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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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유럽은 양심과 감정이 지배한 시기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찬미와 혁명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정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대공황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은 사람들에게 파시즘에 대하여 관용의 느낌을 갖게 하였다. 자본가들 또한 거북스런 공산주의보다는 파시즘에 경도되었고, 자본가들은 파시즘을 자신들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사냥개쯤으로 여겼다. 이에 반해 지식인들은 파시즘보다는 공산주의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집산화 과정에서의 비인간적인 모습과 스탈린의 숙청을 통해 드러난 공산주의의 잔인성을 애써 무시하였다. 이들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에게 인간의 감정이 가미된다면 지상의 낙원은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의 안식처는 될 것으로 믿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은 1936년 6월18일 이후 유럽인들의 감정과 이성에서 사라지게 된다.  

스페인 내전은 이베리아 반도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다. 비록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이었지만 이 전쟁의 과정은 모든 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체험을 제공하였다. 3년동안 지속된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4가구에 1집 꼴로 사망자가 나왔는데 이는 스페인 전체가 내전의 희생자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깊은 상처는 계급과 계층의 갈등으로 더욱 증폭되어 내전 기간 내내 보복과 처형의 악순환을 불러왔다. 스페인 사람들은 내전 내내 풍차를 향해 내달리던 돈키호테처럼 광기에 휩싸였다가도 알지 못할 종교적 침울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들은 내전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들의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를 기억했고, 현실의 참담함에 슬퍼하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계급과 계층의 갈등이 너무나 커 귀족과 일반 평민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스페인은 유럽이면서 아프리카였고, 현대에 존재하면서 중세의 마지막 아들이었다. 이러한 절망감이 무려 5백년 동안 스페인을 지배했다. 이 결과 스페인 민중들은 자신들을 오래 전부터 지배해왔던 종교와 정치에 반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민중들은 지배층과 결탁한 그리스도교의 대안으로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 무정부주의는 형제애, 상부상조, 타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존중, 경작지의 공동경작과 수확물의 평등분배, 이웃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급속하게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잠식하고 국가의 지도력에 도전하였다. 교회와 국가는 스페인의 새로운 종교인 '무정부주의'를 국가와 교회를 좀먹는 암으로 규정하였다. 여기에 혁명적인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가세하면서 스페인은 이즘-ism의 시험장이 되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스페인 민중에게 사랑을 받았던 무정부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공화주의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분권적이며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이들 공산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자들은 중앙집권적이며 사상의 통제를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스페인 내전은 무정부주의자에 대항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공화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이었다. 내전이 발발하였을 때 각 집단은 서로를 견제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정부주의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좌파와 우파 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바르셀로나를 장악하고 있던 무정부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숙청되었고, 북부지역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우파의 공격과 좌파의 방관으로 말소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유엔이 창설되기 이전에 각국의 의용군이 모여 하나의 여단을 만들어 싸운 최초의 전쟁이었다. 물론 이 국제여단이란 하나의 상징이 스페인 내전의 모순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그 공통의 열정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최초의 국제여단은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의 베를린 올림픽에 대항하여 국제노동자 올림픽을 개최하려 모였던 각국의 노동자들이 결성한 부대였다. 국제여단은 그 이름에 걸맞는 군대는 아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제 하에서 철저히 선전물로 이용되었다. 이들의 자유분방함은 규율과 통제를 신봉하는 집단에게는 의심스런 존재였다. 그러기에 이들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사상이 아니라 순수한 자유에 대한 열정으로 스페인 내전에 뛰어든 인간 집단이었다. 

