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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재미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절대 고독이 넘치는 사하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거칠고 정말로 원초적 인간적 역동성이 넘치는 투아레그 족을 위해 온 몸을 헌신하였다. 그가 이 거친 사하라에서 투아레그 족을  위해 헌신한 기간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가 이 황량한 곳에 머문 기간은 6년 혹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어느 누구도 그의 가르침에 감며을 받아 그가 믿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개종시키려 했던 투아레그 족 반도의 손에 살해되었다.

정말로 그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을 5년 혹은 6년 동안 거친 광야에서 살았던 것일까? 하지만 투아레그 족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사막에서 친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환대의 정신이 가득찬 그에게 투아레그 족은 특별히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들과 똑같은 사막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동료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의 손에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사막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거친 사막에서 환대 이외의 수식어가 필요할까?

아세크렘, 사하라의 어느 고적한 곳, 지리적 장소....

홀로 있으면서 공동체를 인류를 생각할 수 있을까? 왜 위대한 거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홀로 광야에서 혹은 골방에서 기도하고 물레를 돌렸을까? 그 무섭도록 거대한 공간 속에서 무엇을 느낀 것일까? 그들은 그 공간에 자신의 입김을 채워 넣으려 했을까?  절대로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느끼지 못한 이웃 혹은 타인의 숨결을 그 무섭도록 거대한 공간에 채우려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광야는 위대한 우주의 자궁이며 사색의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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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하다... 어느 자매가 있었다. 하나는 몽상적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적이었다. 몽상적인 아이는 조신하고 뭐가 있는듯이 보였고, 활동적인 아이는 좀 껄끄러운 아이였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이 둘은 크면서 아니 죽을 때까지 경쟁적인 관계였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를 그나마 냉각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매라는 혈연적인 것 밖에 없었다. 이 둘은 컸고, 자랐고, 여인이 되었다. 언니는 마르타였고 동생은 마리아였다.

그리고 그들의 오빠가 죽었다. 이 자매는 소문으로 들어왔던 나자렛 사람을 불렀다. 서른이 조금 넘은 나자렛 사람이 왔을 때 마리아는 집안에 있었고 마르타는 나자렛 사람을 마중 나갔다. 마르타는 '당신이 조금만 더 일찍 왔었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당신께서 구하시기만 한다면 하느님이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수염이 더부룩한 나자렛사람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두 자매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자로라는 오빠와 살았지만 그 역시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두 여동생을 남겨두고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몸이 허약하여 두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르타의 간절한 부탁으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뒤에는 그는 무엇을 하였을까? 나자로는 현재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 십자가에 처형된 뒤에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다음 그에 대한 증언을 하며 마지막 삶을 불태우지 않았을까...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충족하고자 했을 때 나자로라는 사람은 아주 유용한 선전 매체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좀비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이런 오빠와 살고 있떤 마르타와 마리아는 아마도 내외적으로 무척 고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극적인 마리아는 마르타에게 어떤 힘이 되어 주었을까? 성서의 문맥상으로 볼 때 마리아는 마르타에게 아주 얄미운 인상을 심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자매의 오빠인 나자로가 죽기전에 나자렛 사람이 이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마르타는 부엌에서 이 예언자를 위해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었지만 동생인 마리아는 그 예언자 발치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예언자도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마리아가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마르타의 감정이 폭발한다. "선생님 동생인 마리아에게 바쁜 제 일을 좀 돕게 해주세요. 재는 그림처럼 앉아 있어 아주 얄미워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때 예언자는 마르타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말을 한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빵을 얻기 위한 노동과 진리를 얻기 위한 명상의 가치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선의 무게와 죄악의 무게는 어떻게 다른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 부조화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교회는 마르타는 교회의 외적활동을 표현하는 것이고 마리아는 내적 영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교의의 가르침과 삶의 경험이 마주칠 때 우리는 갈등이 아니라 포기를 해 버린다. 갈등은 이상적이지만 포기는 현실적인 것이다. 이 부조화가 바로 현실과 종교의 간극인지도 모른다.

                                   중세력으로 말하면 마르타 축일(7월29일)에 쏟아낸 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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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yosae 2008-08-0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정말 그리운 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인도를 이해하려면 그 넓은 땅덩어리와 신분제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보이는 인도 亞大陸은 대륙이라기에는 약간 좁고, 하나의 국가라기에는 너무 넓어 지리학지들은 대륙에 버금간다하여 아대륙이라 이름 붙였다. 그래서일까? 동쪽의 뱅골만에 사이클론이 불어닥치는 그 순간에도 서쪽의 아라비아해에서는 뜨거운 열풍이 인도 아대륙을 습격한다. 태풍과 한발이 동시에 존재하는 대륙이 바로 인도인 것이다. 게다가 데칸고원을 중심으로 북쪽은 아리아계 인종이 남쪽은 드라비다계 인종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 삶의 방식은 얼굴의 생김새 처럼 이질적이다.

