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앞에서 본 중세 - 책, 안경, 단추, 그 밖의 중세 발명품들, 역사도서관 003 역사도서관 3
키아라 푸르고니 지음, 곽차섭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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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를 쓰는 필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상대방을 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두번째는 상대를 아주 하찮게 기록하는 필법이다. 이 두 방법은 각기 장단점이 있다. 상대를 강하게 표현함은 그만큼 상대방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강한 상대방을 이긴 자의 더 강함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반면에 두번째 방법은 역사의 필연성에 중점을 둔다. 자신과 싸운 상대방이 이러 이러 해서 결국은 스스로 붕괴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이론에 대한 단점은 의구심이다. 즉, 상대가 약했다면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결국은 붕괴되지 않았을까하는 의구심이다.

중세를 바라보는 우리들 역시 이런 장단점에 봉착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중세를 기술할 때면 그 시기는 암흑이다. 그래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흐름을 무리없이 설명 할 수 있다. 반면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중세는 태양이다. 하지만 이 태양의 밝음은 종교재판과 체제의 경직성이라는 모순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흐름에 가톨릭이 매끄럽게 승차할 수 없다는 점이다.

중세가 암흑이었다는 이론은 이차세계대전 이후 서구 학계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학계의 주장과 대중의 사고 사이에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런 융화될 수 없는 간극을 매우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중세의 현실을 대중들에게 보이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부분적으로 효과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중세를 종교적 사회로 규정하는 한 그 노력은 한계를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를 지배한 가톨릭은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수구보수의 논리로 후스를 화형시키고,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를 침묵하게 했으며 사보나롤라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사적인 혹은 사상사적인 면으로 볼 때 중세는 정지되어 있던 시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움직이던 시대였다. 성직자, 귀족, 농민으로 구성된 무너질 수 없는 신적 위계질서의 사회였지만 과학의 발전은 이런 구조를 뛰어 넘었다. 수평으로 설치된 물레방아가 수직으로 개량되고 인력이나 축력 대신 자연의 힘을 이용한 풍차나 가축의 마구 개량과 같은 것은 중세가 우리들의 판단처럼 간단하게 고정적이고 불변의 사회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보나벤투라,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를 통해 재해석하여 철학이 신학에 큰 충격을 주게 했다는 점에서 중세의 정신적인 모습은 간단하게 암흑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 책은 중세의 종교적인 측면이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중세의 발전과 기술적 혁명에 대한 기록이란 것이다. 저자는 이런 기록을 통해 중세의 모습이 고여있는 연못의 썩은 물이 아니라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 물꼴이 개방된 신선하고 살아있는 연못, 즉 개방된 중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개방된 모습은 우리에게 희귀한  중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사실 중세 유럽의 모습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중심에 도이칠란트가 가세하는 모습이라 하겠다. 이런 고정적인 중세의 모습에 이탈리아의 중세 모습이 보여진다는 것은 무척 희귀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 게한다. 이탈리아라는 희소성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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