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中世의 巡禮旅行:산티야고1)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중심으로

 성지가 ‘종교적인 유적이 있는 곳’이라고 넓게 정의 된다면 중세 유럽은 전체가 성지였을지도 모른다. 각 지역마다2, 마을마다 중세 유럽인들은 자신들만의 성인을 탄생시켰고, 그 장소를 성지로 신성시하였다. 그러나 성지를 ‘종교의 발상지나 순교가 있었던 곳’으로 축소 해석한다면 중세 유럽인들의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인 ‘예루살렘Jerusalem’, 그리스도교 최고의 수장이 머무는 교황의 도시 ‘로마Roma’,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의 갈리시아 지방에 있던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다. 굳이 한 곳을 더 추가한다면 잉글랜드 인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던 ‘캔터베리Canterbury2)가 있었다. 이 네 장소는 중세 유럽인들이 평생 한 번은 순례를 해봤으면 하는 성지였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왜 이렇게 성지 순례에 집착하였을까. 그것은 ‘종교적 열정’과 ‘속죄’와 ‘질병의 치유’를 위한 것이었다. 죄에 대한 그 보속補贖의 차원에서 성지 순례는 민중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부채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례 여행의 과정에서 겪은 ‘경이로움과 신기함이 모두다 신앙의 열정 속에 응집되어 녹아들었다’는 점이다. 순례자들은 여행을 통해 육체적인 어려움과 ‘세속과 자연이 주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의 섭리와 손길을 느꼈다. 즉 순례의 과정 전체가 하나의 종교적 체험이었던 셈이다.

  시골이나 혹은 다른 도시에서 온 순례자들이 하나의 무리를 이뤄 시작하는 순례여행은 다양한 문화의 혼합체였다. 그 다양함은 수많은 전설적 회상의 원초적인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런 복잡한 순례자들의 구성은 자연스럽게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하게 하였다. 잉글랜드인은 잉글랜드 인끼리, 부르고뉴 인들은 부르고뉴 인끼리,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여 여행의 집단을 이루었다.

  그리고 집결지에서 성지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마을 주변에 널려있는 성당과 수도원과 성인들의 유물 등을 통해 자신들이 정말로 오래 전에 잊어버린 종교적 열정을 되살려 내었다. 이런 신산한 순례의 과정은 금욕과 극기와 고행이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순례 여행을 마친 순례자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영광에 동참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순례 여행을 통해 자신이 그 동안 저지른 죄를 보속하고 속죄하였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종교적 이유로 해서 중세 유럽에서는 종교적 순례 여행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중세 유럽인들이 평생에 한 번 순례하고자 했던 성지는 예루살렘이었다. 왜냐하면 이 거룩한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세 전 기간 내내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 최대의 순례 장소였다. 로마는 종교의 분열 이후 가톨릭 세계의 성지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 전에는 그리스도교 수장이 거처하는 장소이면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지로서 성지 순례자들에게 매력이 있는 도시였다. 특히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로마는 중세 인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각인된 성지가 되었다. 캔터베리는 대륙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섬에 위치해 있었지만 토머스 베켓의 순교 장소로서 그리스도교 인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안겨 주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곳은 대륙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의미의 또 다른 세계였다.

  이베리아 반도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3)는 피레네 산맥 너머에 자리 잡은 도시로서 중세 유럽인들에게 낮선 장소였다. 중세 인들에게 스페인은 유럽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나 이슬람 이교도의 세계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이 거칠고 황량한 땅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교 성지는 상당히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콤포스텔라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829년, 844년, 854년에 각각 성 야고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알퐁소2세가 성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과 함께 즉위 직후 이곳을 찾아와 경배한 뒤 대리석으로 된 관 위에 돌과 점토로 성소를 세우도록 명령하였고 이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안테알타레스Antealtares수도원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성지의 성인인 야고보가 스페인의 수호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844년 그리스도교 왕인 라미로Ramiro가 클라비호Clavijo에서 무어인들과 전투를 벌일 때 성 야고보가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교도를 물리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전설에 접목되어 있다. 이때부터 성 야고보는 ‘마타모어Matamore' 즉, 무어인의 정벌자란 칭호를 얻게 되었고, 서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이곳으로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외국인 순례자는 프랑스의 주교인 고테스칼크Gotescalc였다. 르 퓌Le Puy의 주교였던 그는 950년 경 시종들을 거느리고 성지를 찾아왔다. 주교는 도보가 아닌 말을 타고 성지 순례를 했다고 한다.

