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불멸의 아름다움 - 고딕 대성당으로 보는 유럽의 문화사
사카이 다케시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고딕, 불멸의 아름다움은 좀 약오른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의 중세학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갖게하는 책이기도 하다. 사실 고딕 건축물은 그동안 설계도나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우리들이 쉽게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앙리 포시옹의 "로마네스크와 고딕"이란 책은 그 부피만으로도 고딕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의 기를 꺽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은 고딕을 유럽의 시원인 '숲'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유럽의 숲'은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숲은 생명의 이미지이면서 창조의 장소이고 불멸이 재생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숲이 중세 유럽에 들어서면서 인구가 팽창하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파괴된다. 이것은 유럽의 탄생에 중요한 역활을 한 숲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고딕이 등장하였다고 하면서, 고딕과 숲을 연결시킨다. 그 기발함은 고딕의 외양에서 느꼈던 기묘함의 의문을 해소시킨다. 그리고 그 숲의 역사는 중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지속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셀로나의 그 유명한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은 중세인들의 숲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과 사랑을 현재에 구현한 것이라는 주장은 가우디의 건축에서 느껴지던 그 기괴함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를 느끼게 한다.  

고딕은 일견 복잡하게 느껴진다. 뽀쪽한 첨탑이 무수히 배치된 고딕의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또 다른 바벨탑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불경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신을 향한 인간의 무한한 동경을 표현한 것으로도 이해한다. 이렇게 고딕은 신성함과 불경함을 느끼게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이 모순점을 저자는 거룩한 성스러움과 잔인한 성스러움으로 가볍게 해결하고 있다. 즉 우리들이 여성의 상징으로 성모 마리아를 거론할 때 신을 낳으신 거룩한 여인으로 이해한다. 반면 힌두교의 칼리 여신은 수 많은 인간 제물을 통해 새로운 창조-파괴를 통한 창조-를 이룩한다. 즉 창조라는 같은 주제를 한쪽은 밝은 면으로 다른 쪽은 어두운 면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고딕의 다양한 모습이 이와 같다는 점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증명하고 주장한다.  

사실 중세는 세상의 다양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의 빛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단일한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다양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교차한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통해 중세를 규정하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은 고딕에도 그래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깊은 숲, 그곳은 어둠과 온화함이 있는가 하면 히미한 한 줄기 빛과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숲은 끊임없이 생명을 재생해 낸다. 씨앗이 떨어지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고, 떨어져 썩고, 다시 싹이 나고...하는 무한 창조의 반복이 일어난다. 고딕 성당안에서도 매일 숲의 이런 생명창조가 반복된다. 미사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반복된다.  

