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루뭄바를 죽였는가 - 콩고민주공화국 초대 총리 살해와 그 배후
에마뉘엘 제라르.브루스 쿠클릭 지음, 이인숙 옮김 / 삼천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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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메르카토르Mercator 투시도법에 의한 지도를 보면 아프리카Africa는 아주 왜소하게 보인다. 총면적 30,221,532㎢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을 합친 크기와 맞먹으며 남아메리카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이다. 그럼에도 평면의 지도 위에서는 아프리카는 왜소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아프리카는 넓이를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지리 또한 왜곡되어 있다. 아프리카는 결코 암흑대륙이 아니다. 이 널따란 대륙은 사막-북쪽의 사하라 사막, 남쪽의 칼라하리 사막-과 거대한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바나라고 불리는 널따란 초원은 사막을 경계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암흑이라고 부른 이유는 적도赤道 바로 아래에 펼쳐져있는 광대한 밀림 때문이다. 이른바 콩고 분지盆地-앙골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카메룬, 콩고민주주의 공화국, 콩고 공화국, 부룬디와 르완다, 가봉, 적도기니-로 불리는 콩고 강 유역의 지역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이 분지는 3,700,000㎢에 달하며 습도가 높고 어두운 밀림이 이어져 있다. 단일한 지리적 특징을 가진 지역이 아메리카 본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면적을 유럽의 지도에 일치시키면 스페인Spain, 프랑스France, 독일Germany, 스웨덴Sweden 그리고 노르웨이Norway에 필적하는 넓이이다. 콩고민주주의 공화국은 벨기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킨샤사 콩고Kinshasa Congo를 말한다. 콩고 공화국은 콩고 강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이 나라는 프랑스인 브라자가 개척하여 브라자빌 콩고Brazzaville Congo라고 불렸다.

 

콩고는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로부터 갑작스럽게 독립하였다. 식민 종주국이었던 벨기에는 195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아프리카의 자치요구에 과민반응을 일으켰다. 실제로 1959년 레오폴드빌에서 콩고인들이 자치요구를 시위를 일으키자 벨기에는 유혈 진압으로 응수하였다. 이때만 해도 벨기에는 콩고가 독립을 하기는 하겠지만 그 시기는 수 십 년 후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대비하여 벨기에는 소수의 콩고인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를 30년 계획The thirty year plan이라 부른다. 하지만 독립의 요구가 거세지자 벨기에는 이듬해 콩고를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 거대한 나라에 대학을 졸업한 원주민은 30명이 채 안되었다. 게다가 콩고 현지출신의 흑인장교, 엔지니어, 의사 등은 전무하였다. 콩고를 사실상 통치하였던 5,000명의 관리들 가운데 흑인은 단지 3명뿐이었다.

벨기에의 보두엥Baudouin 국왕은 콩고가 독립하는 날 레오폴드빌Leopoldville 에 도착하여 “여러분, 우리의 신뢰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는 이제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라고 거만하게 말하였다. 이에 대해 파트리스 루뭄바는 즉각 반발하였다. 이 용감한 아프리카 인은 벨기에의 식민정책 나아가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이 아프리카에 끼친 해독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그는 한 달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루뭄바는 아프리카의 진정한 해방은 정치적 독립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식민지 상태에서의 독립이 병행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루뭄바의 이런 견해는 당시 콩고에 투자한 벨기에, 영국, 미국의 기업들의 경계심을 자극하였다. 루뭄바의 이런 주장은 콩고를 넘어 아프리카 대륙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루뭄바의 이런 정책은 서구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이 결과 루뭄바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루뭄바의 이런 결정은 자신의 사형집행장에 스스로 서명한 꼴이 되고 말았다.

