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862년 잉글랜드를 방문한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나라의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에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낀 것은 전통이란 이름에 의해 억눌린 그 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더 절망해야 했던 것은 그 사실을 그들 본인은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도 않고 다만 자신들의 전통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을 읽으면서 이 생각이 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조르그 베리샤나 알리 비낙, 마르크 우카시에르의 세계는 베시안 보릅시와 디안 보릅시의 세계와 다른 점은 없다. 있다면 그 세계를 이해하는 마음과 눈일 뿐이다. 한쪽의 관습법세계와 다른 한쪽의 실정법 세계는 각자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지는 법칙이다.  그러나 베시안의 입장에서 본다면 관습법의 세계는 자신이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불법의 세계이며 야만의 세계일 뿐이다. 하지만 마르크 우카시에르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베시안의 세계가 불완전한 세계인 것이다. 그에게 도시의 인간들은 명예도 피의 값도 계산할 줄 모르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는 이 세계가 영원히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관습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마르크 우카시에르의 사고방식은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 정당성은 알리 비낙과 그 수행원들에서 잘 드러난다. 관습법을 해석해주는 알리 비낙은 측량기사와 의사를 대동하고 다닌다. 그것은 실정법이 그렇기 때문이다. 관습법의 세계에서는 오직 알리 비낙의 말 만이 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정법은 측량기사와 의사를 대동하게 함으로서 실정법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하지만 토지의 경계선 문제라든가 피의 복수의 자리에 가서도 측량기사와 의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기하학적인 측량과 해부학적인 의학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자신들의 증인들 앞에서 명예의 맹서를 하므로서 이루어지는 것을 왜 부질없는 측량과 의학적 소견으로 해결해야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이방인들의 눈으로 볼 때 불합리한 세계이다. 복수와 휴전, 그리고 한 달간의 유예기간이 끝나면 다시 시작되는 피의 보복을 재판과 그에 따른 형벌로 이해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은 결코 섞일 수 없다.

몬테네그로와 코소보의 산악지역으로 이어지는 알바니아 북부의 황량함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카눈의 세계는 무지함이란 단어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불가사의함에 점차 함몰되어가는 디안 보릅시의 모습을 보면서 불안해 하는 베시안 보릅시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통을 현대적 의미로 재생하려 하는 베시안 보릅시의 이론은 죽음을 담고 다니는 북부지역의 인간 군상들에 의해 하나씩 해체되어 간다. 나는 피의 복수를 한 사람입니다라는 표시인 검은 상장을 팔에 달고 다니는 인간들에게 전통의 해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전통은 해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시안과 같은 인간들이 해체하는 것은 전통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허구의 전통이다. 그 허구가 깨져버리면 남는 것은 그곳을 떠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생각한다는 인간들을 버려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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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ka09 2009-08-05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해되지 않는 소설을 덮으며, 갸우뚱 거렸던 어려움들을 리뷰를 통해 도움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