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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으로 달려! -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2014 SK 사랑의책나눔, 아침독서신문 선정, KBS 책과함께, 우수환경도서 선정, 2013 고래가숨쉬는도서관 겨울방학 추천도서 ㅣ 바람그림책 17
사시다 가즈 글, 이토 히데오 그림, 김소연 옮김 / 천개의바람 / 2013년 10월
평점 :
이상하게 나이가 들고부터 '전쟁'이나 '재난'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을 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배경인 대하소설이나 스페인 내전이 소재인 수많은 소설들을 처음으로 읽었던 어린 시절 혹은 청년 시절에는 실감이 없었던 것들이, 지금 생각하면 살이 떨리도록 처절하고 무섭게 느껴지곤 한다. 한국전쟁 당시 예닐곱살에 불과했을 나의 부모님이 그 와중에 어버이를 잃고 친척들을 잃었다는 생각을 하면, 이제서야 내 부모님의 정치성향이나 생존본능이 조금이나마 공감이 되곤 하는 것이다.
지금 사는 터전이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버린다면,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과연 그걸 감당해낼 수 있을까... 정말이지 상상이 안 된다. 물건이나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게 된다면 나는 과연 앞으로의 생을 제정신으로 살아낼 수 있을까. 지난 여름 거센 태풍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을 때도, 강정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평화'에 대해 묵상할 때도,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고, 쓰나미 피해와 함께 원전사고까지 발생했다. 나와는 직접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해도, 원전사고로 인한 간접적 영향에 대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남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자연은 우리의 예측을 벗어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 겸허히 살아야 하며,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겸손하게 되새긴다.
그림책 <높은 곳으로 달려!>는 2011년 바로 그날, 쓰나미의 한복판에 있었던 일본 가마이시의 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04년부터 이미 지진과 쓰나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여러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아이들은 평소 훈련받은 대로 중학생들이 초등학생을 도우며 피난을 했다. 지진과 쓰나미를 '반드시 올 것'이라 생각하고 대비한 덕택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고, 한 중학생이 생각해낸 '안부 쪽지' 덕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도 서로 만날 수 있었다고.
시작은 평화로운 바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크면 어부가 되고 싶은 주인공은 할아버지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 할아버지는 말한다. 쓰나미가 오면 뒤돌아보지 말고 달리라고, 각자 온 힘을 다해 도망치라고,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키는 거라고.
그리고 그날...
아이들은 중학생 언니 오빠의 손을 잡고, 신발이 벗겨진 친구에게 자기 신을 벗어주기도 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달린다. 위로, 위로 가야 한다.
시커먼 물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을 때, 집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때, 주인공은 처음으로 생각한다.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누군가가 확 등을 민다. 그래, 여기 있으면 안돼. 위로, 산꼭대기로 달려야 해!
4쪽에 걸친 펼침면으로, 서로서로 손을 잡고 달리는 아이들이 보인다. 강아지를 챙기는 사람, 수레를 끄는 사람, 우는 아이를 안고 또 업고 달리는 사람... 나도 이 인파에 휩쓸려 있는 듯 눈물이 났다.
이런 장면을 구상하고 하나하나 사람들을 그려나갔을 화가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 장면을 그리며 화가 또한 얼마나 힘들었을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나쁜 생각만 떠오를 것 같"아, 아이들은 일부러 웃긴 TV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웃기도 하고,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유난히 별이 밝은 밤이 흘러갔다... 그리고 체육관에서 모두 함께 지새웠던, 절대로 잊지 못할 밤도...
지금, 아이들은 시내에 있는 다른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많은, 아주 많은 일들이 있었다."라고밖에는 이야기하지 못할 사연들을 그저 가슴에 안은 채로...
마지막 장면은 다시 그 바다. 할아버지는 말한다.
"집도 배도 쓸려 가서 정말 목숨밖에 남지 않았구나."
하지만 노인은 바다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연은 원래 그런 거"라면서...
"살아만 있으면, 앞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법이란다."
분명 할아버지도 끔찍한 태평양전쟁을 겪었을 것이고, 95년의 한신대지진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노인이 아이에게 들려줄 수 있는, 진심을 담은 최선의 지혜일 것이다.
그림책을 통해 새삼 '살아 있다'는 것의 숭고함을 느낀다. 게다가 아주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닥치든 "다른 사람을 도우려면 우선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그 어느 곳을 흔들어 공격할지 모를 일이다. 인간이 자연을 이기고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겸허히 살아야 할 텐데...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너무 많은 은혜를 입기만 하고, 자연에게 다시 베풀 줄은 모르는 것 아닐까. 고귀한 생존의 기록인 <높은 곳으로 달려!>를 보면서, 이것을 '남의 나라 일'로 스쳐지나가듯 보지 말고, 누군가 나 대신 몸으로 교훈을 얻어준 것임을 깊이 마음에 새겨놓기로 한다.
칠석날 아이들이 소원을 적어 걸었던 것들을 읽어본다.
"다시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요."
"친구가 엄마를 찾으면 좋겠어요."
"어서 어른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이제 큰 지진과 쓰나미가 오지 않기를!"
새해, 나도 이 소원들을 조용히 함께 기원하려고 한다.
덧붙여, 인간이 좀더 겸손해져서 자연이 더이상 큰 벌을 내리는 일이 없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