스페인 내전의 이상과 낭만성은 좌파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전선의 지배권을 장악한 순간 소멸되고 만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교조주의적인 맹목적 복종과 통제만이 남게되었다. 부패와 무능은 공화파에 대한 인민전선의 투쟁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이상과 순수성이 짖밟힌 스페인 내전은 더이상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류 양심의 전쟁이 아니었다. 철저한 자국의 이익계산 속에서 스페인은 자신들의 손으로 무참하게 유린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정치적 야망은 앞으로 다가올 세계대전이란 큰 그림 속에서 그려지게 된다. 히틀러는 스페인이 파시즘화 됨으로서 인민전선의 프랑스를 견제해 줄 것으로 생각했고, 스탈린은 적색혁명의 물결을 유럽의 끝으로 수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동상이몽 속에서 스페인은 고통을 받았고, 상처를 입었다. 그 고통과 상처의 치유는 한 세대를 넘어 계속될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종료되었을 때 200백만명의 민간인들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수년 동안 강제노역을 통해 사상개조를 받았고, 10만의 사람들이 총살대 앞에서 스러졌다. 그리고 50만명은 10년 이상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전이 종결된지 15년 이후에야 겨우 스페인은 내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다. 내전으로 스페인은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형성했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폭력으로 억눌린 통일이었다. 아무도 프랑코의 독재에 대해 거부할 수 없었다. 프랑코의 우파 역시 철저한 자가 정화를 통해 반대파를 척결하였다. 교회와 왕정의 통치를 거부하는 집단은 가차없이 숙청되었다. 프랑코의 권력의 핵심이 될  팔랑헤당은 권력의 핵심에서 비껴난 상태를 유지하며 체제의 하부구조를 이루었다. 프랑코는 모든 권력과 지배의 원칙에 교회와 국가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그 어느 것도 이들보다 상위에 위치할 수 없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 두 집단과 동등할 뿐이었다.  

1939년 3월31일 신의 은총(?)으로 스페인의 지배가 확정된 순간 프랑코는 부르고스에서 유행성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부관이 그의 침실로 들어와 전쟁이 끝났고 우리가 스페인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보고하자, 그 속을 알 수 없던 독재자는 '아주 좋아, 고맙네'라고만 말하였다. 그 조용한 대답은 3년 동안의 갈등을 40년 후에 폭발시키게하는 음울한 전주곡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책으로는 형성사의 "스페인 내전 연구-인민전선의 붕괴와 프랑코의 집권"을 참조하면 더욱더 내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에 대해서는 미토의 "역사의 격정-자율적 반란의 역사"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략한 대강을 보려면 "신동아 86년 3월,4월호(?)에 실린 "인류양심의 전쟁 스페인 내전(지그프리트 코겔프란츠의 슈피겔지 연재기사 번역)"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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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런 좋은 책이 있었다니!!

dohyosae 2011-08-21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요즘 게을러서 제대로 정리도 안된 서재인데...
감사합니다.
 
