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를 이해하려면 그 넓은 땅덩어리와 신분제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보이는 인도 亞大陸은 대륙이라기에는 약간 좁고, 하나의 국가라기에는 너무 넓어 지리학지들은 대륙에 버금간다하여 아대륙이라 이름 붙였다. 그래서일까? 동쪽의 뱅골만에 사이클론이 불어닥치는 그 순간에도 서쪽의 아라비아해에서는 뜨거운 열풍이 인도 아대륙을 습격한다. 태풍과 한발이 동시에 존재하는 대륙이 바로 인도인 것이다. 게다가 데칸고원을 중심으로 북쪽은 아리아계 인종이 남쪽은 드라비다계 인종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 삶의 방식은 얼굴의 생김새 처럼 이질적이다.
이런 동시성과 다양성이 존재하는 대륙에 신분제도-카스트-가 존재한다. 이 신분제도는 땅덩어리의 다양성과 동시성을 고정시키는 쐐기 역할을 한다. 오래 전 고다마 싯달타가 이 사성제도를 부정하는 종교를 설파했지만 계급세력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좌절하고 말았다. 인도의 불교는 12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대륙에서 소멸되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변형한 불교가 12세기까지 뱅골과 비하르에 존속하였지만 이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불교의 소멸은 종교의 생성,성장,소멸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브라만교에 대한 개혁으로 시작된 불교는 그 참신성과 진보성에 의해 고무되었지만 결국 자신들이 배격했던 브라만교 의식에 굴복하고 말았다. 브라만교는 불교의 도전에 직면하자 자신들의 종교에서 소외되었던 여성과 수드라 계급에 대한 교리를 수정하였다. 이에 반해 자신들의 일시적 승리에 도취된 불교는 대중과 함께하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세계로 침잠하였다. 이들은 대중의 언어인 팔리어를 버리고 귀족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면서 백성의 삶에서 빠르게 이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였던 브라만의 악습에 물들어 결국은 인도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렇게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졌지만 인도 아대륙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물질 생활에서 비롯된 사회악을 완화시키고자한 부족사회의 특징인 원시공산주의로의 복귀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함께 불교는 소외계층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브라만 사회의 계급주의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설파함으로서 인도 사회의 한 특징이 된 소 숭배 사상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 1949년 새로운 공화국으로 출범한 뒤 국세조사를 실시하였을 때 불교도는 18만명에 불과하였다. 인도의 인구에 비하면 그 숫자는 거의 무시해도 될 미미한 것이었다. 이런 불교가 1960년대 초 325만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당시 인구의 1퍼센트에 근접한 숫자였다. 이렇게 인도의 불교 신자 수가 급증한 데는 불가촉 천민 출신의 사회개혁가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된지 8백년이 흐른 뒤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교로 양분된 인도 사회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8백년전에 사라진 불교는 20세기에 다시 그 오래 전 자신들이 잊고 있던 고다마 싯탈타-부처-의 온전한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정신을 20세기에 인도의 사성제도 속에서 외쳤던 것이다. 이 불교의 평등사상은 불가촉 천민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에게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인도를 떠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라만과 이슬람은 인도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인도를 분열시키지 않으면서 자유.평등.우애에 뿌리를 둔 인도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 슬로건에 합당한 종교는 사성제를 주장하는 브라만교나 알라만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이슬람이 아니라 바로 상생의 종교인 불교라고 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