콩고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는데 큰 힘을 발휘한 인물이 세 명 있다. 콩고 강 하류의 콩고인 연맹-ABACO;Alliance des Bakongo-과 연계한 가장 큰 세력의 요셉 카사부부Joseph Kasa-Vubu, 콩고에서 자원이 가장 풍부한 카탕카Katanga 주를 배경으로 한 모이세 촘베Moïse Kapenda Tshombe, 그리고 이들 셋 가운데 가장 지지 배경이 미약한 테텔라Tetela족 출신인 파트리스 루뭄바가 그들이다. 콩고가 독립하면서 카사부부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상으로 파트리스 루뭄바가 취임한 것은 운명이었다. 내심 수상 자리를 원하고 있던 촘베는 이에 대한 반발로 카탕카 주의 독립을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이 세 사람은 벨기에와 투쟁할 때는 협력하였지만 독립하면서 노선차이로 갈라서게 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카사부부는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인물이었고 루뭄바는 우체국 직원으로 시작하여 노조운동을 통해 단련된 자유주의자였다. 반면 부유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한 촘베는 반공주의자이며 기독교도였다. 카탕카 주는 캘리포니아 주보다 넓고 벨기에의 16배나 된다. 이곳에서는 코발트, 구리, 주석, 라듐, 우라늄, 다이아몬드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촘베가 1960년 7월 11일 카탕카 주의 독립을 선언하자 벨기에와 서방은 이를 지지하였다. 게다가 벨기에는 자국민의 보호를 이유로 카탕카 주에 자국군自國軍 6,000명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루뭄바는 소련으로 경도傾倒될 수밖에 없었다.

결쿡 콩고는 독립한지 2주도 지나지 않아 내전상태로 돌입한 것이었다. 콩고는 레오폴드빌의 합법정부-카사부부-와 스텐리빌Stanleyville을 중심으로 한 경쟁파-루뭄바- 그리고 카탕카 주의 분리독립파-촘베-로 분열되었다.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그리고 각 파에서 고용한 용병傭兵들이 얼키고 설켜 콩고내전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출발한 루뭄바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사실 미국은 콩고가 독립하기 전부터 루뭄바의 존재를 불편해 하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루뭄바는 ‘공산주의자’인지 아니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산주의자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분명한 것은 콩고에서 반서방反西方세력이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루뭄바는 당시 유엔사무총장이었던 다그 함마슐드Dag Hammarskjöld와 콩고사태를 논의하기위해 1960년 7월 24일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서도 콩고 위기에 대한 합의점이 도출되지 못하였다. 미국은 콩고 사태가 장기화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 보았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될수록 콩고에서 소련의 입김이 점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8월 콩고주재 미중앙정보국 지부에서 ‘콩고가 공산주의자의 전형적인 권력탈취를 경험해가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는 전문을 본국으로 타전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콩고가 제2의 쿠바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루뭄바를 제거하고 친서방 인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1960년 9월 5일 콩고 대통령 카사부부가 수상 루뭄바를 해임하였다. 루뭄바는 콩고의회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카사부부가 해임한 것은 정치적인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보수주의자인 카사부부는 국가주의적이며 진보적인 루뭄바의 정책과 충돌하면서 중앙정부의 기능이 마비된데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루뭄바는 이에 반발하여 의회의 도움을 받아 카사부부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하는 결의를 하였다. 양측의 대립은 콩고의 군 실권자 조셉 모부투Joseph Mobutu가 카사부부와 모종의 협약을 맺고 쿠데타를 일으켜 루뭄바를 체포하면서 해소되었다.

루뭄바는 모부투가 쿠데타가 일으키자 즉시 유엔평화유지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유엔의 개입으로 루뭄바의 신변은 잠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루뭄바가 카사부부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였음에도 미국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특히 콩고의회가 개원되는 것을 강력히 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의회가 루뭄바를 다시 권력의 정상에 복귀시킬 결정을 할 수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루뭄바가 그의 권력기반을 절반쯤 상실한 것으로 보이면서도 그때마다 제자리로 복귀하는 것은 그의 재능과 행동력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바꿔 말하면 루뭄바는 한계에 다달았다고 보여도 그때마다 사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루뭄바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있다.

