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 이종인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9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며 가지고 있던 오래된 강의록을 들춰 보았다. '선善이란 무엇인가?'로 들었던 것이었다. 선은 분명히 진리이고 하나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선도 집단에 따라서는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는 의문이 제기된다. 예를들면 공산주의자에게 있어서 선은 무엇일까?란 질문에 대한 답은 '임무의 완수'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척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당성과 임무/과업의 완성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선은 전혀 다르게 이해된다는 점이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이런 오류에 빠졌던 것이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평화와 히틀러의 독일이 추구하는 평화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착각에 빠져 독일의 전체주의적이며 집산적인 모습을 건전한 독일로 가는 발걸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대중들이 일사불란하게 오른손을 높이 쳐들며 일사분란하게 '하일 히틀러'를 외쳤을 때 서구의 여행자들은 괴기함이나 오싹함보다는 독일이라는 민족성의 한 단면, 성실함과 복종심을 보았던 것이다. 일부 소수만이 이 집산주의적인 성실함과 복종심이 그릇된 정치가로 인해 잘못되었을 때 인류에 커다란 불행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이들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히틀러에 의해 왜곡되었는지 정확하게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그 많은 서구의 독일 전문가들 조차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을 완독하거나 정확하게 그 속뜻을 파악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져 전쟁에 지치고, 베르사이유 조약에 분개한 독일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헤프닝으로 바라 보았다. 히틀러식 민주주의가 강박적 집착, 모든 비판의 억압, 당에 가장 오래 근무한 사람이 가장 좋은 보직을 맡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결코 믿을 수 없었다.
여행자들은 독일인의 상명하복에 의한 규율을 친절로 오해했고, 베를린 올림픽의 질서정연함과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규율성을 착각했던 것이다. 문인들마저 히틀러의 독일이 현대세계의 무질서와 퇴폐성을 정화시키는 선봉장으로 착각하곤 했다. 그들은 독일 각지의 광장에서 책이 불타오를때도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로 이해했을 뿐이었다. 하이데커가 나치당에 입당했을 때도 독일대학의 강의실과 성당의 제대 앞에 나치 깃발이 걸려도 사람들은 지식과 종교가 그 사악함에 굴복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서구의 여행자들에게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다시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한 서구의 강력한 일원의 하나로 생각했지 그들이 자신들에게 총뿌리를 겨눌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독일은 친절하고 물가가 싸고 중세의 풍경을 간직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을 때도 자신들의 국가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있음을 들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들 서구의 방랑자들은 독일이 추구하는 선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선은 히틀러와 나치의 선이었고, 스탈린이 생각하는 선과도 달랐다. 이런 순진한 착각은 결국 자신들에게 커다란 짐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이다.
삼인성호三人城虎라는 말이 있다. 성안에서 세 사람이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이를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믿는다는 뜻이다. 나치는 바로 이 프로파간다에 방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구를 향해 끊임없이 볼세비키란 호랑이를 막기 위한 독일, 이들을 격파하는 선두의 독일을 선전하면서 자신들의 군비확장을 정당화했고 자신들만의 정치색채를 독일적인 것으로 선전함으로써 서구는 독일의 선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선과 다르지만 유사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이런 선전선동을 통해 끊임없이 서구를 속여왔다. 그것은 비단 여행자들만이 아니었다. 정치가들도 이 선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뮌헨에서 독일은 서구를 상대로 모든 것을 다 얻었다. 서구의 정치가들은 이번만 양보한다면 항구적인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독일은 이번것을 얻으면 다음 것을 요구할 작정이었다. 이렇게 서로가 공유한 단어 중 하나를 잘못 이해하여 결국 서구와 독일은 건너지 않아도 되었을 불의 강을 건너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