속일본기 1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클래식 5
스가노노마미치 외 엮음, 이근우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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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의 고대사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氏姓-우지/카바네라고 부른다-에 관한 것이이 아닐까. 그 긴 이름 속에서 어떤 것이 진짜 이름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이런 고역은 속일본기1을 읽다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길고 지루한 이름과 관직명의 덤불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읽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왜 고대의 일본인들은 현대인이 볼 때 무의미하다싶은  이런 기록을 끊임없이 서술하며 기록하였을까?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氏-우지-는 거주지역 혹은 직능을 표시하는 씨족명을 얻은 일족을 가리키고, 姓-카바네-은 氏의 수장에게 주어지는 세습적인 칭호라고 한다. 즉 氏는 공통의 세습적 氏를 가진 가구들의 결합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집단 안에 세습칭호인 姓을 가진 한개 이상의 혈통이 존재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氏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姓은 지배자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의 氏姓제도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한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한 집단 혹은 여러집단을 하나로 묶는 끈으로서의 역할이 바로 氏姓이었던 것이다. 한 예로 일본의 氏는 혈족이 아닌 자를 양자로 삼는 전통이 강한데 이것은 동질적인 혈족은 아니지만 같은 氏를 조직함으로서 소규모 공동체의 수장 및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배아래로 흡수하려 시도하였다. 이런 일본의 관습은 혈통,부계혈통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하지만 이들에게 氏姓의 울타리 안에서 상하복종의 관계가 형성됨으로 혈통보다는 능력에 의한 양자제도가 자연스럽게 고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속일본기의 기록은 천황이라는 단일 지도국가로 향해가는 일본의 새로운 조직도와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천황-이들은 姓이 없다. 오직 이름만 있을 뿐이다-을 중심으로 일본은 하나의 거대한 氏姓국가로 재편하였던 것이다. 즉 氏라는 거대한 울타리-혹자는 우지의 어원을 한국어 울(울타리)로 보기도 한다-안에 조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대의 일본부터 현재까지 내려온 일본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왜 일본인들은 천황제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왜 천황이라는 단일지배체제 속에 아무 불만없이 편입되려 하였을까? 그것은 일본이라는 하나의 국가-솔직히 국가라기 보다는 천황을 가부장으로 하는 하나의 집단-속에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자신의 위치가 고정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속일본기1의 세계는 이러한 세계가 시작되는 고대 일본의 모습을 지루하게 혹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보충>이런 氏의 예는 백제에서도 볼 수 있다. 한 예로 흑치상지를 들 수 있다. 흑치氏는 원래는 백제 왕족인 扶餘성姓을 가진 집단이었는데, 그 조상이 흑치지방의 영지를 봉토로 받았기에 자손들이 흑치라는 씨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흑치상지의 비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즉 일본의 고대사에 있어서 백제의 역할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제는 아마도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고대사 국가 가운데 건국신화가 없는 유일한 경우가 아닐까. 즉 백제는 시작부터 중국이나 주변의 국가들로부터 문물을 전수받아 그것을 자신들의 통치에 작용시켰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원동력 덕분에 처음부터 자신들의 노하우를 타국에 전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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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조세프 R. 스트레이어 지음, 김동순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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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중세는 복합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중세의 밑그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는 늘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왕국이 아니다-를 건설하려 하였다. 물론 이 나라의 주도권은 성직자들이 갖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명제-지상에 건설된 하느님의 나라와 종말론적 미래-가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세는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성직자들은 중세를 완벽한 종교의 세계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붕괴로 생겨난 공백을 종교의 힘으로 보전하였다. 주교좌를 중심으로한 신의 도시는 로마의 전통을 보전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로마 역시 그 넓은 제국을 지배하는데 도시-시비타스-중심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결국 중세의 도시는 이런 성직자들의 바램으로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이 있고 광장의 좌우에 행정과 입법 그리고 사법을 상징하는 건물이 들어서고 그 외곽으로 시장이 설치되었다. 이런 구조는 어떻게 보면 교회, 정부, 시민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삼위일체의 지상 구현이었다.하지만 이들에게는 관용과 자비가 없었다. 이교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는 언제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그 정당성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적용될 때 언제나 부조화를 불러일으켰다.