9월의 쿠데타 이후 루뭄바는 줄곧 유엔의 보호 하에 있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그를 잠재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외부세력-소련-이 콩고에 개입하여 루뭄바를 다시 복귀시키는 것이 아닌지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종결하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부는 루뭄바가 유엔의 보호 하에 있을 때 암살을 시도하려 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미국의 이런 생각은 ‘현재 우리가 지지할 수 있는 것은 루뭄바를 행동불능으로 하던지 아니면 체포하는 것 뿐이다. 보다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할 때라도 또는 어떤 행동을 취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콩고인들의 손으로 처리되어야만 한다’는 미중앙정보국 콩고지부의 전문에서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루뭄바를 제거하고 싶지만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루뭄바는 수상관저에서 영어囹圄의 몸이었지만 유엔군은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관저주변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쿠데타 군 역시 루뭄바가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관저 주변에 배치되었다. 1960년 11월 27일 루뭄바는 유엔군의 보호를 이탈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이 있는 스텐리빌로 탈출하려다 모부투의 군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상황은 카사부부와 모부투의 중앙정부는 레오폴드빌에 근거를 두고 레오폴드빌Leopoldville 주와 에콰토르Equateur 주에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뭄바의 지지자들은 오리엔탈Orientale 주와 키부Kivu 주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카탕카 주는 여전히 촘베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루뭄바 체포 소식이 전해지면서 콩고 사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해가 바뀐 1961년 1월 서방과 레오폴드빌의 카사부부와 모부투에게 불길한 소문이 들려왔다. 콩고 치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군과 경찰이 대대적인 급료인상을 실현해주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 반란은 루뭄바의 복귀를 결정지을 중요한 변수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61년 1월 14일 미국정부는 콩고의 유력한 정부관리 한 사람으로부터 루뭄바를 촘베가 정권을 잡고 있는 카탕카 주로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부투에게 체포된 이래 루뭄바는 레오폴드빌에서 150㎞떨어진 사이스빌Thysville의 캠프 아디Camp Hardy의 군막사에 연금된 상태였다. 1961년 1월 17일 루뭄바는 강제로 그의 협력자인 모리스 므폴로Maurice Mpolo와 죠셉 오키토Joseph Okito와 함께 비행기에 태워져 카탕카 주의 바꾸왕가로 이송되었다. 루뭄바의 철천지 원수인 촘베의 카탕카 주로 이송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서방은 이 사실에 모두 침묵하였다. 루뭄바를 태운 사베너 DC-4 수송기가 바꾸왕가로 향했지만 공항에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알게되자 경로를 바꿔 엘리자베스빌Elisabethville-후일 루뭄바시Lubumbashi로 개명됨-로 향하였다. 1961년 2월 13일 카탕카 주 정부는 2월 12일 루뭄바와 동료 두 사람이 탈출했지만 적대감을 품은 촌민村民들의 손에 잡혀 살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유엔은 루뭄바와 동료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빌에 도착한 1월 17일 21:40에서 21:43사이에 살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와 동료의 시신은 비밀리에 버려져 지금도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루뭄바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가 약속한 희망을 충실하게 전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미국과 서방은 루뭄바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허용하지도 않았다. 루뭄바의 비극은 어쩌면 냉전의 비극적 산물인지도 모른다.

콩고 사태의 최종적인 승리자는 카사부부도 촘베도 아닌 모부투였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그는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동안 독재자의 자리를 지켰다. 모부투가 한 일은 1971년에 콩고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이레Zaire로 바꾼 것 이외에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는 풍부한 자원의 나라 콩고를 피폐시키고 비참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흑단 지팡이와 표범 가죽 모자를 쓴 그의 모습은 신식민주의의 하수인의 표본이었다.

1961년 루뭄바가 살해되고 1965년 모부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기까지 5년 동안 콩고는 열강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용병들이 이 광대한 대륙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콩고의 혈관을 절개했던 것이다. 루뭄바 살해 이후 소련은 그의 죽음을 기려 모스크바에 그의 이름 딴 루뭄바 대학을 만들어 제3세계 혁명가들을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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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네 디트리히, 세레나 허...!!!...???

검은 벨벳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무대, 담배연기 자욱한 무대, 조명이 검은 벨벳커튼을 비추면 실크햇에 연미복, 그리고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가수가 검은 벨벳커튼을 가르고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릴리 마를렌'을 부른다.  