이런 동시성과 다양성이 존재하는 대륙에 신분제도-카스트-가 존재한다. 이 신분제도는 땅덩어리의 다양성과 동시성을 고정시키는 쐐기 역할을 한다. 오래 전 고다마 싯달타가 이 사성제도를 부정하는 종교를 설파했지만 계급세력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좌절하고 말았다. 인도의 불교는 12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대륙에서 소멸되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변형한 불교가 12세기까지 뱅골과 비하르에 존속하였지만 이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불교의 소멸은 종교의 생성,성장,소멸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브라만교에 대한 개혁으로 시작된 불교는 그 참신성과 진보성에 의해 고무되었지만 결국 자신들이 배격했던 브라만교 의식에 굴복하고 말았다. 브라만교는 불교의 도전에 직면하자 자신들의 종교에서 소외되었던 여성과 수드라 계급에 대한 교리를 수정하였다. 이에 반해 자신들의 일시적 승리에 도취된 불교는 대중과 함께하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세계로 침잠하였다. 이들은 대중의 언어인 팔리어를 버리고 귀족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면서 백성의 삶에서 빠르게 이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였던 브라만의 악습에 물들어 결국은 인도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렇게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졌지만 인도 아대륙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물질 생활에서 비롯된 사회악을 완화시키고자한 부족사회의 특징인 원시공산주의로의 복귀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함께 불교는 소외계층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브라만 사회의 계급주의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설파함으로서 인도 사회의 한 특징이 된 소 숭배 사상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 1949년 새로운 공화국으로 출범한 뒤 국세조사를 실시하였을 때 불교도는 18만명에 불과하였다. 인도의 인구에 비하면 그 숫자는 거의 무시해도 될 미미한 것이었다. 이런 불교가 1960년대 초 325만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당시 인구의 1퍼센트에 근접한 숫자였다. 이렇게 인도의 불교 신자 수가 급증한 데는 불가촉 천민 출신의 사회개혁가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된지 8백년이 흐른 뒤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교로 양분된 인도 사회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8백년전에 사라진 불교는 20세기에 다시 그 오래 전 자신들이 잊고 있던 고다마 싯탈타-부처-의 온전한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정신을 20세기에 인도의 사성제도 속에서 외쳤던 것이다. 이 불교의 평등사상은 불가촉 천민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에게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인도를 떠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라만과 이슬람은 인도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인도를 분열시키지 않으면서 자유.평등.우애에 뿌리를 둔 인도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 슬로건에 합당한 종교는 사성제를 주장하는 브라만교나 알라만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이슬람이 아니라 바로 상생의 종교인 불교라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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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스트 푸어만 교수는 즁세 유럽 역사가로 특이하게도 假-이시도루스 법령집 전문가이다. 假-이시도루스 법령집 이란 무엇인가? 이 법령집은 7백여쪽에 걸친 책으로 교황의 교령, 시노드의 결의사항, 프랑크왕국의 제국법, 그리고 중세 이후 가장 큰 논란을 야기한 <콘스탄티누스 증여>를 수록하고 있는 법령집이다. 여기에는 초기 로마 주교의 문서가 115개가 들어있는데 이 문서들은 거의다 프랑크 왕국에서 날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125개의 문서는 정본의 문서를 후대에 혹은 나중에 변조하거나 위조한 내용을 끼워넣은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위조 법령집이 전문적인 성직자 위조꾼들에 의해 프랑크 왕국 중심지역인 라임즈에서 위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문서가 나오게 된 이유는 이제까지 행사되었던 교회에 대한 왕의 간섭을 제거하고 교회의 독자성-혹은 교황의 절대적 권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가짜 법령집은 이후 교회와 교황권의 세력강화와 확장을 위해 이용되었다. 그럼에도 호르스트 푸어만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중세의 초대>에서 이 책의 위조와 관련된 두 가지 물음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첫번째는 "중세 때엔느 윤리가 결여되어 있었던가?" 푸어만 교수는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의 대답에 따르면 당시 어떤 법령을 유효하고 정당하게 만드는 것은 입법이란 외적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 안에 담겨있는 正義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푸어만 교수는 법령집을 위조한 위조자들이 하늘나라를 위해 봉사했고, 자신들이 주관적으로 생각한 구원질서에 봉사했다고 본 것이다. 푸어만의 이런 변명은 하늘나라에 봉사한다면 도덕적으로 아무 꺼리낌없이 이런 위조문서를 만들어도 되는가하는 의문을 갖게한다. 그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혹은 교회를 위해 하는 거짓말은 진리가 되는가? 아니면 공익적이고 하느님 뜻에 맞갖은 일을 위한 모든 위조는 수단을 정당화하는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인정받은 위조문서들이 야기한 치명적인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 호르스트 푸어만은 중세의 초대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의 학문적 영역 밖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假-이시도루스 법령집이 교회에 끼친 몹쓸 영향은 무엇일까? 