반면에 세속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바이킹으로 대표되는 야만족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성채-부르구스-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근거지를 건설하였다. 성채로 둘러싼 자신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장원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성채에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성당과 지배체제를 건설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들은 중세를 특징짓는 장원체제를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조직을 경영할 머리가 없었다. 이들은 단순하고 잔인했다. 그 잔인성은 종교의 이름으로 표출되는 聖戰에서 언제나 정당성을 획득하였다. 결국 이들은 타자에 대한 잔혹함은 언제나 교회의 이름으로 상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일까, 이들에게 신앙심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종교를 통해 얻은 정당성과 합법성만이 중요시될 뿐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중세는 주교좌의 시비타스와 영주들의 부르구스의 경쟁이었다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 이 다르면서도 같은 同腹異父의 체제는 중세를 성과 속의 대결로 몰아갔다. 주교들이 지배하는 도시는 성스러움이 지배했지만 무력이 없었다. 반면 영주들이 지배한 도시는 무력은 있었지만 교회로 대표되는 성스러움이 없었다. 성스러움은 그것을 유지하고 전파할 수 있는 힘을 원하였고, 세속의 권력은 힘은 있었지만 그것을 정당화할 성스러움을 필요로 하였다. 이 두 이질적인 요소가 어떻게 합쳐졌을까? 중세 기간 내내 이 둘은 결코 통합되지 않았다. 마지못해 타협은 되었을지 몰라도 어느 한 쪽이 굴복하여 한 쪽으로 통합되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 결국 아무도 승리하지 못하였음에도 세속의 권력과 교회는 자신들이 중세의 지배자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속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세웠던 시비타스와 부르구스 내부의 변화였다. 이 도시들에서 서서히 힘을 비축하기 시작한 시민계급이 새롭게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세속과 교회의 사고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계층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정당화해줄 종교에 기댈 신분도 없었지만 그들 자신이 성스러운 신분에 편입될 의향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노력으로 부를 축적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만들어간 새로운 계급이었다. 성직자-귀족-농민으로 구성된 중세의 신분 질서에 이들이 위치할 공간은 없었다. 이들은 성직자도 귀족도 아니었지만 농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의 뿌리는 세속권력과 교회권력이 자리를 잡고 있던 그곳이었다. 그러기에 이들 신흥계급은 어떻게 보면 세속적이었지만 다른 편의 그림자는 성스러운 교회에 닿아있었다. 이들은 부를 추구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세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위선에 경멸적인 시선을 보냈고 세속의 권력을 우습게 알았다.  이런 이들의 사고와 시선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 새로운 계급은 자신들의 근원을 고대에서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 체제의 이데올로기에서는 자신들을 정당화할 어떤 근거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에 대한 편견과 엄격한 위계질서는 새로운 계급이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고대의 그리스-로마의 시대를 하나의 전거로 삼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하였다. 구원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믿음의 깊이는 기도의 힘이 아니라 근면과 성실을 통해 쌓아올리는 부의 크기로 측정되었다. 믿음의 느린 시간은 이들에게 죄악이었다. 이들에게 시간은 돈이었으며 신앙이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고는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신학이 한 걸음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하면서 가능하였다. 교회는 이들의 사상을 이단시하면서도 자신들의 체제에 맞게 재단하였다. 교회는 신 중심의 창조에서 과감하게 이 지상의 창조물을 통해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하였다. 단일성에서 다양성으로 퍼져나간 창조사상을 다양함에서 단일함으로 시각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교회는 변화의 조짐이 퍼져나가던 시대에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유럽의 뿌리에는 세련과 야만이 혼재해 있음을 알게된다. 그리스-로마로 대표되는 문명의 뒤 편에 숨어있는 잔혹함이나 불관용은 게르만으로 표현되는 야만성에서 언뜻 언뜻 드러나는 관용과 포용을 보노라면 뿌리의 근원이란 큰 테두리에서보다는 그 깊은 곳의 본성을 살펴봐야만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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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전사들
에릭 힐딩거 지음, 채만식 옮김 / 일조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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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말을 이용하여 전쟁을 벌인 것이 무릇 35세기가 된다고 한다. 20세기 폴란드의 창기병인 포모르사케가 나치의 기갑군에게 용맹하게-하지만 무모한-돌격한 것을 끝으로 사실상 인간이 말을 이용하여 전쟁을 벌인 시대를 종언을 고하였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주민들에게 커다란 공포와 위협으로 존재하였다. 이 책은 그 오랜 세월에 걸쳐 초원의 유목민들과 농경사회의 정주민들이 투쟁한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시선이 유목민의 시점이란 것이 다를 뿐이다.  

유목민들은 그 광활한 초원을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속도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 속도에 화력이라는 무장력을 덧붙임으로서 자신들만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것은 근세 이전에 어느 민족도 가질 수 없었던 군사적 기동성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들 유목민들은 이를 바탕으로 정착민을 공격하여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다. 이는 정착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약탈이었지만, 유목민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된 것이었다.  

