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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루뭄바를 죽였는가 - 콩고민주공화국 초대 총리 살해와 그 배후
에마뉘엘 제라르.브루스 쿠클릭 지음, 이인숙 옮김 / 삼천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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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메르카토르Mercator 투시도법에 의한 지도를 보면 아프리카Africa는 아주 왜소하게 보인다. 총면적 30,221,532㎢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을 합친 크기와 맞먹으며 남아메리카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이다. 그럼에도 평면의 지도 위에서는 아프리카는 왜소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아프리카는 넓이를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지리 또한 왜곡되어 있다. 아프리카는 결코 암흑대륙이 아니다. 이 널따란 대륙은 사막-북쪽의 사하라 사막, 남쪽의 칼라하리 사막-과 거대한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바나라고 불리는 널따란 초원은 사막을 경계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암흑이라고 부른 이유는 적도赤道 바로 아래에 펼쳐져있는 광대한 밀림 때문이다. 이른바 콩고 분지盆地-앙골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카메룬, 콩고민주주의 공화국, 콩고 공화국, 부룬디와 르완다, 가봉, 적도기니-로 불리는 콩고 강 유역의 지역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이 분지는 3,700,000㎢에 달하며 습도가 높고 어두운 밀림이 이어져 있다. 단일한 지리적 특징을 가진 지역이 아메리카 본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면적을 유럽의 지도에 일치시키면 스페인Spain, 프랑스France, 독일Germany, 스웨덴Sweden 그리고 노르웨이Norway에 필적하는 넓이이다. 콩고민주주의 공화국은 벨기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킨샤사 콩고Kinshasa Congo를 말한다. 콩고 공화국은 콩고 강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이 나라는 프랑스인 브라자가 개척하여 브라자빌 콩고Brazzaville Congo라고 불렸다.
콩고는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로부터 갑작스럽게 독립하였다. 식민 종주국이었던 벨기에는 195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아프리카의 자치요구에 과민반응을 일으켰다. 실제로 1959년 레오폴드빌에서 콩고인들이 자치요구를 시위를 일으키자 벨기에는 유혈 진압으로 응수하였다. 이때만 해도 벨기에는 콩고가 독립을 하기는 하겠지만 그 시기는 수 십 년 후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대비하여 벨기에는 소수의 콩고인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를 30년 계획The thirty year plan이라 부른다. 하지만 독립의 요구가 거세지자 벨기에는 이듬해 콩고를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 거대한 나라에 대학을 졸업한 원주민은 30명이 채 안되었다. 게다가 콩고 현지출신의 흑인장교, 엔지니어, 의사 등은 전무하였다. 콩고를 사실상 통치하였던 5,000명의 관리들 가운데 흑인은 단지 3명뿐이었다.
벨기에의 보두엥Baudouin 국왕은 콩고가 독립하는 날 레오폴드빌Leopoldville 에 도착하여 “여러분, 우리의 신뢰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는 이제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라고 거만하게 말하였다. 이에 대해 파트리스 루뭄바는 즉각 반발하였다. 이 용감한 아프리카 인은 벨기에의 식민정책 나아가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이 아프리카에 끼친 해독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그는 한 달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루뭄바는 아프리카의 진정한 해방은 정치적 독립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식민지 상태에서의 독립이 병행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루뭄바의 이런 견해는 당시 콩고에 투자한 벨기에, 영국, 미국의 기업들의 경계심을 자극하였다. 루뭄바의 이런 주장은 콩고를 넘어 아프리카 대륙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루뭄바의 이런 정책은 서구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이 결과 루뭄바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루뭄바의 이런 결정은 자신의 사형집행장에 스스로 서명한 꼴이 되고 말았다.