  11세기 들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한 재 반격을 통해 반도의 재정복Reconquista에 나서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대한 순례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1099년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되었지만 이슬람교도들은 1187년 다시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들의 손에서 탈환하였다. 이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부분적으로 폐쇄되었다. 이 결과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순례 여행을 로마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4) 이런 역사의 흐름은 이베리아 반도의 미래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도는 이베리아 반도 북쪽의 일부지역-갈리시아, 카스티야, 나바라, 카탈루냐-에 겨우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에서 갈리시아 지역의 콤포스텔라로 성지순례가 시작되면서 그리스도교도들의 인적 자원이 이베리아 반도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순례자뿐만 아니라 모험을 즐기는 사람, 기사 편력자,5) 장사치들이 모여 들어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6)의 십자군 운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종교적 운동은 서유럽 사람들에게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 결과 콤포스텔라는 새로운 종교적 순례지가 되었다. 이 순례지는 지리적인 위치에 의해 순례자들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 프랑스의 뚜르Tours, 베즐레Vezeley, 르 퓌Le Puy, 아를르Arles는 콤포스텔라 성지 순례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이 출발점은 프랑스와 이베리아 반도를 가르는 피레네 산맥의 두 곳-롱스보Renceveaux와 송포르Somport 통로-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와 연결되었다.(지도1참조)

  프랑스에 있는 성지 순례의 출발지 역시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뚜르는 ‘골Gaule족의 성자’로 추앙받는 성 마르땡Martin의 도시7)이고, 베즐레는 마리 마들렌느Marie Madeleine-마리아 막달레나-의 유해가 모셔진 도시였다. 르 퓌는 5세기 이래로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도시였으며, 아를르는 남프랑스의 유서 깊은 종교적 도시였다.8)

  순례의 길은 거룩함의 여행이면서 세속의 비열함이 난무하는 장소였다. 굳이 성서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중세 시대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길은 잡초로 뒤덮였고, 로마가 이루어 놓은 도로망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도로 중간 중간이 유실되어 마차로 여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중간 지대는 숲으로 뒤덮여 있었고 숲에는 늑대와 도적들이 사시사철 잠복해 있으면서 나약한 여행객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세의 농민들은 자신들의 장원을 빠져나와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종교사회였던 유럽 중세는 어떤 이유에서도 귀족이나 농민들의 성지순례의 열정을 제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중세 유럽인들은 성지 순례를 떠날 때면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집단을 이뤄 함께 떠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와 인접해 있던 프랑스는 산티야고 데 콤포스텔라 성지 순례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결과 중세 프랑스는 콤포스텔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출발지점의 도시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앞의 지도는 12세기 프랑스에서 출판된 “순례자의 가이드”라는 책에 나온 순례의 길을 지도상으로 구성한 것이다. 지도에서 보듯 순례자들의 집합장소는 프랑스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이 도시들로부터 다양한 지역을 지나 국경지대인 송포르와 롱스보에서 일차적으로 합류하여 국경을 넘은 다음 푸엔타-라-레이나에서 각지의 순례자들은 합류하여 스페인의 콤포스텔라로 향하였다. 이 순례의 여정에는 케른Cairn-중세에는 몽주아(나의 기쁨)이라고 불렀던 돌무더기들이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9) 이렇게 이들은 전설 속에서나 만나던 “생쟈크의 길Chemin de Saint Jacques"을 따라 갔던 것이다.10) 성지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교회와 성유물에 참배하고 대제단 위에 있는 성 야고보의 동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콤포스텔라로 순례의 여정을 마친 사람들은 “쟈케Jacquets"라는 명예로운 칭호로 불렸다. 하지만 이런 명예로운 칭호를 받는 순례자들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콤포스텔라로의 여정 길은 평균 6개월이었다. 그러기에 순례자들은 봄이나 초여름에 순례를 시작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렇게 서둘러 시작한 순례의 마지막은 겨울의 초입이 되어야만 끝났다.