사실 군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농경정착민이 초원유목민을 상대한다는 것은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는다. 농경민들은 언제나 그곳에 고정된 지역에 거주한 반면 초원유목민은 자신들이 침입의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이런 차이점으로부터 시작된 유목민과 정착민과의 투쟁은 언제나 유목민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렇다면 그 승리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문명세계로의 동화라는 씁쓸한 결과를 낳았다. 그 수많았던 유목민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광대한 초원 저 너머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문명 세계로 흡수되어 흔적 없이 희석되고 말았다.  

반면 정착민 사회는 유목민과의 투쟁을 통해 기마술과 활의 진정한 가치를 배웠다. 이 두가지는 정착민 사회의 전쟁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활의 경우 유목민들의 단궁이 활의 제조에 큰 영향을 끼쳤고, 기마술은 전쟁의 속도감에 영향을 끼쳤다. 기차나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까지 기병대는 가장 빠른 전장의 이기였다.  

초원의 전사들은 말을 통한 기동력, 활에 의한 장거리 사격 능력을 가짐으로서 현대로 말하면 전격전의 효시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막강한 곳을 우회하여 후방을 기습함으로써 적의 사기를 꺽고, 거짓 후퇴를 통해 우회 포위 섬멸이라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유목민들은 역사상 격변기에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착민 역시 유목민들의 이런 전술을 재빨리 흡수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감으로서 유목민족들이 가진 장점들이 서서히 상쇄되어 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화포의 발명으로 유목민들은 그들의 전술적 우위성이 약화되어 갔지만 그 위혁은 19세기까지 유지되었다. 1910년 멕시코 내란 당시 판쵸 비야의 농민기마군이 오브레곤의 정규군-보병이 주였다-을 공격하였다. 철조망으로 방어된 참호 뒤편에서 오브레곤의 군대는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진지를 공격한 판쵸 비야 군대는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사실상 이후 기병대의 무모한 공격이 몇차례 더 세계 전사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막장 뒤의 크레딧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유목민족이 역사의 주역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들의 영향력이란 점이다. 지금도 미국은 군사편제에 기병대가 유지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말 대신 헬리콥터와 장갑차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국가에서도 명칭은 다르지만 말의 기동력을 대신하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군사적 기동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목민 전사들이 일상적으로 영위하였던 기동성과 화력이라는 요소를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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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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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homini lupus. 이것은 다 아는 명제.  

다윈이 인간의 법칙을 생물학적으로 정의하기 이전 부터 인간은 인간의 적이었다. 이 명제는 여성의 적이 여성이듯 인간의 적은 인간이란 명제가 성립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홉스의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명제 이전부터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존 세계 안에서 인간의 본능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와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무엇'과 '어떤'은 아주 다른 질문 형식이기 때문이다. 무엇은  존재 혹은 삶을 물어보는 것이라면 어떤 것은 그 무수한 존재의 형식을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에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든가 아니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라는 것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선하게 태어났다면 그 행위 자체가 이해 될 수 없는 것이지만, 악하게 태어났다면 그 행위는 정당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여기서 질문하는 것은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혹은 '왜' 그렇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한다면 필연적으로 변명이 수반된다. 변명이 나온다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한 성찰이 있었고 그 행위에 대한 의혹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인간이 십자가에 달려있으니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보자구."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저 자가 엘리야를 부르는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 까지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이 질문의 답은 끊임없는 변명의 연대기를 형성하게 된다. 깊은 반성이 없기에 즉흥적인 사과와 도발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그 행위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이런 지루한 도발과 사과의 세레모니는 의미가 없게 된다. 저자는 그 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도발과 사과의 기록이 지속되는한 희생자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저자는 자살로서 그 의미없는 반복을 고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 극한 상황까지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여전히 우리에게 십자가의 예수를 조롱하는 무책임한 단어를 고발하는 하나의 사실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첫경험은 우리의 삶에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 되지만, 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것은 영원히 하나의 허상 혹은 자신의 상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프리모 레비는 이런 현실에 절망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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