콩고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는데 큰 힘을 발휘한 인물이 세 명 있다. 콩고 강 하류의 콩고인 연맹-ABACO;Alliance des Bakongo-과 연계한 가장 큰 세력의 요셉 카사부부Joseph Kasa-Vubu, 콩고에서 자원이 가장 풍부한 카탕카Katanga 주를 배경으로 한 모이세 촘베Moïse Kapenda Tshombe, 그리고 이들 셋 가운데 가장 지지 배경이 미약한 테텔라Tetela족 출신인 파트리스 루뭄바가 그들이다. 콩고가 독립하면서 카사부부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상으로 파트리스 루뭄바가 취임한 것은 운명이었다. 내심 수상 자리를 원하고 있던 촘베는 이에 대한 반발로 카탕카 주의 독립을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이 세 사람은 벨기에와 투쟁할 때는 협력하였지만 독립하면서 노선차이로 갈라서게 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카사부부는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인물이었고 루뭄바는 우체국 직원으로 시작하여 노조운동을 통해 단련된 자유주의자였다. 반면 부유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한 촘베는 반공주의자이며 기독교도였다. 카탕카 주는 캘리포니아 주보다 넓고 벨기에의 16배나 된다. 이곳에서는 코발트, 구리, 주석, 라듐, 우라늄, 다이아몬드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촘베가 1960년 7월 11일 카탕카 주의 독립을 선언하자 벨기에와 서방은 이를 지지하였다. 게다가 벨기에는 자국민의 보호를 이유로 카탕카 주에 자국군自國軍 6,000명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루뭄바는 소련으로 경도傾倒될 수밖에 없었다.
결쿡 콩고는 독립한지 2주도 지나지 않아 내전상태로 돌입한 것이었다. 콩고는 레오폴드빌의 합법정부-카사부부-와 스텐리빌Stanleyville을 중심으로 한 경쟁파-루뭄바- 그리고 카탕카 주의 분리독립파-촘베-로 분열되었다.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그리고 각 파에서 고용한 용병傭兵들이 얼키고 설켜 콩고내전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출발한 루뭄바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사실 미국은 콩고가 독립하기 전부터 루뭄바의 존재를 불편해 하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루뭄바는 ‘공산주의자’인지 아니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산주의자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분명한 것은 콩고에서 반서방反西方세력이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루뭄바는 당시 유엔사무총장이었던 다그 함마슐드Dag Hammarskjöld와 콩고사태를 논의하기위해 1960년 7월 24일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서도 콩고 위기에 대한 합의점이 도출되지 못하였다. 미국은 콩고 사태가 장기화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 보았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될수록 콩고에서 소련의 입김이 점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8월 콩고주재 미중앙정보국 지부에서 ‘콩고가 공산주의자의 전형적인 권력탈취를 경험해가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는 전문을 본국으로 타전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콩고가 제2의 쿠바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루뭄바를 제거하고 친서방 인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1960년 9월 5일 콩고 대통령 카사부부가 수상 루뭄바를 해임하였다. 루뭄바는 콩고의회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카사부부가 해임한 것은 정치적인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보수주의자인 카사부부는 국가주의적이며 진보적인 루뭄바의 정책과 충돌하면서 중앙정부의 기능이 마비된데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루뭄바는 이에 반발하여 의회의 도움을 받아 카사부부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하는 결의를 하였다. 양측의 대립은 콩고의 군 실권자 조셉 모부투Joseph Mobutu가 카사부부와 모종의 협약을 맺고 쿠데타를 일으켜 루뭄바를 체포하면서 해소되었다.
루뭄바는 모부투가 쿠데타가 일으키자 즉시 유엔평화유지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유엔의 개입으로 루뭄바의 신변은 잠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루뭄바가 카사부부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였음에도 미국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특히 콩고의회가 개원되는 것을 강력히 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의회가 루뭄바를 다시 권력의 정상에 복귀시킬 결정을 할 수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루뭄바가 그의 권력기반을 절반쯤 상실한 것으로 보이면서도 그때마다 제자리로 복귀하는 것은 그의 재능과 행동력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바꿔 말하면 루뭄바는 한계에 다달았다고 보여도 그때마다 사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루뭄바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있다.