고딕 성당에서 반복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이미지는 교회의 두 가지 표상이다. 부활의 기쁨이 앞에 오느냐, 수난의 고통이 앞에 오느냐에 따라 교회의 모습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은 숲이 생명의 모습과 죽음의 모습-드루이드교의 의식을 보라-을 간직한것과 무엇이 다른가. 숲은 인간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줄 때 생명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숲이 깊은 심연의 공포로 다가올 때 고통이 되는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의 이야기에서 숲의 이미지는 밝음이 아니라 검은 색이다. 이런 이중적 모습이 고딕의 성당 안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히미한 빛은 죄인에게는 두려움의 어둠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삶의 혹은 재생의 빛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의 자유로움-로빈 훗에서 나타나는 자유-은 고딕에 의해 규격화되면서 통제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고딕은 제도속으로 들어가면서 권위로 변질된다.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라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고딕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한 고딕에는 삶의 약동이 아니라 제도의 견고함만이 남게된다. 이렇게 고딕에 대한 자유로움이 규격화되는 과정에서 중세 유럽은 숲을 경외의 대상에서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세유럽은 다양성과 창의성을 희생하고 단일성과 규격화를 달성한다. 이러한 반발은 루터의 반발로 이어지지만 숲에 대한 중세적 사고는 고딕에 의해 그대로 보전된다. 즉 중세 유럽인들은 고딕을 통해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그 세상을 인간의 삶에 맞게 개발하는 것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유럽인들의 생각은 결국 제국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고딕, 그 불멸의 아름다움은 어찌보면 유럽인들만의 시각인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움이 불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피와 땀이 그 거대한 고딕의 숲에 스며들었을까? 그 불멸의 아름다움은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검은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안에 앉아서 세계를 발견한 남자 - 제바스티안 뮌스터의 <코스모그라피아>
귄터 베셀 지음, 배진아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세상을 관철하였다. 그는 이성,감성,오성으로 이 세상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파악하였다. 반면에 이 책의 주인공인 제바스티안 뮨스터는 바젤에서 이 지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표현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이 세상을 철환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이 세상을 묘사하고 그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불확실하고 유치하기까지 한 견문록과 지도 그리고 그림이 가득찬 그의 지리 백과사전은 헛된 공로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가 이 작업에 일생을 바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바스티안 뮨스터가 살아간 세계는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였다. 그동안 사람들이 믿어왔던 진리가 새로운 발견으로 수정되어야만 했던 시기이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지탱해 왔던 종교마저도 분열을 하여 사람들에게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끔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런 시기에 제바스티안 뮨스터는 모든 기록을 모으고 그것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 방대한 작업은 그 시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물론 그 속에 기록된 것들의 진실성은 예외로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제바스티안 뮨스터의 작업이 현재의 우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앞으로 발견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무지막지한 호기심이다. 자신들 이외의 땅에 사는 기묘한 종족들에 대한 현대의 시각이 냉소적인 것처럼 아마 우리의 후손들은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외계인에 대한 영화나 기록을 몇 백년 후에 본다면 지금의 우리처럼 냉소적인 시선으로 이 시대를 평가할지 모른다. 우리는 중세의 시대가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기록을 보는 순간 무지와 몽매라는 단어를 앞에 내세우게 된다. "어떻게 그 시대는 이런 터무니없는 사실을 진리 혹은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이런 우리의 질문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몇백년 혹은 몇천년 후에 우주인과 조우한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 묘사된 우주인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기록 혹은 모습을 믿을 수 있었을까?"라는 냉소적인 말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바스티안 뮨스터의 시대가 보여준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두 바퀴의 추진체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지금의 모습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호기심과 탐구심이라는 거인을 잘 이용한 난쟁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의 이 상태로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호기심과 탐구심이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고 좀더 멀리 볼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필립 말로 - 피귀르 미틱 총서 10
파트릭 레날 외 지음, 이규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메리카의 문학은 멜빌에 의해 비로소 미국적인 특성을 띠게 된다. 포우의 독창적이며 천재적인 발상 조차도 유럽적 감수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멜빌은 광활한 아메리카의 대륙-그 광활함은 바다와 비유될 수 있다-의 비유로 바다를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흰고래는 서부로 뻗어가는 백인들의 탐욕 혹은 진취성-그 다양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을 상징한다. 멜빌은 이후 많은 미국의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 다양함의 첫번째는 타잔이라 할 수 있다. 정글-이 역시 넓은 대지의 다른 표현이다-에서 백인이 정글의 제왕으로 등극하기 까지 수많은 모험을 경험한다. 이것은 어쩌면 행복의 길을 포기하고 고통의 길을 통해 하늘의 별이 된 헤라클레스의 또 다른 변형인지도 모른다. 이 정글은 말로에 의해 콘크리트의 정글로 바뀐다.  

콘크리트의 정글은 백경의 대양, 타잔의 정글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바다, 정글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여기에서 필립 말로는 또 다른 영웅으로 떠오른다. 아합-에이헙-선장이나 타잔에게는 세련됨보다는 원시성 혹은 거친 야만성이 드러난다. 하지만 말로에게는 도시의 세련됨이 강조된다. 그것은 대양과 정글로 상징되는 원시성이 콘크리트의 건물로 대표되는 문명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타잔의 포효나 에이헙의 광포함이 의식 밑으로 가라 앉는다. 대신 무수한 사변적 도시성이 등장한다. 그러지만 필립 말로는 로스엔젤레스라는 신흥 도시에 자신을 의탁함으로서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원시성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필립 말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는 아메리카의 신흥도시 로스엔젤레스에서 타잔과 에이헙은 생존할 수 있을까? 필립 말로는 타잔과 에이헙의 또 다른 분신으로 그는 광기와 원시성 대신에 문명의 사변적 유희를 통해 생존한다. 하지만 그의 사변은 상류층의 세련됨이 아니라 하층계급의 거친면을 대변하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말로는 도시의 정글 속에 존재하는 타잔이면서 광활한 콘크리트의 바다를 헤메는 에이헙이다.  

