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찾아서 - 중세학의 대가 자크 르 고프가 들려주는 중세의 참모습
자크 르 고프.장-모리스 드 몽트르미 지음, 최애리 옮김 / 해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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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럽 사학계는 20세기 초에 역사를 인물의 역사에서 민중의 삶으로 촛점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이는 신학에서 "교회 밖에서 구원은 없다"라는 명제를 폐기한 것과 유사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후 서구 사학은 인간을 중심으로 거시적인 역사와 미시적인 역사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역사 연구의 발전에 힘입어 중세의 모습 또한 다르게 조명될 수 있었다. 과연 중세는 신만이 존재하는 세계였는가?라는 물음에 서구의 학자들은 '인간도 존재했었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도시와 성당에 널리 산재해 있는 방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유럽의 중세는 새롭게 기술될 수 있었다. 메노키오의 이야기나 마르땡 게르의 이야기, 몽타이유 마을의 이야기는 이런 방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중세의 인물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재발견되었으며, 재평가 받았다. 이렇게하여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유럽의 중세는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게 되었다. 중세는 말 그대로 고대와 근대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기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의 중세는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神國Civitas Dei"였다.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의 세계였다. 이 신적 질서 속에 모든 인간의 삶을 쾌맞추려던 시도는 절반의 성공을 수반한 절반의 실패였다. 신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는데는 실패하였지만, 인간들을 하늘로 인도하는데서는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중세의 전반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지배하였다면, 후반부는 성 토마스의 신학이 지배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모든 것을 파악하였다. 그는 하나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여러가지 색으로 분산되듯 신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이 파악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성 토마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반대의 생각을 하였다. 그는 신의 다양함을 이해하여 하나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기를 원하였다. 즉 신의 다양한 빛의 세계가 프리즘을 통해 하나의 빛으로 환원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중세인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는 신의 절대성을 성 토마스를 통해서는 인간 이성의 다양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는 근대로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절대적 신성에서 인간 이성의 다양함으로 접근하였다. 물론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토마스는 자신들의 신학이 이렇게 변질(?)될 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 두 성인은 자신들의 신학이 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를 고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의 진리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지금의 역사보다 한단계 더 진보된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느 시대가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전 시대의 모순에 깊은 숙고를 하고 실천하였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순이 확실히 제거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진행형이란 사실이다.

그럼에도 중세는 여전히 우리들에게 매력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지나치게 이상화되거나 비하할 필요는 없다. 넘치는 것은 부족함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세를 바라보는 세계는 중용의 눈길이 필요하다. 편협된 종교관과 인간관은 중세를 비하한다. 하지만 너무 관대하게 중세를 바라본다면 그것은 무모한 낙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중세는 미묘하게 우리들에게 호기심과 인내를 강요한다. 그 호기심과 인내의 안내서로서 '중세를 찾는것'은 '중세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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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일본 - 닌자와 하이쿠 문화의 나라
모로 미야 지음, 김택규 옮김 / 일빛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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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에게 모든 사물과의 관계는 道와 연결된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道라는 단어로 치환시킨다. 이 과정에서 일본적인 문화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그들의 道는 도덕경에 나오는 '道可道非常道'와 같은 현묘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道는 철저한 신분질서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이런 심성을 옹恩이란 개념으로 철저하게 해부하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에게 주고받음의 관계가 바로 질서이며 道인 것이다. 차를 마시는 茶道의 경우도 그렇다. 그 복잡한 의식 속에서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주인은 베풀고 손님은 그 과정의 수혜자로 존재한다. 여기서는 그 어떤 불필요한 개입이 필요없다. 茶道의 도식적인 관계 속에서는 인간적인 모습보다는 질서의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한다. 그 관계와 질서의 이야기는 道이면서 모노가타리物語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인들에게 모노가타리는 또 다른 질서의 기술이며 또 다른 道의 창조인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결코 중단될 수 없는 道를 만들어 내는 것은 질서에 대한 확고함이며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서구인들에게 70년대 중국은 '푸른 개미들의 나라'였다. 일본은 이런점에서 질서의 나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중요한 道는 무엇일까? 노벨상 수상자 川端康成는 와카和歌, 하이쿠, 다도, 선학을 일본의 미로 열거하였다. 물론 川端의 이러한 언급은 자국 문화에 대한 일종의 장식이며 배려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본의 문화보다는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는 일본의 문화, 미는 무엇일까? 이 책은 우리들의 상식에 부합하는 약간은 통속적인 일본의 미, 혹은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너무 향락적이거나 현학적인 모습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의 일본적인 미를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제일 앞에 나오는 미야모도 무사시의 경우도 그렇다. 많은 일본 문학작품 속에 기술되어 있는 지극히 일본적인 인물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왜 일본인들은 미야모도 무사시의 세계로 침잠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일본의 일상을 담담히 그려낸다. 목욕문화와 닌자의 세계, 세시 풍속을 통해 일본인들이 몰입하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보여준다. 온나노세쿠를 통해 '축소지향적인 일본'을, 마네키네코를 통해 하나의 상품을 브랜드화하는 일본의 상술을 대조적인 옛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비교분석하는 일본인들의 심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 섬뜻한 것은 유태인의 구세주라고 불리우는 일본의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衫原千畝의 이야기가 제일 나중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일본인의 심성 가운데 가장 낮은 순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는 하나의 복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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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이 2009-04-08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입니다.
 