9월의 쿠데타 이후 루뭄바는 줄곧 유엔의 보호 하에 있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그를 잠재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외부세력-소련-이 콩고에 개입하여 루뭄바를 다시 복귀시키는 것이 아닌지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종결하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부는 루뭄바가 유엔의 보호 하에 있을 때 암살을 시도하려 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미국의 이런 생각은 ‘현재 우리가 지지할 수 있는 것은 루뭄바를 행동불능으로 하던지 아니면 체포하는 것 뿐이다. 보다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할 때라도 또는 어떤 행동을 취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콩고인들의 손으로 처리되어야만 한다’는 미중앙정보국 콩고지부의 전문에서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루뭄바를 제거하고 싶지만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루뭄바는 수상관저에서 영어囹圄의 몸이었지만 유엔군은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관저주변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쿠데타 군 역시 루뭄바가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관저 주변에 배치되었다. 1960년 11월 27일 루뭄바는 유엔군의 보호를 이탈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이 있는 스텐리빌로 탈출하려다 모부투의 군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상황은 카사부부와 모부투의 중앙정부는 레오폴드빌에 근거를 두고 레오폴드빌Leopoldville 주와 에콰토르Equateur 주에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뭄바의 지지자들은 오리엔탈Orientale 주와 키부Kivu 주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카탕카 주는 여전히 촘베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루뭄바 체포 소식이 전해지면서 콩고 사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해가 바뀐 1961년 1월 서방과 레오폴드빌의 카사부부와 모부투에게 불길한 소문이 들려왔다. 콩고 치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군과 경찰이 대대적인 급료인상을 실현해주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 반란은 루뭄바의 복귀를 결정지을 중요한 변수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61년 1월 14일 미국정부는 콩고의 유력한 정부관리 한 사람으로부터 루뭄바를 촘베가 정권을 잡고 있는 카탕카 주로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부투에게 체포된 이래 루뭄바는 레오폴드빌에서 150㎞떨어진 사이스빌Thysville의 캠프 아디Camp Hardy의 군막사에 연금된 상태였다. 1961년 1월 17일 루뭄바는 강제로 그의 협력자인 모리스 므폴로Maurice Mpolo와 죠셉 오키토Joseph Okito와 함께 비행기에 태워져 카탕카 주의 바꾸왕가로 이송되었다. 루뭄바의 철천지 원수인 촘베의 카탕카 주로 이송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서방은 이 사실에 모두 침묵하였다. 루뭄바를 태운 사베너 DC-4 수송기가 바꾸왕가로 향했지만 공항에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알게되자 경로를 바꿔 엘리자베스빌Elisabethville-후일 루뭄바시Lubumbashi로 개명됨-로 향하였다. 1961년 2월 13일 카탕카 주 정부는 2월 12일 루뭄바와 동료 두 사람이 탈출했지만 적대감을 품은 촌민村民들의 손에 잡혀 살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유엔은 루뭄바와 동료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빌에 도착한 1월 17일 21:40에서 21:43사이에 살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와 동료의 시신은 비밀리에 버려져 지금도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루뭄바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가 약속한 희망을 충실하게 전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미국과 서방은 루뭄바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허용하지도 않았다. 루뭄바의 비극은 어쩌면 냉전의 비극적 산물인지도 모른다.
콩고 사태의 최종적인 승리자는 카사부부도 촘베도 아닌 모부투였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그는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동안 독재자의 자리를 지켰다. 모부투가 한 일은 1971년에 콩고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이레Zaire로 바꾼 것 이외에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는 풍부한 자원의 나라 콩고를 피폐시키고 비참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흑단 지팡이와 표범 가죽 모자를 쓴 그의 모습은 신식민주의의 하수인의 표본이었다.
1961년 루뭄바가 살해되고 1965년 모부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기까지 5년 동안 콩고는 열강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용병들이 이 광대한 대륙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콩고의 혈관을 절개했던 것이다. 루뭄바 살해 이후 소련은 그의 죽음을 기려 모스크바에 그의 이름 딴 루뭄바 대학을 만들어 제3세계 혁명가들을 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