  순례를 마친 사람들 가운데 열성적인 사람들은 콤포스텔라에서 자신들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소수의 열성자들은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돌배石舟에 실려 왔다고 하는 바닷가까지 자신들의 순례 여행을 연장시켰다. 이들은 이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주워 자신의 바랑이나 지팡이에 매달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순례자는 교회 앞에서 파는 조개껍질이나 납으로 만든 모형을 구입하였다. 이 조개껍질은 순례의 완성을 증명하는 증표이면서 순례자의 호신부가 되었다.11)

  당시 순례는 도보가 원칙이었다. 이들 콤포스텔라 순례자들에게 프랑스와 이베리아 반도의 경계에 위치한 피레네 산맥은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이 산맥에는 예전부터 산적과 추위가 여행자들을 항상 괴롭혔다. 이런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콤포스텔라 순례자들은 무리를 지어 산맥을 넘었고, 피레네 산맥 곳곳에는 무료 숙소와 수도원들이 순례자들을 위해 규칙적인 간격으로 위치해 있었다. 이들 무료 숙소12)와 수도원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종을 울려 순례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콤포스텔라 순례13)의 절정기는 12세기였다. 이 열정의 시대가 지나가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으로 순례의 출발지인 프랑스가 전쟁터로 화함으로서 콤포스텔라 순례의 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16세기에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유럽 전체가 혼란에 휩싸임으로서 순례여행 자체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민중들 사이에서도 성자와 성자의 유해를 숭배하는 성지순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유럽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함으로서 감성적인 종교에서 이성적인 과학의 세기로 접어들게 된다.

 

1)신약성서에는 세 사람의 야고보가 등장한다. 대야고보, 소야고보, 예수의 형제 혹은 사촌으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그들이다. 대야고보는 제베대오와 살로메의 아들이고, 소야고보는 알페오의 아들로 나온다.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를 복음화하기 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은 대야고보이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에스파냐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이 세 명의 야고보는 분리와 융합을 통해 하나의 국가적 원형을 창조하게 된다.
성 야고보의 에스파냐 선교에 관한 것은 쟈크 드 보라진 Jacques de Voragine의 <황금전설La legende doree>을 참조할 것.

2) 국가의 개념이 정립된 것은 근대 이후이다. 그 전에는 국가보다는 자신의 지역에 더 충실하였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자신을 가스코뉴 사람이나 부르고뉴 사람으로 불렀고, 지금의 영국인들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하였다.  

3) 성지순례의 과정을 보고자 한다면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전체서문을 참조할 것. 잉글랜드에 한정된 이야기이지만 성지순례의 준비과정과 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활기차게 묘사한 초서의 글을 통해 중세 성지순례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캔터베리는 잉글랜드 인들의 성지였다. 그러므로 이 성지는 헨리8세의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세계에서는 잊혀 진 장소가 되었다.

4) 콤포스텔라Compostela란 지명의 어원은 9세기 초 은둔수도자 펠라기우스가 꿈에 성야고보의 시신이 뭍힌 장소가 현현하자 이를 찾아 나설 때 별이 안내하였다는데서 유래하였다. ‘별들의 들판campus stellae'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1950년대 말 콤포스텔라 성당을 정밀 조사한 결과 이 성당의 지하가 6세기까지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래서 일군의 학자들은 지하공동묘지를 뜻하는 라틴어 콤포스툼Compostum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라 할 수 있다.

