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소독시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G. K. 체스터튼 지음, 윤미연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2004년 4월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를 폐허로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은 그곳을 사랑하는 어떤 이유가 정확한 사람이다. 반면에 그곳을 개선시킬 사람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p.131) 나는 책장에 꽂혀 있는 '오소독시'를 볼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렸다. 체스터턴은 그 동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내 스스로 파괴한 이유를 말해주었고 개선을 원할 때 내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지 가르쳐주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나는 이 한 구절만 기억했다. 이 책에 별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소독시'의 체스터턴은 C.S.루이스보다 치밀한 논증을 보여주고 필립 얀시보다 더 독자를 시원하게 해 주며, 스펄젼의 설교가 청중에게 심어주는 비유 이미지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려낸다. 너무 보물이 많아서 나는 작은 보석 하나만 가지고 나온 것 뿐이다. 그 작은 보석 하나만 가지고도 나는 오랫동안 음미하고 쳐다보고 즐거워하곤 했다. 나는 체스터턴의 보물 창고에 다시 들어갔다. 아무래도 처음 들어갔을 때보다 좀 더 크고 멋진 것을 들고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나는 다시 한 번 체스터턴이 펼쳐내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화가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남기고 책을 덮었다. 체스터턴은 그림을 잘 못 그리더라도 모델을 바꿔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그 이유는 모델을 바꾸면 실패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또한 초라한 모델로는 초라한 작품 밖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체스터턴이 언급한 그 모델은 '기독교'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인 바로 가장 이상적인 정통 신앙을 의미한다.
비기독교인만이 교회에 실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실망을 더 많이 한다. 왜냐면 정말 교회는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사랑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알고 이상적인 모습을 기대하고 찾아온 많은 이들이 그 실체를 알고는 더 멀찍이 교회와 멀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청년부 예배가 나가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이 없는 공동체, 결코 내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예배에 내가 있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변명일 뿐이었다. 첫번째 '오소독시'를 읽었을 때 나는 내가 결코 사랑하려는 마음이나 의지가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저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나는 스스로가 모델을 바꿔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알았다. 왜냐면 그렇게 하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모델에게 돌릴 수 있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리더를 꿈꾼다. 또한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존경받는 리더가 되는 것도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것도 모두 힘든 일이다. 공동체는 늘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분쟁도 발생한다. 리더십에 대한 책이 쏟아지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 힘들다는 증거이다.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은 정말 사실이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서 통제 불가능의 상황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느낌이다. 우리 가족은 당분간 외식을 안하기로 했다. 아이가 식당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를 강제로 앉혀 놓으면 식당 가득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공동체의 개선을 위해서 좋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가? 물론 여기까지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특별한 이유가 생각이 난다면 나는 그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후보자가 된다. 나는 그 이유를 없애기로 했다. 그 이유가 없어지는 순간부터 나는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꿈도 또한 어떤 모임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수도 없이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관악산 정상에 올랐다고 박수해줄 사람은 없다. 에베레스트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실패가 필수적일 것이다. 절대로 모델을 바꾸는 어리석은 화가는 되지 않을 작정이다.
이 책은 체스터턴이 왜 기독교를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다. 그러나, 나는 첫번째 읽을 때도 두번째 읽을 때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고 생각했다. 체스터턴의 생각은 내 삶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도 기독교가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내게 그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나를 알고 있다. 기독교는 나의 어리석음과 무지와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함에 놀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수없이 폐허로 만들지만 하나님은 이유없는 사랑의 모습으로 나를 개선시키신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 또한, 기독교는 삶을 이해하고 있다. 인생이 단순하지 않고 풀기 힘든 실타래처럼 얽혀 있음을 알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정말 형편없지만 하나님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 끝없이 넘어지지만 끝없이 일으키신다. 기준을 낮출 만도 한데 성경은 몇 천년 동안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아마 그 배움은 내가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약 마지막 날에 내가 이유없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상을 품고 살았음을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기독교를 통해, '오소독시'를 통해 배운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