코앞에서 본 중세 - 책, 안경, 단추, 그 밖의 중세 발명품들, 역사도서관 003 역사도서관 3
키아라 푸르고니 지음, 곽차섭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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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쓰는 필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상대방을 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두번째는 상대를 아주 하찮게 기록하는 필법이다. 이 두 방법은 각기 장단점이 있다. 상대를 강하게 표현함은 그만큼 상대방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강한 상대방을 이긴 자의 더 강함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반면에 두번째 방법은 역사의 필연성에 중점을 둔다. 자신과 싸운 상대방이 이러 이러 해서 결국은 스스로 붕괴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이론에 대한 단점은 의구심이다. 즉, 상대가 약했다면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결국은 붕괴되지 않았을까하는 의구심이다.

중세를 바라보는 우리들 역시 이런 장단점에 봉착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중세를 기술할 때면 그 시기는 암흑이다. 그래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흐름을 무리없이 설명 할 수 있다. 반면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중세는 태양이다. 하지만 이 태양의 밝음은 종교재판과 체제의 경직성이라는 모순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흐름에 가톨릭이 매끄럽게 승차할 수 없다는 점이다.

중세가 암흑이었다는 이론은 이차세계대전 이후 서구 학계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학계의 주장과 대중의 사고 사이에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런 융화될 수 없는 간극을 매우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중세의 현실을 대중들에게 보이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부분적으로 효과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중세를 종교적 사회로 규정하는 한 그 노력은 한계를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를 지배한 가톨릭은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수구보수의 논리로 후스를 화형시키고,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를 침묵하게 했으며 사보나롤라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사적인 혹은 사상사적인 면으로 볼 때 중세는 정지되어 있던 시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움직이던 시대였다. 성직자, 귀족, 농민으로 구성된 무너질 수 없는 신적 위계질서의 사회였지만 과학의 발전은 이런 구조를 뛰어 넘었다. 수평으로 설치된 물레방아가 수직으로 개량되고 인력이나 축력 대신 자연의 힘을 이용한 풍차나 가축의 마구 개량과 같은 것은 중세가 우리들의 판단처럼 간단하게 고정적이고 불변의 사회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보나벤투라,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를 통해 재해석하여 철학이 신학에 큰 충격을 주게 했다는 점에서 중세의 정신적인 모습은 간단하게 암흑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 책은 중세의 종교적인 측면이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중세의 발전과 기술적 혁명에 대한 기록이란 것이다. 저자는 이런 기록을 통해 중세의 모습이 고여있는 연못의 썩은 물이 아니라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 물꼴이 개방된 신선하고 살아있는 연못, 즉 개방된 중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개방된 모습은 우리에게 희귀한  중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사실 중세 유럽의 모습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중심에 도이칠란트가 가세하는 모습이라 하겠다. 이런 고정적인 중세의 모습에 이탈리아의 중세 모습이 보여진다는 것은 무척 희귀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 게한다. 이탈리아라는 희소성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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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탄생 - 유럽을 만든 은둔자들, 청년학술 57
크리스토퍼 브룩 지음, 이한우 옮김 / 청년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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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역활을 한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믿음의 공동체이면서 문화의 보관소이며 신앙의 보금자리였다. 그리고 전교의 최전방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수도원은 하느님의 성채였으며 하느님이 지상에 존재하는 성스러운 장소였다. 마찬가지로 수도사들은 신앙인이면서 하느님의 투철한 전사이기도 하였다. 이런 수도원이 어떻게 유럽에 정착하였고 융성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리스도교가 유럽 곳곳으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수도원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유럽 수도원의 아버지는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트이다. 그는 초세기 은수자들의 독거형태의 생활을 집단적인 신심단체로 바꿨으며, 그 집단을 규제할 회헌을 제정함으로써 유럽의 수도원의 한 형태를 갖추게 하였다. 이후 그의 회헌은 수많은 수도원의 깃대종이 되었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은 베네딕트의 회헌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될 정도였다. 중세시대 대표적인 네 수도단체-베테딕트회,아우구스티노 참사회,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는 각각의 특성이 있을지언정 베네딕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베네딕트의 모범은 아마도 중국 불교에서 선종의 백장청규와 비교될 만하다. 백장청규는 선종이 무위도식하는 탁발이 아니라 자급자족하는 단체로 거듭나도록 하였다. 즉 일하지 않으면 먹지말라는 말처럼 선승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먹고 입고 수행을 해나가야만 했다. 이런 백장청규의 혜안은 당무종의 법난에서 다른 종파들이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선종만은 큰 피해를 입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베네딕트는 초세기 은수자들처럼 세속을 피해 사막으로 나가 자신과 하느님을 만남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도하고 일하라는 표어처럼 수도사들에게 노동과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어느 종교단체든지 무형으로 시작하지만 세속적인 지지자들이 재물을 희사함으로써 무형이 거대한 유형의 재산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변화는 필연적으로 창시자의 본 뜻을 왜곡하게 만든다. 이런 종교적 순환이 베네딕트가 세운 수도원에서도 일어났다는 점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왜곡 속에서 클루니 수도회와 시토회가 생겨나 베네딕트의 본 뜻을 시대에 맞게 적용하면서 수도원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베네딕트의 후계자들은 노동과 기도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함이란 주제가 새롭게 떠올랐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통해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생겨났다는 점은 교회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르려는 프란치스코회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수도회인 도미니코회는 서로 이질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삶의 행적을 모방하였다는점이다. 이 두 수도회의 모습은 교회권력의 비대화로 인해 교회의 생동감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나타났다는 점에서 나태한 교회의 모습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들 수도원은 여성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함으로서 여성의 지위향상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물론 중세 후기로 가면서 여성들은 수도원 경영에서 배척되고 남성들이 주도권을 행사한다.