5) 당시 사람들은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을 ‘로미유Roumieux’라고 부르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을 '쟈케Jacquets'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것은 중세 서유럽의 성지 순례가 예루살렘의 공백을 통해 로마와 콤포스텔라로 양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기사 편력자에 대해서는 한길 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을 참고할 것. 특히 1부 <죽음>편을 읽어 볼 것. 당시 중세 유럽의 상속제도와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장자 이외의 상속자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7) 현대의 역사가들은 스페인의 역사에서 재정복Reconquista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에스파냐 역사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압축되고 단순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의 역사적 복합성이 쉽게 무시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까치, <스페인사>, 3장 초기중세시대를 참조할 것.

8) 성 마르땡이 뭍힌 장소는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의 성소였다.

9) 이 시기의 도시 형성에 관해 기본적인 성격을 이해하려면 앙리 피렌느의 <중세 유럽의 도시> 제3장 키비타스와 부르구스를 참조할 것. 도시 형성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10) 쟈크 르 고프, 중세에 살기, 동문선, 2000년, p61

11) 프랑스인들은 은하수를 생쟈크의 길이라고 부른다. 알퐁소 도데의 단편 “별”에도 목동이 주인아가씨 스테파네트에게 은하수를 가리키며 생쟈크의 길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도 생쟈크의 길은 샤를마뉴와 사라센간에 벌어졌던 전쟁과 전설이 혼합되어 있다.

12) Flos Santorum이란 양피지에 기록된 전설에 따르면, 성 야고보의 시신을 실은 배가 갈리시아의 바닷가를 지날 때 한 기사의 결혼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기사가 갑자기 파도가 높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바다가 잠잠해 지고 기사가 살아나왔는데 그의 마구에는 온통 가리비조개가 붙어있었다. 이후 가리비 조개는 순례의 상징이 되었다.

13) 중세에는 병원Hospital과 구호소Hospice란 말은 동의어였다.

14) 콤포스텔라의 순례에 관해서는 쟈크 르 고프의 <중세에 살기> 가운데 콤포스텔라 순례자들의 일상생활을 참조할 것. 그리고 프랑스 어문교육 제15집에 수록된 서울여자대학교 박동찬 교수의 <생쟈크 드 콩포스텔르로의 순례여행에 관하여>도 참조할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6. hides

이 단위는 데인로Danelow 이외의 대부분 지역에서 발견되는 단위로 농민의 땅 소유 단위이면서 과세부과의 단위이다. 이 단어는 고 영어 hid에서 유래된 것으로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땅의 크기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주에서는 120에이커acre를 1hide로 계산한다. 하지만 남서부에서는 40, 48 혹은 60에이커를 1하이드로 계산하기도 한다.


17. sulung


라틴어 솔리누스solinus에 해당한다. 이 용어는 세액부과 단위와 농부의 소유지를 이르는 말로 오직 켄트Kent지역에서만 확인된다. 다른 지역에서 이 용어에 상당하는 말은 쟁기이다. 이 말은 쟁기를 뜻하는 古영어 sulh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용어는 하이드hide나 카루카테carucate가 관습적으로 사용된 지역에서도 두어번 나타나고 있다. 이 단어는 대략 240에이커 정도이다.


18. virgate


라틴어 virgata에서 유래되었다. 이 용어는 데인로지역과 켄트 외곽지역의 대부분 지역에서 과세단위와 농부의 토지소유 단위로 나타나고 있다. 이 단위는 하이드의 1/4로 대략 30에이커에 해당된다.


19. furlong


라틴어 quarentina에서 유래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1. ploughs

쟁기는 맷돌과 함께 중세 초기의 대표적인 동력원이었다. 그런데 유럽의 쟁기는 남부와 북부에서 각각 다른 형태를 사용한다. 남부의 경우 삽을 대형화한 것과 같은 쟁기를 두 마리의 소가 끌게 한다. 이 쟁기는 땅을 깊게 갈이 뒤집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의 건조한 지역에서는 수분의 과잉증발을 막는 효과가 있다. 반면 이런 쟁기는 토지가 습한 북부지역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북부 유럽에서는 남부 유럽에서 사용하는 쟁기보다 더 크고 무거운 대형 쟁기를 사용하였다. 이 쟁기는 크기 때문에 소 여덟 마리가 끌어야만 했다. 그리고 바퀴가 달려 있었다. 이 쟁기의 장점은 토지를 깊게 갈아 뒤집어엎기 때문에 유럽 남부의 쟁기처럼 십자로 쟁기질 할 필요가 없었다. 잉글랜드에 이렇게 대형 쟁기가 들어온 것은 아마도 데인 족의 침입과 거의 같은 시기로 보고 있다. 

