 존재론적 차이라는 궁극적인 시차가 있고, 경험과 설명 사이에 놓인 과학적 시차, 사회적 적대로 나뉘는 정치적 시차, 공공의 법과 초자아의 외설적 보충 사이의 시차적 간극, 집단적 사회 행동에서 물러나는 “바틀비적 태도”와 사회 참여라는 시차적 간극 등 두 사유 양식 사이에 끝없이 놓인다.
“지젝이 현대적 생활과 문화의 모든 측면들(경제적, 정치적, 예술적, 종교적, 사회적, 성적 그리고 지성적인 측면)을 분석하면서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극복불가능한 부정성이자 통약불가능성의 실재다.” 전체성이나 완전성은 우리의 환상이다. 그러므로 지젝의 변증법적-정신분석 접근은 지금까지의 모든 진리 개념이 부적절하다고 폭로한다. 지젝은 실재는 실체적 밀도를 갖지 않으며 두 관점 사이의 간극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별자(주체)와 보편자(공동체)도 양자를 관통하는 분열에 의해 만나고 화해할 가능성을 가진다. 상징적 초자아는 주체의 향유를 규제하고 금지하는 ‘법’이면서 위반하고 즐기라는 ‘외설적 명령’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지금 시대는 후자와 자본주의가 강력히 엮여 있는 상황이다.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계몽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경향은 우리의 소외를 나타내는 한 징후다.” “포스트모던의 냉소주의는 우리 체계 내의 믿음을 타자에게로 옮기고 따라서 우리가 항복하거나 순응하라는 여하한 압력도 받지 않는다는 환상에 젖은 채 우리가 순응할 수 있도록(무반성적으로 자본주의가 여기 머물 것임을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범세계적 이데올로기를 지탱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특징짓는 물신주의적 부인이다.” 그래서 지젝은 포스트모던을 그토록 비판한다. “물신은 상징적 의미작용의 연결망을 구성하는 내재적인 비일관성과 결여를 감추기 위한 통일성의 환상으로서 작동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범세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치명적 한계는 그것이 자본이라는 실재의 작동을 직면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실재야말로 우리의 후기자본주의 상징적 질서 안에서 근원적으로 억압된 빈틈이다.” 이 모든 걸 종합하려는 노력이 악화를 더 양산한다. “지젝의 헤겔 독법에 따르면, 변증법의 요점은 적대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두 대립적인 관점들 사이에서 시차적 이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헤겔 변증법에 내포된 부정성은 ‘환상 가로지르기’이며, 상징적 대타자 안의 ‘결여를 경험하기’라는 라캉의 개념과 상통한다. 지젝은 국가적, 사회적, 공동체적 정체성들 속에서 참되게 보편적인 것은 단독적일 때 가능하다고 말하며 ‘개별적 보편성’을 강조한다. 개별적 보편성은 지젝의 변증법적 유물론적 존재론과 그가 복권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연결고리이다.
“마치 생산과정의 세 구성 요소들(지적 계획과 판촉, 물질 생산, 물질적 원료의 제공)은 점점 더 자동화되어 세 개의 분리된 영역들로 나타난다. 그것의 사회적 귀결로, 이 분리는 오늘날의 개발된 사회들에서 ”세 주요 계급들“의 모순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정확히는 계급들이 아니고 지식 노동자들, 오래된 근육 노동자 계급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무직자 또는 빈민가나 공적 장소의 다른 작은 틈들에서 살고 있는)이라는 노동 계급의 세 부분이다. 노동 계급은 따라서 셋으로 분열되고, 각각의 부분들은 그들만의 ”삶의 방식“과 이데올로기를 갖는다. 지식인 계급의 계몽된 쾌락주의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노동 계급의 대중 영합적 근본주의,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이 더 극단적인 개별적 형식들. 헤겔식으로 말해, 이 삼위는 명백히 보편자(지식 노동자들), 특수자(근육 노동자들) 그리고 개별자(버림받은 자들)의 삼위이다. 이 과정의 결과는 사회적으로 적절한 삶의 붕괴, 모든 세 부분들이 만날 수 있는 공적 공간의 점진적 붕괴이다. 그리고 ”정체성“ 정치는 그 모든 형식들에서 이 상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정체성 정치는 세 부분들 각각에서 지식인 계급의 포스트모던의 다문화적 정체성 정치, 노동 계급의 퇴행적 대중 영합적 근본주의, 버림받은 자들 사이의 반(半)불법적 자주적 집단들(범죄 폭력단, 종교 종파들 등등)이라는 특정한 형식을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잃어버린 보편적 공간을 대체하기 위한 개별적 정체성에의 호소를 공유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따라서 셋으로 나뉘고, 각 부분은 다른 것들에 맞서도록 싸움 붙여진다. “빨간 목” 노동자들에 대한 문화적 편견으로 가득 찬 지적 노동자들, 지성인들과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대중주의적인 증오를 보이는 노동자들, 사회 그 자체에 적대적인 버림받은 자들을 생각해보라.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는 오래된 요구는 따라서 그 언제보다 적절하다. 새로운 “후기 산업” 자본주의의 새로운 환경에서, 노동 계급의 세 부분들은 이미 그것들의 승리다.”(『The Idea Communism』, Costas Douzinas and Slavoj Zizek, 2010)
헤겔과 라캉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막강한 창이자 방패를 만든 지젝의 논리에 맞서려면 상대도 헤겔과 라캉 이론에 정통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잘 만들어진 난공불락의 요새 같다. 지금으로선 나는 그를 독해하기 바쁘다ㅎㄱㅎ; 이 책이 논한 지젝의 저서 이후의 모습을 보여줄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2016년)를 읽고 나면 지젝의 빈틈이 더 잘 보일까. 궁극적으로 불완전하고 비합리적이고 비일관적이며 억압되어 있는 실재의 빈틈을 뚫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니 더 아득하지만 나는 뭔가를 그냥 받아들이는 자는 아닌 개별자여서 이 진리를 향한 투쟁에 계속 관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