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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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유럽은 양심과 감정이 지배한 시기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찬미와 혁명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정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대공황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은 사람들에게 파시즘에 대하여 관용의 느낌을 갖게 하였다. 자본가들 또한 거북스런 공산주의보다는 파시즘에 경도되었고, 자본가들은 파시즘을 자신들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사냥개쯤으로 여겼다. 이에 반해 지식인들은 파시즘보다는 공산주의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집산화 과정에서의 비인간적인 모습과 스탈린의 숙청을 통해 드러난 공산주의의 잔인성을 애써 무시하였다. 이들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에게 인간의 감정이 가미된다면 지상의 낙원은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의 안식처는 될 것으로 믿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은 1936년 6월18일 이후 유럽인들의 감정과 이성에서 사라지게 된다.  

스페인 내전은 이베리아 반도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다. 비록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이었지만 이 전쟁의 과정은 모든 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체험을 제공하였다. 3년동안 지속된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4가구에 1집 꼴로 사망자가 나왔는데 이는 스페인 전체가 내전의 희생자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깊은 상처는 계급과 계층의 갈등으로 더욱 증폭되어 내전 기간 내내 보복과 처형의 악순환을 불러왔다. 스페인 사람들은 내전 내내 풍차를 향해 내달리던 돈키호테처럼 광기에 휩싸였다가도 알지 못할 종교적 침울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들은 내전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들의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를 기억했고, 현실의 참담함에 슬퍼하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계급과 계층의 갈등이 너무나 커 귀족과 일반 평민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스페인은 유럽이면서 아프리카였고, 현대에 존재하면서 중세의 마지막 아들이었다. 이러한 절망감이 무려 5백년 동안 스페인을 지배했다. 이 결과 스페인 민중들은 자신들을 오래 전부터 지배해왔던 종교와 정치에 반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민중들은 지배층과 결탁한 그리스도교의 대안으로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 무정부주의는 형제애, 상부상조, 타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존중, 경작지의 공동경작과 수확물의 평등분배, 이웃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급속하게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잠식하고 국가의 지도력에 도전하였다. 교회와 국가는 스페인의 새로운 종교인 '무정부주의'를 국가와 교회를 좀먹는 암으로 규정하였다. 여기에 혁명적인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가세하면서 스페인은 이즘-ism의 시험장이 되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스페인 민중에게 사랑을 받았던 무정부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공화주의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분권적이며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이들 공산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자들은 중앙집권적이며 사상의 통제를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스페인 내전은 무정부주의자에 대항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공화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이었다. 내전이 발발하였을 때 각 집단은 서로를 견제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정부주의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좌파와 우파 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바르셀로나를 장악하고 있던 무정부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숙청되었고, 북부지역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우파의 공격과 좌파의 방관으로 말소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유엔이 창설되기 이전에 각국의 의용군이 모여 하나의 여단을 만들어 싸운 최초의 전쟁이었다. 물론 이 국제여단이란 하나의 상징이 스페인 내전의 모순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그 공통의 열정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최초의 국제여단은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의 베를린 올림픽에 대항하여 국제노동자 올림픽을 개최하려 모였던 각국의 노동자들이 결성한 부대였다. 국제여단은 그 이름에 걸맞는 군대는 아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제 하에서 철저히 선전물로 이용되었다. 이들의 자유분방함은 규율과 통제를 신봉하는 집단에게는 의심스런 존재였다. 그러기에 이들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사상이 아니라 순수한 자유에 대한 열정으로 스페인 내전에 뛰어든 인간 집단이었다. 

스페인 내전의 이상과 낭만성은 좌파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전선의 지배권을 장악한 순간 소멸되고 만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교조주의적인 맹목적 복종과 통제만이 남게되었다. 부패와 무능은 공화파에 대한 인민전선의 투쟁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이상과 순수성이 짖밟힌 스페인 내전은 더이상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류 양심의 전쟁이 아니었다. 철저한 자국의 이익계산 속에서 스페인은 자신들의 손으로 무참하게 유린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정치적 야망은 앞으로 다가올 세계대전이란 큰 그림 속에서 그려지게 된다. 히틀러는 스페인이 파시즘화 됨으로서 인민전선의 프랑스를 견제해 줄 것으로 생각했고, 스탈린은 적색혁명의 물결을 유럽의 끝으로 수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동상이몽 속에서 스페인은 고통을 받았고, 상처를 입었다. 그 고통과 상처의 치유는 한 세대를 넘어 계속될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종료되었을 때 200백만명의 민간인들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수년 동안 강제노역을 통해 사상개조를 받았고, 10만의 사람들이 총살대 앞에서 스러졌다. 그리고 50만명은 10년 이상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전이 종결된지 15년 이후에야 겨우 스페인은 내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다. 내전으로 스페인은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형성했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폭력으로 억눌린 통일이었다. 아무도 프랑코의 독재에 대해 거부할 수 없었다. 프랑코의 우파 역시 철저한 자가 정화를 통해 반대파를 척결하였다. 교회와 왕정의 통치를 거부하는 집단은 가차없이 숙청되었다. 프랑코의 권력의 핵심이 될  팔랑헤당은 권력의 핵심에서 비껴난 상태를 유지하며 체제의 하부구조를 이루었다. 프랑코는 모든 권력과 지배의 원칙에 교회와 국가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그 어느 것도 이들보다 상위에 위치할 수 없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 두 집단과 동등할 뿐이었다.  

1939년 3월31일 신의 은총(?)으로 스페인의 지배가 확정된 순간 프랑코는 부르고스에서 유행성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부관이 그의 침실로 들어와 전쟁이 끝났고 우리가 스페인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보고하자, 그 속을 알 수 없던 독재자는 '아주 좋아, 고맙네'라고만 말하였다. 그 조용한 대답은 3년 동안의 갈등을 40년 후에 폭발시키게하는 음울한 전주곡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책으로는 형성사의 "스페인 내전 연구-인민전선의 붕괴와 프랑코의 집권"을 참조하면 더욱더 내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에 대해서는 미토의 "역사의 격정-자율적 반란의 역사"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략한 대강을 보려면 "신동아 86년 3월,4월호(?)에 실린 "인류양심의 전쟁 스페인 내전(지그프리트 코겔프란츠의 슈피겔지 연재기사 번역)"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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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런 좋은 책이 있었다니!!

dohyosae 2011-08-21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요즘 게을러서 제대로 정리도 안된 서재인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