필립 말로는 도시의 탐정이지만 그 이전에 등장했던 사색적인 탐정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는 쉬지않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 생각의 독백 혹은 방백이 필립 말로가 자신이 등장하기 이전의 탐정들과 구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탐정이면서 탐정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부류이면서 같은 부류가 아닌 인물이다. 즉 정글에 버려진다고 해서 모두 타잔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도시의 외로운 탐정이 모두 필립 말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립 말로는 넋두리의 인간이다. 그는 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쏟아낸다. 그의 이런 모습은 광기의 에이헙이나 즉응적인 타잔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무엇이 말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넋두리는 홈즈가 와트슨에게 하는 과시적 욕망도 아니다. 그렇다고 미키 스필레인이나 더쉴 해미트의 자의식 과잉의 모습도 아니다. 그는 넋두리에서만큼은 여성적이다. 하지만 이런 말로의 모습이 스크린을 통해 재해석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람들에게 필립 말로는 험프리 보가트로 고정되는 것이다. 혹은 게리 그랜트로도 변모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이를 통해 소설 속의 인물이 화면 혹은 우리들의 면전에서 재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성적인 인물이 남성적 혹은 마쵸, 젠트리적인 모습으로 재해석된다. 이렇게 되면서 필립 말로의 본래의 모습은 화면속의 인물로 대치되면서 한편의 도시 신화로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탁 - 고대 델피의 숨겨진 예언과 사라져 버린 비밀들
윌리엄 브로드 지음, 김혜원 옮김 / 가인비엘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도도나에는 제우스에게 바쳐진 한 그루의 참나무가 있었으니, 이 참나무는 여사제들을 통해 신탁을 내렸네. 조언을 구하러 온 자가 참나무에 다가서면 일순간 나무가 움직이고, 곧이어 여인들이 이렇게 말한다. '제우스 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이 여사제들은 비들기를 의미하는 펠레이아데스 혹은 페리스테레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들은 트로이인들로서 최고 연장자는 앞선 영혼을 뜻하는 프로메네이아, 다음은 칭송을 받은 미덕을 의미하는 티마리테, 최연소자는 인간들의 승리자를 뜻하는 니칸드라로 각각 불렸다. 그런데 펠레이아데스는 어떤 방식으로 나뭇잎이 사각거리며 내는 소리들을 해독할 수 있었을까? 플라톤에 따르면, 도도나의 여자 예언자들은 델포이의 퓌티아(이들은 월계관을 쓰고 월계수로 장식된 삼각 의자에 앉아 신탁을 내렸다)처럼 예언을 내렸던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일종의 엑스터시에 빠진 상태에서 신으로부터의 메시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크 브로스의 "나무의 신화" 중에서- 

이 책은 신탁의 엑스터시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형이상학적 예언의 실체를 과학적인 눈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플라톤이 증언한 대로 델피의 퓌티아들은 환각의 상태에서 예언을 하였다. 그리고 플라톤은 델피의 무녀가 앉아있는 삼각의자 밑으로 갈라진 틈이 있어 그곳으로부터 신의 영기가 나와 여기에 취한 무녀가 예언을 쏟아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실제로 증언할 증거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지 못했기 때문에 현대의 우리들은 델피의 신탁에 의혹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델피의 무녀 혹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 표현할 때믄 형이상학적 접근보다는 형이하학적인 표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델피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의 신탁에 성적요소가 강하게 표현되었다(최근의 것으로는 '300'이란 영화의 관능적이고 자극적인 신탁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고대의 기록을 보면 그러한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예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대의 우리가 고대의 신탁을 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델피의 고대 증언이 근대의 고고학적 발굴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델피의 경우 고고학적 발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모습을 그려내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가 히말라야에서 시작하여 코카사스지역을 지나 소아시아(터키지역)와 그리스를 지나 알프스로 이어지는 지진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잦은 지각변동이 있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에서의 고고학은 지질학과 병행하여 발굴이 이루어져야만 정확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1892년 프랑스팀이 델피를 발굴조사하였음에도 고대의 기록과 일치하는 유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동안 잦은 지진으로 인해 델피지역의 단층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소한 실수가 바로 잡히기까지 델피의 신탁은 일종의 야바위로까지 비하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한 지질학자의 우연에 의해 델피의 모습이 바로 잡히게 된다.  