교회사가 셉펠트는 교회의 법과 제도에 있어서 진화적 사고의 부정교회의 자기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1983년에 개정된 가톨릭의 교회법전에서 교황의 권한에 관한 중요한 법규의 전거로 옛 법전에서 6개의 전거를 제시했는데 3개는 假-이시도루스 법령집에서 나머지 3개는 그 법령집에서 파생된 것에서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호르스트 푸어만의 <중세의 초대>를 읽으면서 중세가 암흑이 아니었다는 점에 중심을 두며 읽다보니  세상은 속아넘어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속어넘어간다라는 냉소적인 진리를 보지 못한 것은 책을 읽는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게 하는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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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프랑스사를 읽다보면 항상은 아니더라도 귀에 익은 두 사람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존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은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1337~?1400), 다른 한 사람은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 (1431-1463)이다. 이 두 사람은 삶의 궤적을 보면 이 말이 더 한층 실감난다. 프루아사르가 백년전쟁이 시작되는 1337년에 태어난 반면 비용은 백년전쟁이 끝난 뒤(1453년)에도 십 여 년을 더 살았다. 프루아사르는 116년 동안 지속된 백년전쟁 가운데 그는 63년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은 온통 전쟁과 그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연대기Chronicles>는 백년전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의 숭고함과 잔인함 그리고 야비함과 거룩함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아쉽게도 그의 연대기는 국내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영어 번역본은 인터넷 상에서 쉽게 구해 읽어볼 수 있다. 프루아사르에게 있어서 전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 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를 이해하려면 ‘칼레의 이야기’를 살펴봐야 한다. 이 역사적 기록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3세에게 포위된 칼레가 주민학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시의 대표 6명이 삭발을 하고 밧줄을 목에 건채 에드워드 3세 앞으로 나와 항복의 치욕을 겪으며 칼레를 구원한 이야기이다. 마치 성서 속의 ‘한 사람이 죽어 전체를 살릴 수만 있다면...’이라는 대목이 생각나는 이야기이다. 프루아사르는 이 이야기의 정점에 프랑스라는 국가를 올려놓지는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단일한 민족국가도 위대한 프랑스도 아닌 카페왕가의 왕국이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잔 다르크의 이야기와 함께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카페 왕가의 프랑스를 그리고 잡다한 지역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런 과정의 신화화는 조르쥐 뒤비의 <부빈의 일요일>에서도 취급하고 있지만 당시의 프루아사르는 이런 신화화를 상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당시의 기사도 정신과 그 맥락에 따른 하나의 삽화였을지도 모른다. 이는 프루아사르가 전쟁의 한 가운데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중세의 기사도적 사회질서를 신봉하고 믿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반면 비용은 전쟁의 살벌함이 가시지 않은 1431년에 태어났다. 전쟁의 막바지에 다다랐지만 프랑스의 카페왕가는 여전히 잉글랜드의 플란타지넷트가에 고전하고 있었고, 페스트의 창궐, 농촌지역의 황폐는 전쟁이 결코 낭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전쟁의 소모적인 낭비성 잔혹은 어린 비용의 뇌리에 공포의 이미지를 커다랗게 각인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전쟁은 기사도적인 유희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의 존재를 가늠하는 생존게임으로 비춰졌다. 비용이 공부하던 파리의 분위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포장이 있어야 함을 자각했고, 그 결과 그는 파리 대학에서 문학사 자격을 획득하고 당시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성직에 몸담아 일생을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세속의 찌든 때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비용은 악동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의 분방함과 모험과 방랑기질, 범죄적인 성향과 회한과 속죄, 연민과 공포와 종교적인 갈등, 그리고 삶에 대한 환상은 그를 중세에 살고 있지만 근대의 탐미주의적 인물을 보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즉 비용은 중세 속에서 근대성을 이끌어낸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세의 시대를 연이어 살다간 프루아사르와 비용은 평가의 호오好惡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재발견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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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2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hyosae 2007-08-03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elard는 1079년에 태어나 1142년에 죽었으니 이들보나 한참 전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아벨라르의 이름마저도 잊혀졌는지 모르죠... 비용의 시 귀절처럼 '그대 지금 어디에 있느뇨...'이지만 아벨라르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가 있었다는 것이 비극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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