둠즈데이북에서는 잉글랜드에는 이 두 개가 다 풍부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둠즈데이북에 따르면 조사 당시 잉글랜드에 대략 8만 조 이상의 쟁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둠즈데이북에 나오는 쟁기는 무거운 쟁기로 이 쟁기 하나에 소 여덟 마리가 배당되었다. 이 기록이 정확한 것이라면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당시 대략 65만 마리의 소가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12. Land for

이 단어는 종종 ploughland나 teamland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ploughland는 경작지를 의미하지만 잉글랜드의 역사에서는 경작지단위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ploughland는 120에이커의 토지를 뜻한다. 이 정도의 토지는 소 여덟 마리가 일 년 걸려 가는 넓이라고 한다.  teamland 역시 한 무리의 소나 말이 경작하는 토지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둠즈데이 북에서 어떤 다른 통계학적인 단어보다 많이 언급되고 있다.

 

13. Hundred

이 단어는 카운티county의 주된 행정구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재정, 군사, 법률 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봉토에 정착한 사람들은 이 단위에 의해 지리적 위치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헌드레드의 판사들은 달마다 중앙에서 만나 정치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둠즈데이 북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종종 기록되어 있다. 


14. vill

둠즈데이 북에서 이 단어는 가장 작은 행정상의 단위이다. 남부의 패리쉬parish-교회의 교구를 기본으로 한 행정단위-나 혹은 북부의 타운쉽township-대교구를 기본으로 한 행정단위-과 동등한 단위이다.


15. acre

이 단어는 밭을 뜻하는 라틴어 ager에서 유래되었다. 일반적으로 하이드의 1/120의 넓이에 해당된다. 이 단어는 둠즈데이 북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이 넓이는 1/40, 48, 60 하이드로 사용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6. league

라틴어 레우카leuca에 해당한다. 레우카는 갈리아 인들이 사용하던 거리 단위로 대략 3.25㎞정도 이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리그는 대략 12펄롱-1펄롱이 대략 201m,1리그는 약2.4㎞-이었다. 하지만 윌트셔Wiltshire에서는 15펄롱-약3.1㎞- 이상의 거리를 의미했고, 월체스터셔Worcestershire에서는 고작 4펄롱-약800m-이었다. 둠즈데이 북에서 이 리그는 가끔 마일mile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1리그를 6펄롱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리그의 단위는 당시에는 통일된 것이 없이 제각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amber

라틴어 암브라ambra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는 물건을 잴 때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용량은 알 수 없다. 둠즈데이북에서는 고작 2번만 나타난다. 이 두 번 모두 소금의 무게를 재는 경우에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염전지역에서 사용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앰버는 호박琥珀을 의미하는 단어와 철자가 같지만 뜻이 다르다. 준보석인 호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앰버는 아라비아어 안바르anbar(이 단어는 용연향龍硯香을 의미한다)에서 유래하였다. 라틴어로 준보석 호박은 수키눔succinum으로 표현한다. 이 단어는 나무의 즙이나 액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단위를 뜻하는 앰버amber은 호박이란 준보석을 뜻하는 단어와 철자는 같지만 연관성은 없다.