밝은 무대, 조잡한 커튼, 그 빨강색이란... 조명도 없다. 다만 사회자가 말할 뿐이다. '전직 에로 배우 세레나 허...'빨간 커튼이 갈라지고-성적인 의미일까-베티붑처럼 차린 타이트한 가수가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목소리로 '어린 송아지가..'를 부른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윈치 않아도 하나의 '섹스'로 다가왔다. 그것은 갈망이었고, 환상이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이 원한다해도 결코 '섹스'의 이미지는 갖지 못할 것이다. 세레나 허의 신음 소리는 섹스라는 단어 대신 즐거움의 웃음이 된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단어 하나 하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섹스'가 된다.   

마리네 디트리히와 세레나 허를 가르는 경계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또 하나의 절대적인 문구가 읊어진다. '두려움!!!!'.  

릴리 마를렌은 다양한 형식으로 불리워졌다. 애닮은 곡조, 군가의 행진곡, 폴카, 왈츠... 등등등. 이렇게 다양하게 릴리 마를렌이 불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이 다양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두려움은 다양함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상징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그 다양함을 하나로 왜곡 혹은 착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두려움은 하나의 상징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 갈망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와중에서 병사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섹스'였을까? 그래서 마를렌 디트리히의 목소리를 그리워한 것일까? 그것밖에 없을까?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김세원의 밤의 플렛트 폼'이란 방송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늦은 밤 김세원씨의 목소리는 우리 군바리들에게는 하나의 '수줍은 섹스'였다. 무엇 때문에... 여성의 목소리 하나가 그렇게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세레나 허의 목소리는 디트리히와 유사하지만 듣는 사람을 파괴시킬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자신을 개그화함으로서 '섹스' 혹은 '어머니'의 상상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디트리히는 '섹스'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그 자체를 무화시키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 혹은 남성의 영원한 우상인 '구원의 여인'을 구현하고 있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원치않았지만 릴리 마를렌을 통해서 하나의 아이돌로 해석된 것이다. 디트리히는 마돈나이고, 창녀이며 어머니이고 여동생이며 애인인 것이다. 그러나 세레나 허는 우리의 확대해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을 비우지 않고 특정한 상상으로 왜곡해서 보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레나 허를 보면서 왜곡의 잔상을 읽고 그것 때문에 웃는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을 무화함으로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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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서 비극의 시작은 항상 인간의 의지 때문이다. 신의 손길로 그 인간의 운명이 결정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든지 피해보려는-혹은 이겨보려는  인간의 의지는 결국 비극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보자. 천상의 신탁은 '라이오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고 한다. 라이오스는 이를 모면하기 위해 아이를 죽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죽이지 않음으로서 비극은 시작된다.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시종은 '측은지심'에 아이를 죽이는 대신 뒤꿈치를 꾀뚫어 묶은 다음 버린다. 신탁의 운명은 이 아이가 짐승의 밥이 되는 대신 목동부부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길러진다. 오이디푸스가 성장했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듣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그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을 키워준 목동부부를 떠난다.  

오이디푸스에게 이 떠남의 결행은 신탁의 거부라는 명백한 의사표시이며 신의 의지에 대한 인간 의지의 거부를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인간 의지의 표현이 바로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교만'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길을 떠나 테베로 가는 도중 한 노인을 만나 시비가 붙었고, 죽이고 만다. 그 노인이 바로 자신의 부친인 라이오스였다. 이 시대는 이렇게 사소함으로 살인이 저질러지는 시대였다.  그리고 스핑크스와의 대결에 승리한 다음 테베로 들어가 영웅이 되어 미망인이된 요카스타와 결혼한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의지와 용기가 신의 신탁을 완벽하게 이루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버리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확실하게 시종이 오이디푸스를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번 양보하여 목동부부가 사실을 이야기했다면, 너는 우리의 아들이 아니라 주워온 아이이다. 비극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어짜피 비극은 카타르시스라고 했던가? 우리가 금기시하는 것이 비극이라는 장르속에 녹아들어 대리 만족을 이루는 것일까?  금기에 대한 배설이 어쩌면 비극의 심층 저 밑바닥에 있는 것이 아닌지... 