고고학에 지질학이 가세함으로서 델피의 모습은 바로잡히게 된다. 고대인들이 묘사한 델피의 모습-퓌티아가 삼발이 의자에 앉아있고 그 삼발이 밑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오는 연기-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각이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온 연기도 에틸렌일 것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즉 무녀는 석회암 지대의 갈라진 단층 사이로 흘러나온 에틸렌에 취해 무아지경 속에서 예언을 내린 것이다. 물론 이 예언을 해석하는 임무는 신전의 사제들이 하였다. 물론 이 해석은 후대로 갈수록 단순해지며 모호한 경우가 많았지만 델피신전에 받쳐진 무수한 감사의 팻말과 봉헌물의 기록은 예언이 단순함을 넘어 그리스 전체의 운명까지도 결정하였었다(스파르타의 리쿠르구스법과 아테네의 솔론법).  

사실 '300'에 나오는 레오니다스의 신탁은 델피에서 "황소와 사자들의 힘으로는 적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아니, 적은 그 도시 또는 왕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 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경고를 받았다. 스파르타인들은 이 불길한 예언에 고민해야만 했다. 도시를 잃어버리는 것이 나을 까 아니면 왕을 잃어버리는 것이 나을까? 이 예언대로 사자(레오니다스)는 쓰러졌지만 스파르타는 구원을 받았다.  

이 책은 과학의 잣대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과학으로 시공간의 무한함을 모두다 밝혀낼 수는 없다. 과학은 종교가 아니다. 과학은 다만 종교의 길을 밝혀주는 무수한 재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델피에서 과학은 갈라진 틈에서 흘러나온 증기라는 단어를 밝혀내지 못하자 그 수천년의 역사를 단순한 사기 혹은 희극으로 격하시켰었다. 하지만 그 실체가 드러나자 과학은 한발 뒤로 물러나 더 정확한 과학적 증거가 나올 때까지 자신의 판단을 유보한다.  

하지만 델피의 퓌티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나의 비밀 가운데 하나를 발견했지만 나는 여전히 다른 비밀을 가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일화가 생각났다.  

하나는 디트리히 본 회퍼의 말이다. "그들나치)이 빨갱이를 잡아들일 때 우리는 침묵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사회주의자를 잡아들일 때도 침묵하였다.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민주주의를 탄압할 때도 침묵했고, 가톨릭을 칠 때도 침묵하였다. 우리는 기독교도이면서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를 잡으러 왔을 때 아무도 우리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흑백 영화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소년이 독일을 거쳐 고향인 헝가리로 귀한하면서 독일의 역에서 한 독일 중년 남자와 마주친다. 중년남자는 어디서 왔느냐를 물은 다음 가스실을 보았냐고 묻는다. 소년은 분명히 가동하고 있던 가스실의 존제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기에 보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중년의 독일 남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른 석방 수인을 향해 걸어간다.  

아더 퀘슬러의 "한낮의 어둠"에서 주인공 블라쇼프는 심문관에게 언제나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은 바깥 사람들에게 잊혀진 사람이다. 블라쇼프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좌절하고 절망하며 부정하고 확인한다. 왜 나치는 수용소의 입구에 꽃밭을 가꾸게 하고 곧 노동으로 더러워질 옷을 점검때마다 깨끗하게 하라고 강요하였을까? 인간에 대한 일말의 자비심 때문에... 결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희롱한 것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전지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수용소는 어쩌면 나치들에게는 하나의 천지창조 이전의 카오스였는지도 모른다. 그 카오스의 혼돈을 자신들이 질서를 부여하여 창조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나치 이후 이런 모호한 전지자의 수용소는 하나의 스테레오 타이프가 되었다. 미국의 관타나모나 이스라엘의 아람인 정치범 수용소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나치의 수용소와 다른 점이 없다. 인간성을 조롱하고 삶의 의미를 빼앗는 그 무지막지한 재소자 프로그램은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싸운 목적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종교적 교조주의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관타나모라는 수용소의 현실 속에서 아니면 아브 그라이브의 감옥에서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미국은 관타나모와 아브 그라이브로 대표되는 곳을 전지자의 수용소로 만들려했다면 탈레반은 한 나라를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물론 한마리의 쥐가 콩을 먹고 귀에 혹이 났다고 해서 모든 쥐는 콩을 먹으면 귀에 혹이 난다고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콩을 먹고 귀에 혹이 생기는 쥐도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는 이런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뉴스에서 다룬 관타나모의 현실이 얼마나 우리의 인식과 동떨어진 곳인지를 알게된다. 그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관타나모는 단순히 수용소가 아니라 인간성을 억압하고 말살하는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 게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