8. arpent

이 단어는 프랑스 어에서 온 것으로 둠즈데이북에서는 포도원을 언급할 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둠즈데이북에서 모두 26번 언급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21번이 포도원, 5번은 초지와 삼림지를 설명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모두 윌트셔 지방의 장부에만 나타난다. 당시에 다른 지역에서는 포도원의 측량 단위로 오직 에이커acre만을 사용하였다. 이 단어와 연관된 다른 것은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월트셔는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9. carucate

데인로Danelaw 카운티의 대부분에서 공적인 세금은 카루카테스carucates와 보베이트bovates 안에서 결정되었다.  카루카테스는 라틴어로 쟁기를 뜻하는 카루카caruca에서 보벳트bovate는 소를 뜻하는 라틴어 보스bos에서 왔다. 둠즈데이북에서 일반적으로 쟁기질을 하는 한 무리의 소는 여덟 마리가 한조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카루카테에는 여덟 마리의 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덟 마리의 소가 한 조가 되어 일 년 동안 쟁기질 하는 땅을 플로우랜드ploughland-이 경작지는 대략 120에이커, 1하이드-라고 불렀다.  즉 카루카테carucate, 보벳트bovate, 플로우랜드ploughland, 그리고 쟁기질 하는 한 무리의 소는 경작을 하는데 있어 하나의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0. bovate

카루카테carucate를 참조할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quarter

쿼터는 일반적으로 1/4을 의미하지만, 둠즈데이 북에서는 펄롱furlong으로 사용된다. 펄롱은 1마일의 1/8이다. 1마일mile이 대략 1.609㎞이므로 펄롱은 200m 정도가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쿼터나 펄롱 모두 현재의 10진법 체계에서의 1/4나 1/8이 아니라 모두 60진법 혹은 12진법의 1/4, 1/8이라는 점이다.

펄롱은 고대 영어 풀랑furlang에서 유래되었는데 풀랑은 밭고랑의 길이를 뜻한다. 이 플랑의 길이는 대략 농부가 쟁기로 한번 밀고 가서 되돌아오는 거리의 반(약 201.17m)에 해당된다. 


2. rod

라틴어 비르가virga에 해당된다. 로드는 라틴어 비르가타virgata-영어로는 버게이트virgate-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록에서는 보통 ‘v’ 혹은 ‘virg’로 표시된다. Virga나 Virgata는 어근의 의미가 같다. Virga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권위의 표시로 가지고 다니던 버드나무 다발로 묶은 막대기-fasces-를 의미한다.

로드는 1에이커-대략 4046.8㎡-의 1/4-약 1011.70㎡-을 의미하고, 버게이트는 하이드hide-60에서 120acre-의 1/4-15에서 30acre-을 뜻한다.

로드는 길이의 단위일 때는 5.5야드(약 5.03m)이고, 면적의 단위일 때는 버게이트virgate(1/4 하이드hide약15에서 30acre)라고 부른다. 1acre는 대략 가로와 세로가 64m가량 된다.


3. sester

라틴어 섹스타리움sextarium에서 온 말이다. 섹스타리움은 1/6을 의미한다. 이 단위가 용량으로 사용될 때는 1/6 콘지우스congius(약 3.25ℓ)이고, 곡식 들이로 사용될 때는 모디우스modius(약 7ℓ)의 1/16 이다.

이 도량 단위는 변화가 심해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에서 왕실과 전국의 표준량으로 인용되기 시작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스테르는 둠즈데이북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용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세스테르에는 큰 세스테르와 작은 세스테르가 있었다. 이 세스테르 단위를 사용하는 것으로는 보리, 밀가루, 꿀, 귀리, 라이, 소금, 밀과 포도주 등이 있다.

세스테르는 1/6 콘지우스일 때는 541그램 정도 이고, 1/16 모디우스일 때는 437그램이다.


4. stick

고대 영어 stician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찌르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위는 일반적으로 영주에게 뱀장어를 바칠 때 사용하였다. 25마리의 뱀장어가 1스틱이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두름’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계산으로 한 두름은 열 마리씩 엮어서 두 줄이 된다.

장어는 중세 민물 생선 가운데 귀족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장어는 비타민 A가 풍부하여 보양식품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장어를 과식하여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인기 있던 식품이었다.


5. hoccus

이 단어의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둠즈데이 북에서는 이 단어를 제염소製鹽所와 연관 지어 사용하고 있다.

잉글랜드의 염전鹽田은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동부의 기후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기후를 보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습기 많은 기후와 구별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에서 동부의 이스트 앙글리아East Anglia지역에 염전이 많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