이렇게 중세의 수도원은 그리스도의 이샹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 수도원은 절대로 아담과 이브로 상징되는 낙원을 지상에 구현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년왕국에 현혹된 이단들이 창세기의 낙원을 지상에 세우려다 교회로부터 억압을 받았다. 수도원은 이런 상상의 낙원보다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나눔의 공동체를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런 수도원의 노력은 중세의 위계사회에서 이질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수도원은 중세 전 시기를 통해 다양한 신앙의 방법과 쇄신을 교회에 사회에 불어넣음으로서 중세 유럽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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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이해하려면 그 넓은 땅덩어리와 신분제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보이는 인도 亞大陸은 대륙이라기에는 약간 좁고, 하나의 국가라기에는 너무 넓어 지리학지들은 대륙에 버금간다하여 아대륙이라 이름 붙였다. 그래서일까? 동쪽의 뱅골만에 사이클론이 불어닥치는 그 순간에도 서쪽의 아라비아해에서는 뜨거운 열풍이 인도 아대륙을 습격한다. 태풍과 한발이 동시에 존재하는 대륙이 바로 인도인 것이다. 게다가 데칸고원을 중심으로 북쪽은 아리아계 인종이 남쪽은 드라비다계 인종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 삶의 방식은 얼굴의 생김새 처럼 이질적이다.

이런 동시성과 다양성이 존재하는 대륙에 신분제도-카스트-가 존재한다. 이 신분제도는 땅덩어리의 다양성과 동시성을 고정시키는 쐐기 역할을 한다. 오래 전 고다마 싯달타가 이 사성제도를 부정하는 종교를 설파했지만 계급세력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좌절하고 말았다. 인도의 불교는 12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대륙에서 소멸되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변형한 불교가 12세기까지 뱅골과 비하르에 존속하였지만 이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불교의 소멸은 종교의 생성,성장,소멸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브라만교에 대한 개혁으로 시작된 불교는 그 참신성과 진보성에 의해 고무되었지만 결국 자신들이 배격했던 브라만교 의식에 굴복하고 말았다. 브라만교는 불교의 도전에 직면하자 자신들의 종교에서 소외되었던 여성과 수드라 계급에 대한 교리를 수정하였다. 이에 반해 자신들의 일시적 승리에 도취된 불교는 대중과 함께하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세계로 침잠하였다. 이들은 대중의 언어인 팔리어를 버리고 귀족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면서 백성의 삶에서 빠르게 이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였던 브라만의 악습에 물들어 결국은 인도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렇게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졌지만 인도 아대륙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물질 생활에서 비롯된 사회악을 완화시키고자한 부족사회의 특징인 원시공산주의로의 복귀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함께 불교는 소외계층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브라만 사회의 계급주의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설파함으로서 인도 사회의 한 특징이 된 소 숭배 사상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 1949년 새로운 공화국으로 출범한 뒤 국세조사를 실시하였을 때 불교도는 18만명에 불과하였다. 인도의 인구에 비하면 그 숫자는 거의 무시해도 될 미미한 것이었다. 이런 불교가 1960년대 초 325만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당시 인구의 1퍼센트에 근접한 숫자였다. 이렇게 인도의 불교 신자 수가 급증한 데는 불가촉 천민 출신의 사회개혁가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된지 8백년이 흐른 뒤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교로 양분된 인도 사회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8백년전에 사라진 불교는 20세기에 다시 그 오래 전 자신들이 잊고 있던 고다마 싯탈타-부처-의 온전한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정신을 20세기에 인도의 사성제도 속에서 외쳤던 것이다. 이 불교의 평등사상은 불가촉 천민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에게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인도를 떠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라만과 이슬람은 인도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인도를 분열시키지 않으면서 자유.평등.우애에 뿌리를 둔 인도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 슬로건에 합당한 종교는 사성제를 주장하는 브라만교나 알라만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이슬람이 아니라 바로 상생의 종교인 불교라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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