이끼의 천용덕은 이런 의미에서 그 뿌리가 그리스 비극에 접목되어 있다. '두려움이 너를 구원하리라'라는 그 단어는 이끼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의 세계에서 모든 영웅들은 두려움을 거부한다. 그들은 용감하고 야만스러우며, 욕정적이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나약함의 표시일 뿐이다. 헤라클레스는 독이 묻은 옷을 입고 뜨거움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허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는다. 오히려 하인에게 장작을 쌓으라고 명령한 다음 스스로 그 장작위에 누워 불을 당긴다. 그에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는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오이디푸스 역시 마찬가지 이다. 그에게 모든 진실이 밝혀지자 그는 두 눈을 뽑고 딸에 의지한 채 길을 떠난다. 그 떠남은 순례의 혹은 참회의 떠남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 떠남을 통해 도시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그 떠남 역시 영웅적 행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천용덕은 류목형이 죽은 다음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 순간 그는 영웅이 되려한다. 그 소소한 고집으로 인해 자신이 쌓아온 그동안의 모든 행위에 대한 과거가 드러난다. 천용덕은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사물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기록한다. 그것은 영웅의 행위가 아니라 보조자의 행위이다. 영웅은 자신의 움직임으로 주변을 제압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끼에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류목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드러내기까지 한다. 그것은 사소함에서 시작된 '댓가'라는 단어 이다. 천용덕은 류목형의 사소한 부탁을 통해 '철의 시대'에는 진정한 영웅이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그와 유사한 사람은 있지만 그 자체는 없다는 사실... 

결국 천용덕은 류목형의 사소한 댓가를 받아들인 그 순간 영웅이 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 원초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그는 류목형이 한 말을 그대로 자신의 수하들에게 사용한다. '두려움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그것은 신의 주먹 혹은 섭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천용덕은 해석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마을을 감시하고 지배한다. 그의 집 담장에서 보는 마을의 모습을 보라. 마치 거대한 탑 , 아니 거대한 감옥의 감시탑 같지 않은가? 천용덕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왕국에 구현할 수 있었다. 류목형이란 대리자를 통해서.  

그리고 류목형이 죽은 순간 그는 그렇게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았던 신-류목형-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자신을 짖눌러왔던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감히 그는 그림속의 용에게 눈을 그려 넣어 하늘로 올려보내려 한다. 그 사소함이 그를 밑바닥으로 내리친다. 악마가 아니라 신은 바로 천용덕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탐욕을 버리고 어쩌면 오이디푸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시종이 자신의 인간적 잣대로 그것을 거부하였을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처럼, 천용덕 역시 사악함 그 자체로 남았다면, 그것은 완벽한 범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그만 틈으로 인해 '이끼'는 비극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악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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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압박민족인 이스라엘의 화두는 언제나 '해방'이라는 단어에 귀착된다. 이스라엘은 이 해방이란 단어를 투쟁과 항상 연결시킨다. 구약의 모세오경이나 예언서 혹은 역사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은 해방을 위해 항상 이방민족과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에게 이 투쟁이란 단어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이끌어낸 야웨를 통해 알게된 노예성에 대한 투쟁에서부터 시작된다. 종살이 하던 민족을 구원해 내시고... 이런 시편의 귀절은 제처두고라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해방의 의미는 억압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반대로 억압을 끊어버리는 해방의 의미를 역행하는 그 자체는 해방이 아니라 다시 그들이 노예로 돌아가게 하는 것임을 명확히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해방은 아니 노예성에 대한 탈출은 계약이 이루어짐으로서 약속되었던 것일까? 야웨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통해 해방을 약속했다. 그것은 바다의 모래알처럼이란 구체적인 약속으로 성문화되었다. 아브라함이 야웨와 맺은 계약은 이스라엘의 해방에 관한 첫번째 약속이었다. 그리고 모세에 이르러 그 약속은 폭력성을 수반한 구체적인 약속으로 변모한다.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겠다는 명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정말로 야웨는 이스라엘에게 이런 폭력적인 계약을 성사시켰을까? 

사실 야웨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번성이라는 약속을 가장 크게 드러내었다. 그 번성한 후손이 온세상에 퍼져나갈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번성과 퍼져나감이 이 세상의 정복이라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야웨는 자신과의 계약을 충실히 지킬 때만 그 계약의 결과가 드러날 것이라고 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웨와의 계약은 율법의 충실함이 아니라 종교적 본질인 사랑과 충성이라는 것이다. 야웨에 대한 충실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전제 될 때 번성과 확장은 보장되는 것이다.  

만약 야웨에 대한 충실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두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부실할 경우 이스라엘이 야웨와 맺은 계약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종교적 충실함과 순수함을 상실한 종교는 권력의 베일이 될 수 밖에 없다. 권력을 치장하는 종교는 결국 해방적 능력을 상실하는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예언자를 통해 종교의 세속화와 권력에 예속되는 것을 쯚임없이 경고하였다.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은 할례로 대표되는 피의 계약이 아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외친 '그날이 오면 산은 낮아지고, 계곡은 솟아올라 평지가 되리라'라는 것이고 '그날이 오면 사자와 노루가 같이 놀고 아이가 뱀굴에 손을 집어넣는 그런 날'이라는 것이다. 즉 화합과 사랑의 계약이지 선민사상에 물든 폭력의 계약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오늘날의 가자지구 사태를 보면 이스라엘은 전통적인 계약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승리한 듯 보이지만 결코 승리하지 못한 패배의 서곡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권력과 유착하여 나일에서 티그리스까지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장하려 한다면 이스라엘 종교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해방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제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이웃과 화합할 수 있는 국가로 남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제국적인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가자지구의 사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으며 팔레스타인 문제 또한 영원히 폭력의 악순환 속에 가두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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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江의 도도한 흐름은 어떤 역학적인 심오함이 있을까?

물은 앞에서 끌어주는 것일까, 아니면 뒤에서 밀어주는 것일까? 앞에서 끌어준다면 뒤는 수동적인 것이 되는 것이고, 뒤에서 밀어준다면 앞이 수동적인 것이 될 것이다. 역사에서 어느 한 면이 수동적이었던 적이 있을까? 판단이 오직 뒷 사람보다 앞에 살기에 가능한 것이라면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우리들이 반복해서 시행하는 게임이 아니다. 게임은 반복을 통해서 익숙해진다.하지만 역사는 일회성이고 반복이 불가능하다.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를 판단한다는 것은 약간의 유보가 필요하다. 일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은 다르다. 일이 끝난 다음에 평가를 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 평가가 그 시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반작용이다. 그런데 그 반작용을 그 시대를 결정하는 판단으로 환치한다면 그것은 비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그 시대를 판단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

군대의 신화를 아는가? 그 상황은 절대절명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절대 복종 아니면 다른 길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제대한 예비역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군대는 절대 복종의 세계가 아니라 자본심의 세계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세월 혹은 시간이라는 좀이 현실을 개인의 신화로 각색하기 때문이다.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은 그 삶이 어떤지를 잘 안다. 그렇기에 酒席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관용스럽게 용서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의 자존심이 살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서 군대 생활의 진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비극이고 잔인한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진실을 자신의 가슴속에 뭍고 가는 것이다.

단체의 비밀을 토설하는 사람이 배반자이듯 자신의 시대의 부끄러움을 공유하지 못하고 자신만이 용사였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신중하지 못한 것이다. 부끄러움은 삶의 과정에서 현실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난 뒤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지 미래 혹은 과거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철저히 현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렇지 않다면 영원한 사랑을 설파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한다면 영원함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찰라를 생각하기에 영원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長江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밀리는 세대인가, 아니면 떠미는 세대인가?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를 보는 마음의 신중함이 싹트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역사를 눈으로 보지 말자. 왜 역사를 현실의 잣대로 보는가? 마음으로 그것도 깊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눈으로 보면 모든 역사는 현실이 된다. 하지만 마음으로 보면 그것은 진실이 된다. 현실과 진실을 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을 향하게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절대로 이분법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분법은 투쟁일 뿐이다. 그것은 헤겔이 이야기한 정-반-합의 끝임없는 우르보스의 순환이 될 수 있다. 역사가 전진이 아니라 끝임없는 순환이라면 우리 역시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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